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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un 04. 2023

가벼운 게임

제목을 읽고 어떤 기대를 했을지 모르겠다. 인생을 게임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연애도 게임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어서 다소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제목인데, 그런 기대를 했다면 사실 이 글은 꽤나 시시한 글이 될 것이다. 정말 제목 그대로, 이 글은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보드게임에 대한 추억을 회고하는 단순한 글이다.


최근에 동생과 같이 온라인으로 카탄이라는 게임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2020, 2021년에는 하루에 기본 두 판에서 많으면 여섯 판 정도도 했었던 것 같은데, 동생이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고, 나도 일이 바빠지면서 어느덧 우리 카톡에 "catan?"이라고 뜨는 횟수가 적었던 것 같다.


우리는 카탄을 하면서 남들이 Discord를 하듯 전화하며 하는데, 카탄을 하다가 일상에 대한 얘기도 한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정말 말도 안 되게 이기적인 플레이들을 보며 "와 진짜 빨간색 나 막은 거 봤어? 이건 그냥 싸우자는 거지"라며 같이 게임하는 사람들 욕도 하고, "미안, 너가 이기고 있어서 너한테 뺏었어"라며 최대한 우리 사이 안에서도 공정한 게임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나는 한국에서도 저녁마다 엄마아빠와 Splendor라는 보드게임을 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림체가 항상 진지한 우리 가족이 게임을 하면 그나마 까르르 웃기 때문이다. 깔려있는 카드들 뿐만 아니라 양쪽 사람들의 칩들을 열심히 카운트하고 있는 부모님을 보며 "다들 눈이 엄청 바쁘시구먼" 이렇게 한마디 하면 두 분이 팡하고 터진다. 이제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스플렌더에 있어서는 부모님한테 비빌수도 없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자아는 사실 내가 나에 대해서 오랫동안 몰랐던 자아이다. 물론 엄청나게 고난도의 보드게임은 아직 손을 대보지 못해서 내가 "진짜로" 보드게임을 좋아하는지는 큰 자신감을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다. 아마 나에게도 맞는 게임이 있고, 맞지 않는 게임이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나의 자아의 시작은 이렇다.


2020년 7월 4일, 코로나에 때문에 집에 갇혀있던 나와 나의 친구들은 바다로 향했다. 반짝거리는 바다에 몸을 맡겨 한참을 놀다, 다시 돌아와 파라솔 밑에서 음악을 들으며 가져온 샌드위치와 과일들을 꺼내서 먹었다. 그러던 중 친구 중 한 명이 Settlers of Catan이라는 게임을 꺼냈다. 같이 갔던 다섯 명 중 나만 몰랐던 게임이었다. 나랑 비슷한 성향을 가진 친구가 나한테 그랬다. "은원이 너가 좋아할 거야."


게임은 굉장히 길었는데 (온라인에서는 짧으면 30분 안에 끝낼 수 있지만 실제로 보드게임으로 하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리는 것 같다) 뭐가 뭔지 모르는 혼란 속에서도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전략게임이라는 특징이 드러나는 순간들에서 "오? 이것도 뭔가 내가 제대로 몇 판 해보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동생한테 "너 카탄 해봤어?"라고 물어보니 동생이 자신은 카탄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다. 게임하면서 머리 쓰는 게 싫다고 (ㅎㅎ 그랬던 동생도 이젠 보드게임을 좋아한다!).


다음날부터 나는 온라인 카탄에 접속했다. "잘할 수 있는 게임일 것 같다"라는 생각과 "잘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게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 나의 말을 놓았던 자리들을 스크린샷을 찍고 (예로 6(wood)-4(ore)-3(brick) 그 이후에 8(sheep)-3(ore)-5(grain)) 그 게임마다 내가 어떤 공략 (longest road, development cards, city/development cards, etc.)을 세웠는지 생각하며 찍었던 스크린샷을 리뷰했다.


첫 10판에서 20판은 처참한 패배뿐이었다. 혼란 가운데 그저 열심히 스크린샷을 찍어댄 기억밖에 없다. 카탄을 밥먹듯이 했던 고수들에게 나는 그저 그들의 승률을 올려주는 귀여운 플레이어였다. 


언제부터 조금씩 이겼는지 모르겠지만, 몇 주 뒤에 나에게 카탄을 소개해준 그 친구들에게 내가 요즘 얼마나 이 게임에 푹 빠져서 살고 있는지 얘기하니 그럼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온라인으로 같이 해보자고 했다. 얼떨결에 그 친구들을 다 이겼을 때 "와, 내가 늘긴 늘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본인 안에서도 좋아하는 부분이 있고, 싫어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좋아하는 모습이 더 나올 수도 있고, 덜 나올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건 처음이지만, 게임을 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인 것 같다. 나에게도 숨을 쉬는 구멍을 조금 주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다른 것들을 할 때에 비해 꽤나 가벼워져서 좋다. 사실상 띨띨하고 덜렁이는 나의 "진짜" 모습도 나오고, 그럼에도 정말 진지하고 게임의 룰을 대하는 태도도 나오고, 무엇보다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떠한 게임이든 진지하게 대할 때가 제일 재밌다고 느껴지는데, 그 진지함을 아우르는 가벼움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글을 만약 동생이 읽는다면 오늘 밤 나한테 카톡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Ca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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