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공유저작물 창작 공모전 2차 출품작 - '인어공주' 다시 쓰기
아주 먼 옛날 인어 왕국은 지금처럼 깊은 바다 밑에 있지 않았다. 해수면에서 가까운,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인어 임금의 궁전과 인어족 마을이 있었다. 산호초로 지어진 집들 사이로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데 어부들 사이에 인어 기름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인어들이 남획되었고, 이로 인해 인어족은 인간을 피해 까마득히 깊은 바다 밑으로 이주했다. 인어들이 사라지고 난 후 인간은 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삶의 터전을 옮긴 인어족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인어 임금에게는 금지옥엽인 외동딸이 있었는데, 인어족이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달리, 공주는 호기심이 많아서 항상 바깥세상을 동경했다. 하지만 임금은 공주가 바다 위 세상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그녀는 모두가 잠든 틈을 타 몰래 수면 위로 올라가곤 했다.
어느 날 밤, 공주는 모험심이 발동하여 멀리 강 하구까지 헤엄쳐 가서 모래톱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찰싹대는 파도소리, 선선한 공기, 까만 하늘에 금가루처럼 흩뿌려진 별들... 모든 것이 완벽한 밤이었다. 그때 부스럭부스럭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소년이 나타났다. 그는 인어를 보고 깜짝 놀라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 공주도 당황한 채 소년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서, 설마 인어?"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공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할머니 말이 맞았어. 울 할머니가 바닷속에는 인어들이 산다고 했거든."
좀 전의 놀라움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소년의 눈에는 반가움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혹시 내가 말하는 걸 알아들을 수 있어?"
소년이 묻자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어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지만 듣고 이해하는 것은 가능했다. 소년이 물어보면 공주는 몸짓으로 대답했다. 신기하게도 둘은 대화가 잘 통했다.
소년은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작은 어촌 마을에는 친구가 별로 없어서 혼자 강 하구에 나와 풀피리를 불거나 별자리를 쳐다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인어공주를 만나게 된 소년은 몹시 들떠 있었다. 처음으로 인간을 만나게 된 공주도 설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 둘은 친구가 되었다. 소년은 공주에게 별자리의 전설을 알려주었고 갈대 잎을 따서 풀피리를 불어주기도 했다. 그러면 공주는 그에게 곱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공주와 소년이 자라날수록 둘의 우정도 점점 커졌다.
어느 날, 소년을 만나기로 한 날은 아니었지만, 공주는 문득 강어귀에 가고 싶어 졌다. 그날따라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이 보고 싶었다. 공주가 뭍으로 나왔을 때 구름이 음산하게 드리워진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았고 별은 보이지 않았다. 상심한 공주는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그물이 날아오더니 그녀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어부가 노랫소리를 듣고 공주를 발견하여 그물망을 던진 것이었다. 인어공주는 애처롭게 울부짖었지만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인어가 아직도 존재하다니! 옛말에 인어 기름이 그렇게 좋다던데 오늘 횡재했네, 횡재했어."
신이 난 어부가 그물망을 끌어당겼지만 몸부림치는 인어공주를 혼자서 끌고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에잇, 수레가 필요하겠어."
그는 그물망을 단단히 묶어 공주가 도망가지 못하게 해 놓고는 들것을 가져오기 위해 마을로 달려갔다.
공주가 구슬프게 울고 있을 때 갑자기 사색이 된 소년이 나타났다. 그는 마을에서 어부가 인어를 잡았다고 고래고래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급하게 달려온 길이었다. 소년은 칼로 단단히 묶인 그물 매듭을 끊고 그녀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공주가 다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수레에 그녀를 태운 후 담요로 덮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가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녀는 손자로부터 전해 들은 말이 있어서인지 인어를 보고도 크게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침착하게 공주를 집 안으로 들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소년의 집에서 보내는 사이 인어를 잡았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던 어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허풍쟁이라는 핀잔을 듣고 화가 나서 도시로 떠나 버렸다.
소년의 집에서 머물면서 인어공주는 인간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잔인하고 무서운 존재인데 소년과 소년의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공주의 입맛에 맞도록 신선한 조개나 해조류를 조리해주었고, 그물과 돌에 쓸려서 난 상처를 치료해주었으며, 가족처럼 따스하게 보살펴주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할머니에게 주고 가는 모습을 보며 공주는 인간에게도 나눔을 베푸는 면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일부 욕심 많은 어부들로 인해 인어와 인간 사이에 깊은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자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 생각에 공주는 서둘러 바다로 돌아갔다. 외동딸이 돌아오자 인어 임금은 크게 안도하며 기뻐했다. 그는 공주가 인간에게 잡혀간 것으로 생각해서 절망에 빠져있었다. 공주는 인간이 얼마나 따스하게 자신을 보살펴주었는지 말했고, 임금은 무사히 돌아온 딸을 환영했다.
그렇게 한동안 무탈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날씨의 신이 심술이라도 난 모양인지 어느 날 갑자기 인간 세상에 큰 사고가 생겼다. 석유를 잔뜩 싣고 가던 배가 풍랑에 좌초되어 기름이 바다를 뒤덮은 것이었다. 검은 기름띠는 바다와 갯벌을 오염시켰고, 해산물을 팔아 살아가던 어민들의 생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아무리 제거해도 기름이 없어지지 않자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다. 소년을 통해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전해 들은 공주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깊은 바닷속에는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비스러운 해초가 있는데 기름을 흡수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인어 임금은 공주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사람들이 잠든 한밤중에 인어족과 물고기 떼를 동원하여 신비의 해초로 기름을 제거해주었다.
날이 밝자 사람들은 어제까지 수면 위를 검게 덮고 있던 기름띠가 깨끗하게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자연의 치유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힘들게 되찾은 삶의 터전에 고마움을 느끼고 울먹이며 절을 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멀리서 바닷물 속에 몸을 감추고 이를 지켜보던 인어공주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햇살이 쏟아져내려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