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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나다

나의 20대를 만든 8가지 직업 06 - 영어 선생님 in China

by 봄바람

백수로 졸업하다

스물둘. 나는 백수로 졸업했다. 대학은 나를 알아가는 시기라는 생각을 그대로 따랐고, 결국 그 길에 방황하다 끝났다. 부모님의 근심 가득한 얼굴 말고는, 백수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 무섭게 다가오지 않을 때였다.


졸업하면서 유일하게 내 미래에 계획되어 있던 것은 단기간 중국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였다. 3개월 동안 영국과 미국의 명문대 학생들과 팀을 이뤄서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여름 캠프를 열며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 대학교 때 중국어를 재밌게 배웠었고, 동생도 이 전 해에 직접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추천했었기 때문에 꼭 하고 싶었었다.


중국으로 가기 전, 로스쿨을 생각하다

중국으로 가기 전, 뭐라도 계획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계획 없이 무작정 하는 성격은 아니기에, 중국 갔다 와서 무엇을 할지 어느 정도 생각을 해놔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역사와 심리학을 전공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듯했다. 컨설팅, 혹은 로스쿨. 개인적으로 컨설팅이 더 매력적인 길처럼 보였으나 컨설팅은 대학교 졸업하기 일 년 전 여름에 인턴을 했던 학생들을 뽑는 게 대부분이었고, 이렇게 졸업한 뒤 경력이 비는 학생들은 뽑지 않았는 게 트렌드였다. 그와 반대로 로스쿨은 성적과 시험 (LSAT 엘셋), 이 두 가지를 제일 많이 보는 제도였고, 그리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백수 상태로 로스쿨을 몇 년 동안이나 준비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답은 정해진 듯했다. 지금 나에겐 로스쿨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 같았다. 성적은 자신 있었고, 시험도 잘 준비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시험이 괴물 중 괴물일 것을).


물론 이런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 말고 다른 요소도 생각해봤다. 과연 변호사라는 직업이 나와 잘 어울릴까? 내가 여태 했던 경험들과 내 성격을 빗대어 생각해봤다. 나는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하고, 혼자서 일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어느 정도 어울려야 하는 게 필요한 것을 고려해봤을 때 괜찮을 것 같았다.


로스쿨이 정답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적었고, 나는 일단 엘셋 시험지 10장 정도를 찢어 배낭가방 안에 넣었다.


중국에 도착하다

배낭가방에 세 달을 버틸 수 있는 옷들과 생필품들을 챙기고,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착하니 프로그램에서 마중 나오신 분이 있었고, 우리는 베이징에 있는 어느 숙소로 갔다. 베이징에서 3일 정도 머물고, 이름조차 모를 숙소로 몇 시간 자동차를 타고 움직였다. 산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숙소에서 우리는 중국 문화에 대해서 배웠고, 총 100명이 5-6명으로 구성된 팀으로 나누어졌다. 한 팀당 각각 세 도시를 돌며, 그 도시 안 한 학교에 2주 동안 영어 캠프를 진행하기로 했다.


프로그램 소개

타이유엔 (Taiyuan, Shanxi), 셴양 (Shenyang), 그리고 치펑 (Chifeng - Inner Mongolia)

내가 속한 팀은 타이유엔에서는 중학생들, 셴양에서는 초등학생들, 그리고 치펑에서는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지역 영어를 잘한다는 고등학생들이 counselor (카운셀러)로 통역을 하며 도움을 주었다.


각 캠프마다 반이 6개로 나누어졌으며, 그 반마다 우리 팀 중 한 명씩 담임 선생님이 되었다.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는 우리 모두 반을 돌며 우리가 만든 커리큘럼을 토대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점심을 먹은 뒤 월, 화, 수요일에는 자율시간 겸 담임선생님과 하는 1:1 상담, 목요일 금요일에는 캠프 전체가 참여하는 즐거운 활동(물풍선 터트리기, 선생님들이 연극 준비, 팀을 짜서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기 등등)들을 함께 했다.


커리큘럼을 짜다

우리는 캠프 시작하기 전에 2주간 중국문화에 대해 배우는 동시에 캠프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가르칠 개인 레슨 커리큘럼을 짜야했었는데, 내 커리큘럼은 이랬다: 1. 미국 문화 (미국의 휴일 등등), 2.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초등학생들과는 부루마블을 했다), 3. 영어로 편지 쓰는 법 (Dear로 시작해 끝맺음은 yours truly 등등).


커리큘럼은 사실 그렇게 세밀하게 짜지 않고, 첫 10분 정도 설명할 내용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그때 그때 학생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며 흐름을 따라가기로 생각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

첫날, 나는 자기소개 시간에 직접 준비한 케이팝 아이돌 안무를 보여줬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러한 자기소개는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보통 파란 눈동자에 금발을 선호하는 중국 아이들이 오히려 나를 졸졸 쫒았다니며 "do you know Exo (엑소 알아요?)"라고 나에게 물으며 나에게 사인까지 요청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기가 많았다 해도 가르치는 게 수월하진 않았다. 어느 반에나 그렇듯, 협조를 안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핸드폰을 계속 켜놓고 수업에 집중 안 하는 아이들, 그리고 계속 창 밖을 바라보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아이들에게 화나지 않았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이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아이들이 무엇을 하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래도 나는 네가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주었다 (이건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 같다). 이 아이들이 영어를 배울 시간은 지금 말고도 인생에 많이 남았지만, 내가 그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시간은 그 순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첫 캠프에서 엄청난 행복을 맛봤다. 중학생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이 때인데, 보통 이 나이에 가장 생각이 많아지며 "나"라는 자아가 가장 확실하게 성립이 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음악, 옷, 친구들에 대한 취향이라는 게 자리 잡는 시기인 데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가장 이상적이면서 자신의 성향을 잘 드러내는 때 이기도 하다.


특히 이 첫 캠프에서 매일 아침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로 걸어가는 순간이 너무 좋았다. 문구점에서 이것저것 사며 아이들에게 나눠줄 생각을 하는 게 달콤했다. "선생님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다시 돌아봐도,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찬란했던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첫 캠프의 2주가 지나고 캠프가 끝나는 날, 아이들도 나도 많이 울었다. 카운셀러들과 선생님들 모두 같이 밥을 먹고 난 뒤, 학생들과 많이 친해진 내 담당 카운셀러 Clay가 나에게 자기 폰에 온 문자를 보여줬다. 캠프 내내 과묵하게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참여를 잘하지 않던 Frank가 보냈던 문자였다. 나의 부족한 중국어 실력으로 문자를 읽지 못했고, 클레이가 나에게 번역해주었다. "나는 이 캠프에서 내 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을 보냈어요."라는 문자였다. 나는 그 순간 펑펑 울었다. 책상 끝 줄에서, 무심한 듯 칠판을 보던 프랭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다 보고 있었구나, 그리고 재밌었구나.



변화

두 번째 캠프는 첫 번째 캠프와 달랐다. 일단 중학생들이 아니라 초등학생들을 가르쳐야 했고, 타이유엔에 비해서 셴양은 부유한 도시라 아이들의 느낌이 약간 달랐다. 그리고 첫 캠프에 너무 많은 정을 주어서 그 후유증을 떨쳐내는데 며칠 걸린 것 같다.


하지만 결국엔 이 셴양의 아이들과도 사랑에 빠졌고, 셴양이라는 도시도 좋아졌다. 주말에 받은 자유시간에는 학교 근처의 커피숍에서 엘셋 시험 문제들도 풀었었다.


엘셋 문제들을 풀면서 나는 멈칫하며 선생님이 될까 생각도 많이 했다. 하지만 셴양의 일정을 끝내고 치펑의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접게 되었다.


셴양의 아이들과도 이별을 하고 치펑의 고등학생들을 만날 즈음, 난 이미 많이 에너지가 떨어졌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두 번의 이별에 또 한 번 그런 정을 주기가 두려워졌던 것 같기도 하다.


캠프 마지막 날, 아이들이 많이 우는 걸 보고 마음 한켠에 죄책감이 들었다. 첫 두 캠프에 비해 비교적으로 내가 잘 못해줬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너희들은 나보다도 더 좋고, 더 멋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거야. 지금은 이런 이별을 하지만, 또 이런 날들을 지나 얼마나 근사한 사람들을 만날지 생각해봐."


내 카운셀러가 이 말을 통역하는 순간, 어느 여자아이가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정확한 내용은 카운셀러를 통해서 들었지만 그 표정이 나에게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고, 갈라지는 목소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도 몰랐던 나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캠프를 끝으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될 거예요. 이제 매일매일 대학 입시 시험을 위해 공부해야 하고, 그 공부가 끝난 뒤에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우리는 이 지난 2주의 기억을 붙들며 그 모든 순간을 견뎌낼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마지막으로 있었던 가장 행복한 기억이 될 거예요."


일하며 배우게 된 나

2013년의 여름, 아이들을 가르치던 경험은 내 인생의 가장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로 남았다.


다시 생각해도 힘든 것보다 정말 좋았던 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정말 "pure happiness" - 완벽하게 순수한 행복 -이라는 게 무엇인지 경험하게 해 준 정말 선물 같은 경험이었다.


영어를 초, 중,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깨닫게 된 것은 많았다:

1) 누군가와 교감을 쌓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나는 내가 오랫동안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마 내가 미국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동양인은 미국에서 사람들이 약자로 생각했고, 나는 항상 사람들이 "다르게" 보았고, 그 "다르게 보는" 눈빛의 결은 호기심이 아닌 경계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알게 된 것은, 나는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통역을 해주는 카운슬러들과 인생을 나누는 것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첫 캠프와 두 번째 캠프의 카운셀러들과는 아직도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2)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이들과 교감을 쌓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지만,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은 교감을 쌓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의 어머니는 정말 오랫동안 아이들 수학 과외를 하셨는데, 아이들의 머리에 "아!" 하고 완전히 이해하는 순간이 그렇게 좋아서 계속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정말 엄마의 마음으로 가르치신다--아이들이 돌아가서 자기 엄마한테 배우는 게 너무 재밌다고 얘기할 정도로). 영어를 가르칠 때는 수학처럼 그렇게 명확한 "아!" 하는 순간이 생기진 않는다. 문법적인 이해는 물론 어느 정도 그게 있지만, 그 외의 다른 요소들이 모두 다 결합이 되고 잘 성장돼야 영어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물론 2주밖에 없었다는 시간적인 문제가 가장 컸지만, 무언가를 한 명에게 아니라 한 클래스에 가르친다는 것도 어려웠던 것 같다. 수업에 집중 안 하는 아이들을 사랑해주는 것도 단기간으로 사랑을 주기로 작정하고 매일 아침 마음을 먹어서 그렇지, 아마 1년 내내 그래야 했다면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3) 나는 다른 나라에서 잘 적응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괌으로, 괌에서 라스베가스로 이민 갔을 때도 알게 된 것이지만, 나는 다른 나라 혹은 다른 도시로 갈 때마다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새로운 것을 보면 힘들다고 느끼다기보다, 흥미롭다고 느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선생님이 될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영어를 가르치고 아이들과 같이 보냈던 시간들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너무 행복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선생님이 된다는 생각

선생님이 되지 않기로 한 결과적인 이유는, 내가 아이들을 결과적으로 가르쳐야 할 곳이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서 중, 고, 대학교를 나왔고, 현실적으로 선생님이 된다면 미국에서 되는 게 절차적으로 어렵지 않았다. 중국에서 가르치는 것, 혹은 한국에서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조차 몰랐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육에 관한 문화적 차이가 너무 컸다. 한국과 중국은 공부를 정말 중요시 여기고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하는 문화가 있는 반면, 미국에서는 그런 문화가 비교적 덜했다. 그런 문화 안에서 선생님들은 특히 존경받지 않았고, 여러 인종과 문화적 배경의 아이들이 중국에서 만난 아이들만큼 나를 좋아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또 미국에서 선생님이 되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 비해 훨씬 쉽다),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젊었을 때 조금 더 어려운 것을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들 끝에 나는 결국 로스쿨에 도전해 보기로 생각했다. 중국에서 열정으로 가득 찬 여름을 보낸 후 나는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그래, 변호사가 되어보자.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결과를 맡겨보자. 거기까지 생각이 들고, 나는 3개월 안에 엘셋 시험을 치고 1월에 원서 넣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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