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날이 있다. 약한 자극에도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날. 내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길을 걸을 때에도 상념에 빠져 헤매이다 겨우 발길을 기억해 집으로 돌아왔다. 신발을 벗고 현관이랄 것도 없는 작은 자취방 안에 막 발을 디디면 어지러운 방이 눈에 들어왔다. 주간 업무에, 야간 대학원 공부에 에너지를 쏟느라 미뤄 뒀던 집안일 탓에 제자리에 있어야 될 것들은 내 마음처럼 머무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당장 치울 기력도 없어 멍하니 옷가지를 바라보다 흘러가는 시간을 확인하고 저녁을 먹어야 될 시간임을 깨달았다. 먹다 남은 배달음식으로 가득 찬 냉장고를 열어보다 그 사이에서 구겨져 들어가 있는 청포도 한 송이를 발견했다.
알이 단단하지 않고 흐물거리는 청포도는 오래되어 이미 색이 바랜 상태였다. 그 청포도는 한 달 전 엄마가 보내 준 반찬들과 함께 봉지에 넣어 준 청포도였다. 청포도를 처음 받은 당시에는 물에 깨끗이 씻어 알알이 얼려 둘까 고민했었는데, 그때는 금방 먹을 거라 생각하여 냉장실에 넣어 뒀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있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방치해 둔 청포도를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먹어 보지도 못하고 버릴 줄 알았으면 얼려 둘 걸 하고 자리에 서서 한참을 후회했다. 괜한 마음에 알 하나를 뜯어 한 입 베어 물어 보다 떫은맛이 나서 더 머금지 못하고 뱉었다. 분명 처음 받았을 때는 초록빛의 싱싱한 청포도였는데, 약간의 갈색빛이 돌며 흐물거리는 청포도는 꼭 오늘의 내 마음 같아 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