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를 만든 8가지 직업 05 - 조직심리학 연구소 조수
거식증과 뇌과학을 연구하던 달콤 쌉싸름한 여름이 끝났다. 이 여름 프로그램 끝에는 뇌과학 연구소 교수님에게 이 연구 경험이 어땠는지 얘기하는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연구하는 과정이 꽤 재밌다고 느꼈기 때문에 심리학 박사과정을 생각하고 있다고 얘기했었다.
그때 그 교수님이 그랬다. Traditional (전통적인) 심리학은 보통 박사과정을 끝내고 학생들이 일자리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고. 아무리 좋은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나온다고 해도 교수가 되기는 정말 힘들고, 교수가 되기 전에 post-doctorate fellowship (포닥)으로 몇 년은 거의 돈 한 푼 못 버는 상태로 계속 페이퍼만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수가 된다고 해도, 교육 심리학, 임상 심리학, 아동 심리학 등등 전통적인 심리학 교수들은 8만 불로 (환율로는 9,000만 원 정도) 시작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추천하지 않는 길이라고 했다. 교수님은 정말 이 길로 나가고 싶다면 차라리 MBA (비즈니스 학교)에서 조직심리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라고 하셨다. 공부와 리서치 환경, 그리고 논문 쓰는 과정도 다 비슷한데 오히려 그 길은 과정 끝에 일반 회사에 취직될 확률도 높고, 교수가 되는 길도 비교적 많으며, 또 교수가 되었을 때 비즈니스 스쿨에서 시작을 한다면 연봉이 18만 불 (환율로 2억 정도)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심리학 교수로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길이라고 했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가끔, 정말 놀랄 정도로 현실적인 조언을 스쳐가는 인연들이 해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게 그중 하나였다.
이 조언을 듣고 나는 다음 학기 바로 듀크 대학교 MBA, 즉 Fuqua School of Business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뇌과학 교수님 말처럼, 정말 비즈니스 스쿨 안에서 조직심리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이 많았고, 조직심리학뿐만 아니라 마케팅에 대한 리서치를 다들 이 Behavioral Lab이라는 심리학 연구소를 통해서 했었다. 이 연구소에서 일과는 나의 교육심리학 쪽의 동기부여 심리학 연구소의 일과와 똑같았다. 업무는 이 두가지로 나누어졌는데, 실험에 참가하는 지원자들을 안내하고 도와주는 업무, 그리고 실험에서 나온 데이터를 컴퓨터에 옮기고 엑셀에 노가다로 입력시키는 업무였다.
다른 연구소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은, 다른 연구소들은 몇 명의 대학원 생들과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정말 한 가족처럼 일을 하는 분위기였다면 이 비즈니스 학교의 심리학 연구소에서 나는 그냥 오고 가는 수많은 조수들 중 한 명 같은 느낌이었다.
조직심리학 박사과정들을 지원하며 이 두 연구소--"동기부여 교육심리학 연구소"와 "비즈니스 스쿨의 조직심리학 연구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나는 수업도 열심히 참가하고, 연구소 두 군데에서 일도 하고 내가 직접 진행하는 나의 리서치도 하며 정말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이 시절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일이 하나가 있다. 햇살이 예쁘게 내리쬐고 바람이 부드럽게 불던 날, 나는 비즈니스 스쿨에서 일을 끝내며 나오고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아빠한테 음성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은원아 아빠야.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해봤어..." 아빠의 메시지를 듣는데 눈물이 가득 찼다. 아빠가 힘들어서 전화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었던 것이었는데도. 나도 힘든 날에 그 메시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나도 화창하고 기분 좋은 날에 메시지를 받은 거였는데도.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는 그 말이,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연두색으로 푸른 빛깔을 띄는 나무들이 가득한 그 길을 걷는데 나를 툭, 하고 건드렸던 것 같다.
바쁜 4학년을 마치면서 나는 조직문화와 창의성 (creativity), 그리고 창의성에 대한 동기부여에 관한 논문을 썼다. 논문 쓰는 과정은 괜찮았지만, 역시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답답한 느낌을 한번 더 느꼈다. 나는 나의 연구 결과를 최대한 나의 연구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 (회사원들과 회사 조직을 책임지는 사람들) 알리고 싶었는데, 사실 나의 연구결과를 들으러 내 발표에 와주는 사람들은 다른 대학원생들이거나 교수님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명예롭거나 '잘 되는'일은 "publication" 즉 유명한 논문지에 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런 논문지에 실려도, 일반 사람들은 그런 논문지를 읽지도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가 하는 연구가 사회에 조그만 영향도, 도움도 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어떤 연구든지 그 조그만 리서치들이 서로서로 모이고, 탑을 쌓아가면서 진실과 진리를 찾는데 한몫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위해 모두가 5년에서 7년 동안 박사과정을 견디고, 연구하는 교수가 되며, 자기가 한 연구와 또 다른 사람들이 해온 유명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게 학계 (academia)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말 멋있는 길이었지만, 이렇게 리서치 하나를 끝날 때마다 느끼는 공허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평생 사람들을 관찰하는데서 끝내는 게 맞을까? 이 길로 평생 가도 될까? 이런 질문들이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박사과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쯤, 나는 줄줄이 내가 원하던 프로그램들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미국에서 조직심리학을 공부하는 비즈니스 스쿨 안의 박사과정 프로그램들 중, 랭킹 20위 밑으로 떨어지는 곳에는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도 컸을 것이다.
그렇게 난 2013년 5월, 계획 없이 졸업했다. 박사과정도 다 떨어졌었고, 다시 지원하고 싶을 정도로 나랑 맞다고 생각되는 길도 아니었다.
백수로 대학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엄마 아빠도 (그리고 어쩌면 내 동생도) 나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졌었다. 의대를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에 고른 길에서 결과는 의심없는 실패였다. 졸업하는 날, 아빠는 내가 적어도 일반 회사 100군데에 이력서라도 뿌려봤었어야 했다고 했다. 붙고 안 붙고를 떠나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했었던 것 같다.
비싼 등록금 내고, 비싼 졸업장을 얻었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답이 없었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은지, 무엇이 맞지 않은지, 그 정도의 윤곽만 그려지고 있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나에게 장기적인 직업은 없었지만 졸업한 여름에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모든 박사과정 프로그램에 떨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나는 여름동안 중국에서 대학생들이 3개월 동안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내가 박사과정에 합격한다고 해도 여름이 비는 상황이어서 항상 가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 단기 선생님 프로그램에서는 내가 북경행 비행기 티켓을 사면, 숙박과 음식은 거기서 제공해준다고 했다.
백수로 졸업하게 된 나는,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가 백수이든, 아니든, 인생에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가이드에는 배낭가방 하나에 3개월 버틸 필수품만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영어를 가르치게 될 해당 도시에 가면 거기서 또 필요한 것은 사면된다고 했다.) 두루마리 휴지, 샴푸, 컨디셔너, 일주일치 속옷과 긴바지 한 장, 짧은 바지 두장, 얇은 티셔츠 4장, 핸드폰 충전기, 비상금,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내용을 담은 노트. 2013년 여름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것저것 담으면서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내 바로 앞에 있을 경험에 대한 설렘이 훨씬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