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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진한 Jan 30. 2023

술이 세다는 말

‘머리가 세다’의 ‘세다¹’나 ‘숫자를 세다’의 ‘세다²’ 말고, ‘힘이 세다’ 할 때의 ‘세다³’. 그러니까 우리가 종종 ‘쎄다’라고 발음하기도 하는 ‘세다’에 대한 생각. 

    

세다³

(1) 힘이 많다. ¶ 기운이 세다.

(2) 행동하거나 밀고 나가는 기세 따위가 강하다. ¶ 고집이 세다.

(3) 물, 불, 바람 따위의 기세가 크거나 빠르다. ¶ 물살이 세다.

(4) 능력이나 수준 따위의 정도가 높거나 심하다. ¶ 술이 세다.      


‘세다³’은 이외에도 몇 가지 뜻을 더 가지고 있는 다의어이다. 그런데 (4)번 의미의 예문으로 든 ‘술이 세다’는 중의적으로 읽히는 문장이다.     


“그 술은 엄청 세.”라고 할 때의 ‘세다’는 그 술이 높은 도수를 가진 술임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세다’를 쓸 때가 더 많다.     


“그 사람이 그렇게 술이 세다며?”     


술을 많이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든지, 다음날 멀쩡하다든지 할 때 “그 사람은 술이 세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때의 ‘술이 세다’는 참 특이한 문장이다. ‘세다’의 주어가 ‘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 든 예문에서 ‘기운, 고집, 물살’은 당연히 ‘세다’의 주어가 된다. ‘도수가 높다’는 뜻으로 ‘술이 세다’라고 했다면 이 경우도 ‘술’은 ‘세다’의 주어가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술이 세다”라 한다면 ‘세다’의 주어는 ‘그 사람’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주어가 거듭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문장은 그 외에도 다양하게 들 수 있다. “그 사람이 키가 작아.”라든지 “토끼는 앞발이 짧아.”라든지(학교 문법에서는 “서술절을 가진 안은문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작다, 짧다’의 주어는 일차적으로 ‘키, 앞발’이어서 “그 사람이 술이 세다.”에서 ‘세다’의 주어가 ‘술’일 수 없는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술’이란 단어에 다의성을 부여하여 ‘술을 취하지 않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을 더해준다면 해결 가능할 상황이기는 한데 쉬운 일일 것 같지 않다.      


그럼 반대 의미를 가진 ‘약하다’를 찾아보면 어떨까. 마침 “견디어 내는 힘이 세지 못하다.”라는 뜻풀이와 함께 예문으로 “그는 술에 약한지 한두 잔만 마셔도 금방 헛소리를 하였다.”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약하다’는 ‘「…에」’와 같은 부사어와 함께 쓰이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 사람은 술이 약하다’가 아니라 ‘그 사람은 술에 약하다’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약하다’의 주어가 ‘술’이 아니라 ‘그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 납득이 되긴 하지만 ‘술이 약하다’라는 말이 엄연히 쓰이는 현실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명사 ‘술’의 문제가 아니라 조사 ‘이’의 문제 같기도 한데, 이런 사례를 설명하는 논문이나 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아내와 기분 좋게 과음했다. 추억의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부르기도 하면서. 우리 딸내미는 엄마, 아빠가 술을 마시는 날은 TV도 맘껏 보고, 게임도 할 수 있어서 좋아하는데, 신나는 노래가 나오니 같이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췄다. 하지만 즐거운 토요일을 보낸 대가로, 일요일을 내내 골골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우리 부부는 술이 약해. 아니 술에 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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