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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Jul 10. 2024

<유퀴즈>와 <TV는 사랑을 싣고>와 어떤 우정2

https://brunch.co.kr/@springswim/91

이 글의 후속편이다. 이 글은 노래 추천으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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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기가 걸린 하늘. 전교생이 100여명도 되지 않은 작은 학교였지만 운동장은 한 반에 60명이 있던 시절의 것과 같아 어지간히 컸다. 음향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을 사로잡는 소리는 아니었을테고 소리도 원체도 작아서 기억에서 잊혀지기 쉬었다. 혼자만 서 있기 좋은 자리였고, 거기에 있는 것이 나였고, 나만 아는 리듬 타기와 당기기의 은은한 장이 있었다. 거의 내 귀에서만 들렸던. 색이 좀 바랜 만국기 몇 개가 하늘에서 그 리듬을 타주었을 것이다.


내게 건반을 알려준 선생님은 학년에서 인기가 매우 많았고, 과장을 조금 보태면 전교생(100여명)의 맹렬한 사랑을 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설명을 하나 해야겠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오늘날 <유퀴즈>에 비견될까? 아니 비할 수 없이 그보다 더 유명했다고 기억한다. 당시 반 아이들이 선생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 프로그램에 출현해서 반드시 선생님을 찾겠다고 말하는 거였다. 


<유퀴즈에>나와서 소중했던 선생님에게 영상 편지를 쓰겠다는 말은 허황되지만,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가서 선생님을 찾는다는 것은 가능할수도 있는 일처럼 생각된다.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당신을 찾는다는 것은, 출세와 성공의 다짐인 동시에 당신이 소중하다는 징표였다! 그런데 프로그램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조건이 있다. 사람을 찾으려면 끊어진 인연이어야 했고, 또 찾기 어려운 인연이어야 했던 것. 그때 반 친구들이 그것까지 염두하면서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의 위세로 보면 몇 십년 후 선생님은 기필코 반드시 티비에 나올 운명이었다. 그러나 수 많은 전국 초등학생들의 약속과 다짐에도 무심하게 그 프로그램은 사라졌고 선생님을 찾아야겠다는 약속도 기억 속에서도 멀리 사라졌다.


그때 나는 너는 누구를 찾을거야? 라는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초등학교 오학년에게 귀엽지 않게도 앞으로 펼쳐질 긴 인생, 맹랑하게도 마치 건반같이 길고 긴 날들 중에사 내가 진짜로 찾고 싶은 사람이 누가 될 수 있을지 아직 가늠할 수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만한 사람이 '아직 없다'에 가까웠고 이 작은 침묵은 모든 아이들이 당신을 찾겠다는 고백의 와중에 선생님을 완전히 기쁘게 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나는 순수함이 좀 모자랐을 뿐이었고, 거짓말을 할만큼 순수함이 많이 모자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시 그 건반이 계속되고 있다. 스스로를 약간 시시하다고 생각하던 오학년을 주인공처럼 찍어주는 엄마 덕분에 가까스로 주인공처럼 서본다. 렌즈에 서로의 눈을 맞춘다. 아, 엄마의 눈은 안보이지민 웃는 입가가 보인다. 엄마의 웃는 입가. 엄마는 이 순간이, 지금 이곳에 오직 나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이 학교에 건반은 한대 뿐이었다. 


메들리를 몇 시간 치고서 내려왔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그건 한 사람의 추억도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음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어진 추억. 이를테면 다리 저림, 삐딱함, 뙤양볕 기타 등등. 그 후에 나는 꽹과리를 괄괄괄 괄치며 다시 운동장에 있는 애들 중 하나가 되었다. 천연덕스럽게 상쇠를 보좌하며, 어느 때는 상쇠인양 깡깡거리며, 깝쭉대면서 징구와 징 사이를 오가며 놀았다. 그때는 신났던 것 같았다. 모두의 안에서, 모두의 눈알이 내게로 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나를 자주 찍어주었던 이가 어째서 당신은 사진 찍을 때 계속 눈을 감느냐며 가벼운 타박을 자주했던 것을 생각한다. 그 짧고 많은 순간에 나는 눈을 자주 감았다. 앞으로가 있었다면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보잘 는 화각 사이에서 나를 언제나 주인공처럼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짧은 순간도 못 참고 화면을 자주 망쳤고 눈을 감았다. 말하자면 이번엔 내가 패팅던 쪽이었고, 그는 나를 십오분보다는 더 견뎠다는 얘기다.


<TV는 사랑의 싣고>도 없어지고 나가게 되면 누구를 찾을것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그 선생님을 생각한다. 나는 그때 왜 선생님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12년 치 밖에 안되는 인생의 연력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면 지금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왜 나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고민하는 걸까. 시간이라는 자연하고도 어쩔 수 없는 흐름에 휩쓸려 놓친 인연, 사느라 바빠서 찾지 못했지만, 그 찾지 못함이 이해가 되는 인연이라는게. 그런 사람이 한 사람에게 한 명이나 있을까? 그때 아이들이 선생님을 찾겠다는 대답은 얼마나 순진하고 또 매서운 것이었을까? 


다시 오학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답을 차마 못하고, 볼이 좀 부어서 건반을 치던 던 아이. 그런 대답을 하기에는 저는 아직 12살 밖에 되지 않았고요, 라는 아주 좋은 핑계를 다 지났다.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또 중요한 것은 상대가 나를 미워하거나 저어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좋은 기억'으로 남은 인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 지난 세월 속에 뭍힌 프로그램을 되살려와도, 내가 거기 나갈수 있을만큼 호시절을 타게 되더라도, 당신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니 또 눈이 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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