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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May 12. 2021

어머니가 녹으면 이 집도 끝이에요

유계영의 시집을 읽고

거리의 보도블럭에서 밟은 껌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는 일

죽음까지 끌고 가는 일


「퍼니스트 홈 비디오」부분.


거리에서 보게 되는 더러운 것 중 대부분은 인간의 입을 통해 뱉어졌다. 그것들은 아직 온도가 짐작될수록 더러운데. 다시 말해, 인간의 안쪽과 가까울수록 더 더럽게 느껴진다. 이를 마주할 때 불쾌한 까닭은 삶과 죽음의 장소를 명백하게 분리한다고 믿는 인간의 사회에서, 흔적들이 뒤엉켜 유지되는 동물의 사회로 귀환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바닥에 붙은 껌의 원인을 찾는 일은 생각하기 무섭게 무의미해진다. 밑창에 눌린 껌을 보고 화를 내는 일이 가능할까? 개별 인간에 대한 추적은 가능하지 않다. 조장한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은 내가 사는 곳 전체를 되돌아보아야 문제로서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은 '익명으로 버려진 껌 따위가 누군가의 하루를 상하게 하는 일이 <시>로서 말해져야 할까?' 이다. 이 하찮은 일을 문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 지점에는, 길바닥을 제 것처럼 권력화하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에서는 얌전하게 껌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침과 가래가 더 많다. 누가 이것들을 길바닥에 뿌려 놓을까. 이것을 피해 걸어 다녀야 하는 이는 누구일까. 



'대부분의 코미디가/ 운 나쁜 캐릭터의 수치심으로 마무리되는 일'처럼 우스워지면 끝난다. 이런 일에 반기 드는 것은, 밟힌 껌처럼 살짝 뭉개지는 것을 당연히 했던 분위기를 깨는 일이다. 시인은 당하는 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재미없게-정의롭게 말하는 대신 만연한 웃음을 가로막는다. 아까 밟고 온 껌의 저편에 죽음이 묻어있는데요, 그게 다름 아닌 '아버지'였네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 시의 제목은 <퍼니스트 홈 비디오>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누구의 아버지인가? 문제는 그런 '아버지'들을 모으면 사회 전체를, 그 중에서도 제법 높은 곳을, 문제를 겨누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대놓고 말하자. 화자는 명백하게 여자이다. 이 여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그녀가 '처세술'이라고 자조하는, 여성의 삶을 만나보자. 


공기 속의 말을 떨어뜨리지 않는 신체 훈련

다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좋다


「내일의 처세술」부분.


바닥에 버려진 껌과 침과 가래를 피해 걷고 급기야 화자는 '말하지 않는' 훈련을 한다. 이때 그녀의 침묵은 생각-없음, 말-없음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입과 성대를 스스로 잡아 붙드는 '힘'의 결과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바닥에 붙은 껌을 피해 걸어 다니는 날렵한 발과 이어져 있다. 이제 화자를 완전히 '그녀'라고 말하겠다. 그녀는 실은 '다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그런 자신을 긍정한다. 그녀는 들리지 않게 살아있고,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어째서 드러나는 방법을 연습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녀로 살아보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기분에 비해 너무 작은 입으로/ 무슨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잘 죽지 않는 이 기분을/ 천천히 바뀌는 표정이 보여 준다" 「모형」 부분. 그녀의 입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은 체리를 먹기 좋을 만큼만 크고, 듣기 좋은 웃음을 지을 만큼만 크다. 하고 싶은 말을 목으로 붙들어 내는 것. 이것이 그녀가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 '처세술'이다. 



내가 사라져 주길 원하겠지만

나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나를 향해 무엇이든 던진다

팔걸이

손잡이

문고리의 위치


「뛰는 사람*」 부분.


하고 싶은 말을 붙들어 매는 그녀의 힘이 이것을 알아 채지 못할 리가 없다. '내가 사라져 주길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날린다. '나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사회에서도 '굳세게' 있기로 한다. 심지어 '문고리의 위치'를 던져도 말이다. '미시오'와 '당기시오'의 표시는 언제나 문 앞에서 속인다. 그녀는 문 앞에서 언제나 한 번 이상의 수고를 할 테고, 때문에 문을 여는 데 시간이 더 걸리며, 심지어는 지금도 문고리가 아예 없는 곳에서 문의 사방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대신, 그래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먼저 대답하고, 그녀 이후의 세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넨다. 


  

소년아 소녀아

지붕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높이 더 높이 올라가 보는 것뿐이다

너흰 가장 오래 지속되는 감정을 찾을 때까지

떠돌아야 한다

그래서 너희는


「불이야」 부분.


건물의 '꼭대기'를 상상하라고 말이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았을 건물, 알지 못하는 설계의 문 앞에서 그다음 공간에 진입하는 비좁은 상상을 하는 대신, 많이 떠돌아다니라고 말한다. 너희에게 문은 필요 없어. 그러니 그따위 열쇠를 가지려고 할 필요도 없지. 다만, 높이 올라가서 '지붕의 모양'을 확인해라. 나처럼 문 앞에 있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더러워진 거리에 닿지 않도록 온 다리에 힘을 주며 걷고, 거리의 껌 따위에 아버지의 죽음을 붙여 놓는가 하면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잡아 붙드는 신체 단련을 하고, 문고리를 던지는 이들에게 맞서 내 이후의 세대의 아이들에게 '지붕 꼭대기'를 살피라는 말을 전하는 그녀의 이야기의 끝에는, 어머니와의 만남이 있다. 거의 다 지워져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흔적의 '어머니'. 이 둘의 만남이 공교롭게도 '문 앞'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어머니가 녹아 안이 된다'「불이야」 부분. '녹는 점'은 물질이 제 형태를 지키는 한계로서의 온도이다. 


가부장제로 이뤄진 가족의 녹는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녹으면 이 집도 끝이에요. 라는 탁월한 설명 앞에 도착한다. 이 집을 태우는 건 바깥에서 던진 불씨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충실한 복역자로서의 어머니가 자신의 온도를 기억해 내는 일이다. 그간 어머니의 노력은- 인간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일들이었다-'믿음'의 소산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그 혼신의 힘을 그만 두세요. 그녀가 말한다. 


문 앞의 어머니

어머니가 녹아 안이 된다

안이 녹아 불이 된다

이 집은 믿는 집이야


「녹는점」 부분.


『온갖 것들의 낮』은 부서진 자리가 폐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빛이 얼마나 환하게 들어올 수 있는 지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 빛을 보려면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자리가, 나 스스로가 한 번은 깊은 나락에 이르러야 한다. 시인은 이것을 먼저 다녀와서 들려준다. 이 책의 화자는 대체로 두 갈래의 이야기를 전했다. 하나는, 아프고, 잠이 들며, 병들어 새벽 4시를 보는 나의 폐허가 만난 한 낮이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또 하나의 줄기는 '여자로 살기'이다. 저 바닥의 껌은 다 무언가? 그게 어디와 연결되어 있나? 여자는 왜 말을 하지 않는가? 그녀의 입은 왜 그렇게 작은가?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여자'의 서사를 불러내고 싶었다. '욕심'이라고 말해도 좋다. 더 내고 싶으니까. 나는 유계영의 시집을 이렇게 읽었다. 


: 읽고 쓴 책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8352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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