정신을 어디다 반쯤 흘리고 온 것처럼 멍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첫 문장이 떠오르면 그래도 글이 술술 풀렸는데 요즘은 생각의 물꼬가 꽉 막혀버린 것 같다. 노트북 앞에서 끙끙거리다 보면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데 글쓰기를 붙들고 놓지 못하는 내 심리가 궁금해진다.
'왜 쓰려고 하는 거지?'
처음엔 직장을 관두고 무용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글을 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음 저 밑바닥을 들여다보니 생활의 근심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보였다. 단어와 문장을 가지고 씨름하는 동안은 재취업 문제, 양가 부모님 건강 걱정, 노후 문제 같은 나를 압박하는 근심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으니까.
문득 아주 오래전 어느 여름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일 년 휴학해서 대학 삼 학년이었고 친구는 졸업반이었다. 교양 과목으로 함께 듣던 수영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수영 듣길 너무 잘했어. 팔다리의 동작과 호흡에 신경 쓰다 보면 취업 문제는 까맣게 잊게 되네."
유난히 화창했던 그날의 태양과, 덜 말라서 물기가 촉촉하게 남아 있던 친구의 머리칼과 씩 웃던 미소가 한 덩어리의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피곤한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한 친구의 탈출구가 수영이었다면 내게는 글쓰기였다.
구깃구깃해진 자존감과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잠깐 물러서서 머릿속 생각과 감정들을 빈 화면에 쏟아내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흘러 있었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갈 에너지가 생겼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그렇게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씩 쌓아가던 중이었는데 최근 개인적으로 신경 쓸 문제들이 많아서 잠시 글쓰기에서 관심이 떠나 있었다. 습관에도 관성이 작용해서 하루 이틀 쉬다 보면 계속 글을 안 쓰게 된다. 그동안 꾸준히 다져놓은 글쓰기 근육이 물러져버리는 것이다.
마침 오늘이 이번 분기 매일글쓰기 모임 마지막 날이기도 해서 모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왜 쓰기 시작했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글을 써 온 날들. 그렇게 해서 삶이 확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내면에서부터 단단하게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조금씩 커져온 걸 느낀다.
그동안 부침은 있었지만 그래도 글쓰기를 아예 놓지는 않았던 관계로 블로거, 브런치 작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는 나라는 사람을 수식하는 단어들이 하나 둘 늘었다. 조금씩 결실이 생기니 처음엔 감사했지만 인간의 마음이 어디 한결같기만 할 수 있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욕심이 나고 때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글쓰기의 문제가 아닌 내 마음의 문제인 거니 잘 다독이며 쓰는 삶을 이어가려 한다. 앞으로 어떤 여정이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나날이 성장해 가는 내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