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람 Nov 22. 2022

토요일에 일할 때

일은 항상 있지만 놀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지난주 토요일은 여기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일하는 한국인 변호사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노래방을 가는 날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괜찮은 노래방이 하나도 없어서, 산타클라라에 노래방이 예약되어 있었고, 나는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가야 했다. 


일주일 내내 일하면서 그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려 노력했건만, 파트너한테 토요일 오후 1시 즈음에 이메일이 왔다.


이번 우리가 진행하는 인수합병 계약서에 쓸 수 있는 적합한 조항들을 찾지 못했는데, 지금 자기가 보내주는 4개의 다른 인수합병 계약서들을 검토한 뒤, 거기서 쓸만한 조항들을 찾아서 정리해 "early tomorrow morning"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보내달라는 이메일이었다.


알겠다고 말한 뒤, 각각 100페이지 넘는 그 계약서들을 다 프린트했다 (물론 읽기 쉽게 한 면에 4페이지씩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차에서 읽으며 쓸만한 조항들을 찾아놨다. 


일이 있다고 해서 원래 있던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2년 전 나였다면, 일 때문에 이런 일정들을 다 취소하고 집에서 열심히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그날 저녁 6:30 즈음 산타클라라에 도착을 한 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다른 한국 변호사들과 같이 곰탕도 먹고, 노래방에서 두 시간 놀고, 3차에 가서 (술은 마시지 못했지만) 치킨, 고구마튀김, 칼칼한 어묵탕을 먹으며 대화도 나눴다. 


내가 끝나고 나서 내일 아침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변호사들은 걱정을 해주었다. 괜찮겠냐고. 나는 내가 요즘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을 얘기했다: 

"일은 항상 있지만 놀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잖아요"


실제로 사회인이 되고 나서, 그리고 뉴욕에서 지독한 3년 반을 M&A 변호사로 보낸 뒤 가장 강력하게 깨달은 바다. 일은 내가 오늘 저녁 9시에 해서 새벽 2시에 끝내던, 새벽 1시부터 6시까지 하며 끝내던, 어쨌든 그 일을 제출해야 하는 시간 안에 끝내면 된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긴 싫다.


실제로 나는 동생집으로 돌아가서 (동생 집이 근처에 있었다) 새벽 3시까지 쪽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 7:45분에 파트너한테 부탁받은 문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토요일 일을 해야 했던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토요일에 일을 해달라고 부탁받았던 것도. 2020년과 2021년, 코로나 때문에 모든 로펌 어쏘가 집에서 일하고 집과 일의 경계선이 사라지면서 거의 주 7일을 근무하는 식으로 일했던 상황과 달리, 이젠 다시 경계선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정말 신기하게도 코로나 때는 세계적으로 인수합병이 활동이 역사상 가장 뜨거웠을 때 중 하나였는데, 지금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현재 마켓 활동이 많지 줄어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3개월 정도 나는 주말에 일을 해야 했던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연봉을 많이 받긴 하지만, 이렇게 토요일 갑작스럽게 이메일이 오고 그 이메일에 당연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 대부분의 어쏘들은 로펌에서 3년 안에 나가려고 한다. 인수합병의 프로세스는 MBTI에서 J들에게 유리한데 (로펌 모든 업무가 사실상 J에게 유리하다 - 매주마다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타고나기를 80% J인 데다, 강철 체력을 가졌고, 일에서의 나와 일 밖에서의 나를 구분할 수 있는 두꺼운 낯짝이 있어 여태까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버티는 게 맞는 걸까, 슬슬 그런 질문을 하기 시작할 때가 온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6,833.48원의 여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