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볕 Oct 21. 2022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장을 보고 양손 묵직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녁 7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밖은 환하다. 아직은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어 후덥지근하지만 바람이 살짝 선선해진걸 보니 이제 곧 가을이 다가올 모양이다. 이번 여름은 유달리 우중충한 날씨와 잦은 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다. 뉴스에서는 연일 수해 소식과 안타까운 죽음을 보도했고 이로 인해 올여름은 내게 칙칙한 잿빛으로 기억될 것 같다. 물론 푸르른 제주 바다에 안겨 보냈던 여름휴가나 한옥카페테라스에서 듣던 빗소리,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아 벌컥벌컥 들이켜던 차가운 맥주 같은, 떠올리면 즐거운 기억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더위와 장마로 인해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지던 날들이었다.


흔히 청춘을 여름에 비유하곤 한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잠깐의 즐거움과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다는 점에서 올여름과 닮아 있다. 설레던 대학 입학,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아 처음으로 떠났던 어학연수, 대학 졸업반 시절 간절한 마음을 담아 사각봉투에 입사원서를 넣고 우체국에 가서 부치던 기억(당시에는 온라인 접수와 우편 접수 모두 가능했고 회사에 따라 개인의 성의가 담긴 우편 접수에 가산점을 주는 곳이 있었다.), 운 좋게 얻은 첫 직장을 적성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때려치우고 그 뒤로 숱한 불합격 통보를 받으며 마음 졸이던 날들, 다시 취업한 후 야근과 주말출근에 시달리던 기억...


내 청춘은 낮은 자존감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서 흔들리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사실 청춘은 원래 방황의 시기이고 따지고 보면  나이 또래 누구나 비슷한 혼돈의 터널을 지나왔을 텐데 나이만 먹었지 미성숙하기 그지없던 나는 내게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것처럼 상황 탓이나 남 탓을 하기에 바빴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 다행히 흐르는 세월과 함께 마음도 성장해서 이제는 '탓'을 하기보다 지나간 일은 내버려 두고 현재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새로운 계절의 냄새가 스며 있다. 이제 인생에서도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텃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내 물과 비료를 주며 돌본 수고를 탐스러운 결실로 보상받는 수확기에 남들과 비교해서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뿌린 건 고추 씨앗인데 다른 사람들의 호박이나 가지를 부러워하면 안 될 일이다. 지나온 계절에 아쉬움이 남는다면 인생의 후반기를 잘 보내기 위해 마음가짐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님과 비교하지 말 것.

현재에서 행복을 찾을 것.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실천하고 있는 두 가지 원칙이다. 남과 비교하며 나를 깎아내리던 태도가 불행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고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글쓰기라 브런치와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적으며  삶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거 해서 뭐 할 건데?'


못난 마음이 부정적인 아우라를 풍기며 스멀스멀 고개를 들 때면 책 속의 구절을 떠올린다.


행동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행동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결과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중략)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때, 존재를, 고요함을,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더 이상 미래에 의존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래에서 구원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중략) 심리적 시간에서 벗어나면, 자아 감각은 당신의 과거가 아닌 존재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려는 심리적 욕구도 사라집니다. 삶의 상황 속에서 당신은 부자가 되고,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성공한 자리에 오르고, 이런저런 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존재의 더 깊은 차원에서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완벽하고 온전합니다.

p. 55~56 /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순간의 나



"뭘 꼭 이루어야만 가치를 인정받는 건가? 고양이, 돌멩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냥 존재하니까 살아가면 되는 거지. 의미를 찾지 말고 재미를 찾아봐."


직장을 관두고 무력감과 코로나 블루로 인한 이중고를 겪을 때, 남편이 내게 해 준 말이다.(그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을 이미 읽었던 것일까.) 이 말은 당시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정답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초조해질 때면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순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불안하게 들끓던 마음이 진정되고 내면에 고요함이 찾아온다. 성취는 행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고, 설령 결실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노력한 과정이 내 삶에 더해졌으니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나를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어느덧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후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한여름을 뜨겁게 달구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어느새 풀숲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된 여름이 지나고 이제 가을이 오려나보다.




PS. 9월 초에 적어두었던,  작가의 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글을 뒤늦게 올려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에 찾은 그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