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에 대한 일말의 신의를 잃어버린 날
매도자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의 아이가 있는 부부였는데 부부의 인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선 남편은 위아래 정장에 조끼를 입고 있었다. 다니는 회사에서도 풀정장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임원밖에 없었기에 낯선 옷차림이었다. 조끼란 대관절 무엇인가. 3피스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의 취미와 직장은 무엇일까. 물론 나도 조끼를 입긴 한다. 패딩으로 되거나 양털모양으로 된 것을. 그의 조끼는 버튼이 3개가 있는 조끼였는데 계약할 때 한 번 봤다. 그 자리에서 말이 많은 것도 이상하지만, 그는 어쨌든 과묵했고, 집을 보러갔을 때 만났던 매도자 아내는 친절했다.
그들은 4년 전에 이 집을 매수했고, 이제 직장 근처로 옮긴다고 했다. 나와 계약자의 나이 차이는 8살. 내가 매도자보다 8살 어리다. 20살 때 매도인은 28살. 내가 30살일 때 매도인은 38살.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매도자는 앞서나가 있다. 서울 변두리의 집을 팔고 회사가 있는 강남 근처로 이사간다는 그는 앞으로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를 보낼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약간의 수리라도 1주일이 소요되어 계약 후 바로 들어올 수 없었고, 그 동안 집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가 드디어 청소를 마치고 두 번째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 알게 되었다. 욕실의 배수구 하나가 막혀 있었던 걸.
욕실의 배수구는 총 3곳인데, 한 곳은 샤워실이고 한 곳은 세면대. 그리고 한 곳은 세면대와 샤워실이 분리된 곳의 바닥에 있었다. 바로 그 곳이 막혀서 물이 내려가질 않았는데 이것의 문제는 여러 개 이다.
1. 계약전에도 후에도 중개인에게도 나에게도 말하지 않았음
2. 고칠 수 있는 시간이 3개월이나 있었음, 어느날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님
3. 나는 이미 1차 공사를 하고 들어옴.
4. 앞으로 얼마나 문제를 겪게 될지 예상되지 않음(공사의 정도, 기간, 그간의 불편함)
그들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배수가 안된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였고 당장 부동산 중개인 분을 모셨다. 전혀 물이 내려가지 않는 모습을 보더니 그 조끼까지 3피스의 매도자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중개인인데요, 지금 이 집 배수가 안되네요? 왜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이분들 공사하고 오늘 들어오셨는데 굉장히 불편해 하고 있어요. 이거 수리해주셔야겠는데요.
-그걸 왜 내가 수리해줍니까?
-그거 뚫는거 얼마 안해요
-내가 집주인이에요? 왜 이런것까지 나에게 전화를 합니까?
-그럼 방문고리도 나간 것도 다 고쳐줘야겠네요?
-그게 왜 불편합니까?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살았어요
-왜 이런걸로 떼를 씁니까. 임차인이에요? 매수했잖아요?
-아 그거 하려다가 아랫집이 시끄럽다고 해서 공사를 못했어요
-아니 솔직히 싸게 매도 했잖아요? (당시 아파트 신고가)
기적과 환장의 논리.
중개인 분은 아주머니셨는데 저런 말에 하나씩 설명을 하다가 마지막 말에 화가 났다. 당시 이 집은 신고가로 매매되었다. "좋은 가격에 파셨잖아요"라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고,
이 모든 이야기를 스피커폰으로 듣고 있었던 나와 동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8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예의를 차려줬더니 되먹지 않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중개인분께 말했다.
지금 제가 저런 말을 왜 들어야 하나요? 당장 끊으시죠.
이 상태로 욕실을 쓸 수 없으니 주말내로 매도자와 소통하고 견적 및 수리를 진행해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일주일 안으로 원상태로 되돌려 놓지 않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 일을 처리하고 여기에 드는 경제적 정신적인 보상을 모두 청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중개인 분도 당연히 책임이 있으시고요.
중개인 분도 역시 부부셨는데, 남편 중개인분이 오셔서 분개하시고는 주말 내로 연락해서 빨리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고 갔다.
그리고 화가 잔뜩 남은 나와 내 동생이 집에 남아서 분개했다.
왜 스피커폰으로 전화할 때 저 말에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저 매도자의 책임을 다하라는 건데 왜 그렇게 근거도 논리도 없는 말을 쏟아냈을까?
불편없이 살았다고? 청소는 아내가 혼자 다 했나? 저걸 어떻게 청소했나?
왜 그 정도의 정신머리 밖에 없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딸이 있어도 사람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걸까?
그는 애초에 나를 뭐라고 생각하길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떼를 쓴다고? 당신의 아파트를 내가 샀는데? 당신만큼 어른인데?
내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가 당연히 문제를 삼았을 일이었을텐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에 대한 일말의 신의와 내가 알지 못하는 인생에 대한 존경이 다 사라지는 날이었다.
더불어 아랫집에 공사 관련 내용을 확인 하러 갔다. 저희가 오늘 이사왔는데, 욕실에 문제가 있고, 아랫집이 항의 때문에 공사를 중지했었다고 해서요. 그는 말했다. 네, 기억나요. 그때 주말이었는데 아주 시끄러웠어요. 보통 공사 신고를 하고, 주말에는 공사를 하지 않는데 아무 공지 없이 해서 올라왔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그만해달라고는 안했어요. 그리고 그게 공사라니. 30분도 채 안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위층 분이 그러시던가요? 참 그렇게 안봤는데.
그는 다음 날 우리집 앞에 기다려 명함을 주고 어제의 이야기를 부연하고는, 도울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말했다.
아래층 이웃까지 팔아먹은 매도자. 주말 내 중개인은 조끼 매도자와 통화를 했고, 그 정신머리 없는 매도자가 자기가 직접 수리업자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 수리업자는 30분 만에 배수구를 뚫었는데 문제는 심플했고 비용도 몹시 쌌다. 지금 30분이면 될 일을 가지고 매수인이 들어올 때까지 수리를 안하고 있었던 건가? 다시 생각해도 화가났다. 저희 어제 이사왔거든요. 그러자 수리업자분은 말했다. 고생하셨겠네요. 그런데 이런 일이 정말 많더라고요. 이걸 안고치고 이사를 가요. 라고 귀띔했다. 이점에 또 한 번 놀라면서 다른 곳 배수구와 지금 해결된 곳이 또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몰라 이 점을 문의하니, 그는 정말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다른 곳은 이상없고, 이곳은 앞으로 10년은 문제 없을거에요.
15만원 짜리 공사 덕분에 매도자의 바닥을 보게 된 사연이었다.
나도 언젠가 나보다 8살이나 10살쯤 어린 이와 거래를 할 일이 있을지 모른다. 그때 그를 온전한 성인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나보다 아직 어리다는 점을 늘 생각해서 일을 진행하자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 집을 살 때 힘들었던 점을 그들도 처음 부딪히고 있을테니까. 적어도 논리와 근거에 맞는 말을 하고, 예의를 지키고, 내가 가진 권리만큼 책임을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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