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라디오를 참 많이 들었다. 특히 초등학교 방학 때는 거의 라디오와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 그때부터 가끔 관제엽서라는 것을 사서 사연과 신청곡을 무수히 보냈지만, 거의 대부분 방송을 타지 못했다. 딱 한 번, 신애라의 "오늘 같은 밤엔"이라는 심야 프로에 친구 생일 축하 사연을 보낸 것이 방송을 탔는데, 녹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벌벌 떠느라 결국 녹음을 하지 못했다. 너무나 당연히 '다시듣기'란 건 없던 시절이어서 그야말로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그 시절엔 정말 내가 원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신청곡을 보냈다. 테이프와 CD가 있던 시절이지만 한 곡 듣자고 모든 가수의 음반을 사 모을 수는 없었으므로, 라디오에서 좋은 노래를 들으면 그야말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카세트에 공테이프(이 말 자체를 오랜만에 하는 듯)를 끼워넣고 노래가 나오면 녹음을 해서 듣기도 했는데, 노래 중간에 DJ의 멘트가 나오거나 노래 끝나기 전에 광고가 나오면 '망했다'며 녹음을 멈췄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운, 그 순수한 엄격함(?).
요새 라디오를 많이 듣다 보니 가끔 사연이나 신청곡이 소개된다. 지금은 음원 사이트들이 있어 앨범을 사지 않아도(하긴 40대 이상이 들을 앨범 자체가 흔치도 않고) 원하는 노래만 콕 집어 반복해서 듣기가 편해졌지만, 그래도 "변진한 님의 신청곡인데요" "5315님이 신청해 주셨어요" 하는 멘트와 함께 그 노래를 라디오로 듣는 기분은 색다르다. 그리고 가끔은 커피 쿠폰 같은 선물을 받기도 한다. 선물을 받으려고 라디오를 듣는 것은 아니지만, 30여 년 전 묵은 한(?)은 이제 거의 씻어냈다.
이제 라디오에 노래를 신청하는 것은 정말 노래를 듣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안다. 하나의 주파수를 통해 흐르는 소리를 공유하는 청취자들끼리 느끼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그 사람들과 함께 듣고 싶은 건전한 욕심을, 그리고 사랑하는 DJ들의 목소리로 내 사연이 읽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시간의 달콤함을.
얼마 전 "김이나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는데, 사연을 보낸 사람의 나이를 밝혀야 했다. 별밤은 나의, 아니 우리의 10대를 함께한 방송인데... 20대 이하가 가끔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30~50대였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 시절 라디오 전성 시대 때는 유튜브는커녕 TV도 공중파 방송국 서넛뿐이었으니, 이젠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나이 든 매체가 되어가는 라디오가 언젠가 소멸의 길로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라디오의 소중함을 느끼며 듣고 쓰고 같이 숨쉬어 볼까 한다. 오늘 듣고 싶은 노래는 김현철의 "wonderful radio".
- 2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