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종묘를 가기 시작 한지 5년 되었습니다. 왜 새해에 종묘를 가느냐고 묻는다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요. 우선은 우물쭈물 저만의 리추얼이라고 먼저 운을 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왕과 세자, 그리고 궁에서 일했던 이가 아니라면 들어오지 못했을 곳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나가 되어 들어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 뭔가를 빌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곳은 나의 안녕을 꺼내기에 너무나 거대한 장소입니다. 도착하게 되면 그런 생각은 별로 들지 않지요. 차라리 월대가 된 돌의 영원함을 빌게 됩니다.
지난 5년의 경험에도 따르면 종묘에는 언제나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대체로 적막하지요. 신나고 벅차서 찾아가는 장소는 분명히 아닙니다. 그것은 종묘가 가진 색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종묘를 생각하면 먹색이 떠오릅니다. 살아있는 것 같지 않지요. 살아있는 것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니까요. 적막 속에 1월의 종묘의 연못은 늘 얼어 있었습니다. 제의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들을 키우지 않아 연못에 물고기가 없었다는 설명은 장엄합니다. 그러나 종묘로 이끈 것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삶의 위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기능을 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리추얼에는 다짐과 반성과 나아감의 속성이 있는 듯합니다. 말없이 걷기 좋은데 사람이 많지 않고 겨울의 색과 압도적으로 어울리는 곳입니다. 종묘는 기분이 즐거워지는 장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기분을 다운시켜주는 곳이겠지요. 적막과 먹색과 이따금 얼어붙은 눈자국을 봅니다. 다시, 종묘를 나오면 빌딩과 쏟아지는 차들로 가득한 도로가 바로 앞입니다. 종묘에 잠시 숨었다가 제가 살고 있는 세계로 나오는 거지요. 박물관 미술관 그리고 서울의 궁들은 월요일에 쉬지만 종묘만은 화요일에 쉽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리듬과 다른 모습인 것만 같습니다.
저는 지방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서울에서 산지는 어느덧 10년을 향해 가고 있는데요. 살고 있다.라는 말을 꺼내니 조금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살려고 노력했는데, 어느덧 살고 있다는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곳에 살게 된 저는 마음만 먹는다면, 종묘가 닫는 화요일을 제외하고 5시까지만 도착한다면 종묘의 안쪽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1천 원 밖에 하지 않지요. 종로 3가에서 내리면 종묘의 입구가 조금 멀어 보여도 금방입니다. 장엄한 신도를 피해 걸으면 정전에, 월대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서면 가슴팍 정도 올라오는 제단이지요. 여기서부터는 이승의 공간이 아님을 선포하는 돌의 짜임을 봅니다.
그전까지 그저 그 단어로만 존재했던 무엇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때 '단어'는 세상을 견디는 문을 갖게 됩니다. 서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종묘가 이토록 가까운 곳이 되었습니다. 이 방문에 따른 저의 운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곳에 살았더라면, 비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종묘는 여전히 단어로만 존재했을 테니까요. 1년에 한 번 종묘에 방문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안녕과 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전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파노라마처럼 눈에 담아야 하지요. 종묘의 실제로 존재하는 돌과 실제로 존재하는 소나무와, 얼어 있었지만 봄이 되면 녹아서 고요하게 연못일 그곳을 생각합니다. 다짐과 반성과 나아감의 시간에 종묘를 넣어보세요.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 세계에 여전히 자신의 시간을 축적해 저 세계의 적막을 잊지 않은 공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묘에 들어가기, 걷기, 나오기 모두가 당신에게 낯설고도 이상한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제가 새해 첫날 종묘에 가는 이유입니다.
새해에 가기로 약속한 덕분에 종묘제례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만, 올해는 종묘제례 때 가보려고 해요(5월 초와 11월 초). 저 월대 위에 사람들이 엎드린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귀에도 종묘가 가득 차겠지요.
종묘 바로가기> http://jm.cha.go.kr/J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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