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에게는 한 달, 아니 일주일치의 전망도 없다. 그에게는 계획이라는 것이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돈은 쌓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얻는 것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전망만이 가능하다. 그는 하루안에 해결을 봐야하는 사람처럼 경마에 달려 든다.
성기훈의 전망은 내기에서만 존재하며, 온힘을 다해 밝다. 인생이라는 시간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기로 한 이들의 사정이다. 한달, 분기, 육개 월, 1년의 계획이 이들에게는 없다. 한달 뒤에 빚을 갚지 못하면 장기 매매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의 인생이 전망할 수 있는 모든 가치를 이미 다 교환해버렸다. 이것이 그가 지고 있는 빚의 진정한 뜻이다. 이들이 오징어 게임에게 참여하는 대가로 건 마지막 판 돈은 자신의 '현재'이다. 전망은 일찌감치 내놓았고, 이제는 오늘을 내놓는다.
"돈은 한 쪽만 원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얻고, 다른 쪽은 돈을 받아 가지고 있다가 다른 것으로 바꾸는 수단으로써, 본질적으로 전망에 따르는 미래의 가치 저장소이다." <전망하는 인간, 호모 프로스펙투스>중에서
사회에서 돈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게임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돈의 가치가 실재한 적은 돈이 탄생한 이후로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오징어 게임에서 나오는 이 우습고도 무섭고 말도 안되는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을 비웃을 입장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성기훈의 놀라운 점은 아직 감정이 살아있다는 점이다. 자신과, 가족과, 부모의 인생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됐음에도 그는 웃을 수 있다. 그에게는 아직 이웃을 돌보거나 가여워하고 딸을 생각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캐릭터의 시간을 인간의 것으로 다시 이해한다면, 노동으로 자신의 인생의 대부분을 저당잡힌 보통의 사람들도 떠올릴 수 있다. 보통 8시간은 회사에서 일을 수행한다. 때문에 평생을 살아도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고,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그들에게도 아직 감정이 있다. 일말의 감정들. 가여워하고, 남을 돌보기도 하고 심지어 사랑을 한다.
이들은 대부분은 일로서 추가된 자아가 자신인 줄 알고 착가하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어떤 일을 유능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사회가 있다. 그러나 그 일이 달고나의 별을 부서지지 않고 떼거나 우산을 유능하게 떼어내는 일과 얼마나 크게 다른가?
독자는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 이를 가여워하면서, 조금 더 나은 전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안심한다. 전망이 조금 더 길게 남아있는 우리에게는 다양한 마음이 남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말해 성기훈의 감정을 신기해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궁금해하는 것과 같다.
일말의 계획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기훈의 인생은 아이들을 닮았다. 인생을 살아본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계획이 필요없는 아이들 말이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인생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계획이라는 것이 필요 없는 시기가 있다. 하루 하루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면 되는 것이다.
인생이 유구한 것처럼 보이는 대여섯, 예닐곱살의 인생에서 긴 하루를 보내기 위해 즐겼던 놀이를 꺼내오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해석해본다. 어른의 몸에 어린아이의 전망을 가져버린 비극적인 이들에게 걸맞다. 수도 없이 해봐서 모를 수가 없는 유년의 기억들. 최초로 가졌던 기쁨과 분노와 신남과 억울함의 감정들. 처음으로 '능력'을 서로에게 꺼내놓았던 순간을 재현한다.
경마장에서 말에게 돈을 걸듯 VIP들이 이들의 게임을 실제 관망하며 돈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있을 법하다는 인과를 받아들이게 된다. 게임 진행에 특징은 기계적인 잔인함 외에도, 익명성과 강박적인 미술이다. 게임을 진행하거나 주관하거나 보는이들은 철저히 익명성이 보장된다. 서로가 누군인지도 알수 없다. 이것은 범죄와 흡사하며, 은유같다. 밝혀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점이 바로 이 게임이 잘못되었다는 암묵적인 동의이다. 그러나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모든 것이 투명하다. 인생을 바코드로 읽히며, 밝고 깨끗한 세트장에 같은 옷과 다른 번호로 관리된다.
게임에 지는 자들에게는 지체없이 관이 따라나오는데 이 이상한 예의를 VIP의 마지막 양심 같은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이들은 선물 상자나 케익 상자를 떠올리게 하는 예쁜 관에 이들을 담아 화장한다. 이것은 강박적으로 죽음을 치우는 일이다. 더러운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은 깨끗이 치우면서 이왕이면 보기 좋게 치운다. 예의도 차리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고, 한편으로 희화화하면서(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죽음을 홀대하면 따라붙는 불편하고 유서깊은 감정까지 훌훌 털어버린다.
전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미래 없는 인간이 한 때의 어린아이를 닮았다는 점, 그래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 바로 유년의 놀이라는 것.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가 크게 다를 바 무엇인가라는 물음까지 잘 꺼내놓은 세계관에도 실패가 있다. 21세기가 되어도, 83개국인가에서 넷플릭스 시청률 1위를 기록해도 여자를 그리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존해한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일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보다 더 조잡하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한미녀라는 캐릭터는 이 과잉된 캐릭터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더 과잉되었다. 이 캐릭터의 유일한 좋은 점은 욕하기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을 하면서도 좀 이상할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를 설명할수록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를 쓰기로 작정한 몇몇의 장면이 먼저 탄생했고, 그 다음에 대사가 붙여졌다. 그녀가 대체로 화장실에 있었던 장면을 삭제해보자. 극의 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수 있다. 드라마의 자극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를 우리는 실패라고 부른다. 긴장도 없고 서사도 잇지 못하는 한미녀의 존재는 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