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 덕질의 기억
지금으로 치면, 방탄소년단이려나. 한 때 동방신기라는 그룹은 다섯 명이었다. 그들의 팬덤 이름은 카시오페아, 줄여서 흔히 "카아"라고 불렸다. 이 팬덤이 얼마나 컸냐면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나도 카아가 되었고, 대학교 들어가서 가장 먼저 친해진 한국인 친구 또한 "카아"라서 친해졌다.
신기하게도, 흔히 일컫는 그 "빠순이"였을 시적에 가족 중 한 분이 SM에서 일하시는 분이었고, 동방신기 굿즈를 잔뜩 담은 큰 소포를 매년 미국까지 보내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올어바웃 동방신기 (팬덤에서는 "올어동"이라 불렸다)와 동방신기의 거의 모든 포토북, 앨범, 심지어 콘서트 의류와 담요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맞다. 믿기지 않겠지만 동방신기 담요가 있었다. 핑크색이었고 큼직큼직한 노란 별들이 그려져 있었다 (다행히도 동방신기 얼굴이 들어가거나 그러진 않았다). 나는 학교 락커에 그 담요를 항상 놓았었고 학교에서 에어컨을 너무 많이 틀어서 추워질 때는 그 담요를 꺼내곤 했다.
동방신기 이야기는 어쩌면 그저 덕질로 끝나는 게 아니다. 실제로 동방신기의 서사를 알면 존경스러운 부분이 많다. 그때 한창 돌던 썰이 있었는데 동방신기는 SM에서 보이그룹을 만들던 중 원래 센터로 들어갈 멤버 5명을 그냥 한 그룹에 묶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걸 단번에 믿어버릴 정도로 개개인의 능력치가 대단했다. 케이팝 고인물로서 "라떼"이야기 조금 하자면 요즘 케이팝 그룹들이 나올 때 신경이 덜 써진 부분이 보이는 것이 '음색'이다. 아이돌이 아무리 퍼포먼스를 해도 우리는 길을 가다 그 그룹의 노래를 해당 멤버의 음색으로 알아차린다. 동방신기 경우에는 멤버 다섯 명의 음색이 다 달랐고, 서로 상호호환이 되며 더 빛을 낸 경우였다 (예를 들어 시아준수와 최강창민은 고음이 무언가를 찌르는 듯이 내서 감성을 자극한다면, 영웅재웅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뒤에 나와 그것을 감싸준다). 음색뿐만 아니라 비주얼적인 면에서 모든 멤버가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모두 꽤나 큰 키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메인댄서였던 유노윤호를 제외하고도 모두 춤 실력이 꽤나 뛰어났고 일본에 가서 AVEX라는 회사 아래에서 바닥부터 시작한 이후로는 (보아와 동방신기 둘 다 일본 활동의 매니지먼트는 에이벡스라는 회사에서 담당했고 이익도 거기서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다) 영웅재중과 믹키유천이 작사작곡에서 두각을 보였다. 일본 활동에서 특히나 가창력 + 곡해석력이 필요한 여러 곡들을 소화하며 "아이돌이 아니라 아티스트"라는 수식어를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동방신기를 덕질하면서 작곡에 관한 관심이 생겼고 대학교 들어가기 직전 3개월 동안 김형석 작곡가가 만든 학원 K-Note에서 작곡과 미디를 배웠다 (그리고 나의 재능의 한계를 빨리 알아차리고 평생 공부로 먹고사는 직업으로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최강창민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크고 작은 논란에 휩싸였으니 이젠 정말 보내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시아준수 같은 경우엔 언론이 잘못되거나 제대로 리서치가 되지 않았던 정보를 흘린 게 많아서 안타깝다). 그래도 나는 이 그룹에 고마운 게, Love in the Ice 같은 곡 없이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학교를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바닥부터 시작해 도쿄돔까지 가서 쌩 라이브로 댄스곡부터 재즈 느낌의 발라드 곡까지 다 소화했던 이 그룹은 "나도 저렇게 노력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몇 번이나 주었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나에게 김연아 급으로 동기부여를 주지 않았나 싶다 (지칠 때 김연아의 "록잔느의 탱고"를 자주 보았던 고3이 바로 여기 있다).
올어동과 비슷하게, 나의 덕질 아이템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 카드캡터 체리에서 체리가 모으는 카드들을 담은 크로우카드 책이다. 이게 뭔 말인지... 카드캡터는 무엇이고 체리가 뭔지, 크로우카드가 뭔지 모르는 분들에겐 죄송하다. 이건 그 세계관에 들어가 있어야 알 수 있다.
짧게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어느 날 체리라는 소녀 (일본명 사쿠라)가 학교 도서관에서 (기억이 가물가물...) 어떤 책을 열게 되는데 그 책에서 여러 카드가 갑자기 휘리릭 하며 사방팔방에 흩뿌려진다. 그리고 케로라는 아주 귀엽지만 실제로는 사자처럼 생긴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체리 너 때문에 카드가 다 뿌려졌으니까 너가 다시 다 이걸 모아야 해! 하며 체리는 "카드캡터" (카드를 캡처/포획하는 자)가 된다. 이러면서 지수라는 친구도 나오고, 도진이 오빠도 나오고, 청명이 오빠도 나오고 샤오랑도 나온다.
어쨌든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 나는 카드캡터 체리를 엄청 좋아했었는데 얼마나 좋아했었냐면 그 당시 와이파이가 되지 않았던, 전화선으로 연결해야 인터넷이 가능했던 웹 상에서 "카드캡터체리카드"를 검색해서 이 카드들을 A4용지로 프린트를 하며 내가 체리인 마냥 가지고 다녔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진한 덕후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지 않았나 싶다.
코로나 초반에 로펌에서 M&A일이 잠깐 줄었던 적이 있다. 그때 다시 <카드캡터 체리> 몇 편을 보았는데, 갑자기 든 생각이 "아마존에서 좋은 퀄리티로 이런 카드를 팔지 않을까..."였다. 그리고 맞았다. 60 몇 불 (7만 원 정도) 되는 거금인데도 질렀다. 그냥 무작정 소장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크로우카드들은 2020년 초반부터 3년 동안 나와 함께 했지만, 사실상 꺼내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는 체리가 아니고, 이 카드들도 이 세상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거나 요상한 음악을 부르며 떠돌아다니지 않는다.
이제는 보내줘야 할 것 같다.
어쩌면 나의 상상력에 작은 보탬이 되어주었을 것 같은 크로우카드 세계관.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