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을 써 봤어야 알지!
이전 이야기: 글을 쓰는 일을 취미로만 좋아하던 스프라이트. 그러다 우연한 계기들이 겹쳐 본격적으로 프로 작가가 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에세이 시장을 견학해 보니 스프라이트는 무명작가로서 에세이를 팔 수는 없겠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현재 시장에서 사람들은 잘 알려진 스피커의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고, 팔리려면 먼저 스피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스프라이트는 방법을 우회하여 소설가로 입지를 다진 후 에세이를 쓰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스프라이트는 맨 첫 번째 시놉시스를 짜기 위해 워드프로세서 문서창을 켠다. (처음으로 SF소설을 씁니다)
비상이다. 글이 안 써진다.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에세이는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글의 문법이 자유롭다. 그 말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아무렇게나 써 왔다. 그런데 소설은 정밀한 허구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계율이 있다. 그 허구의 세상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는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장르 앞에서 고요해진다. 새벽의 희붐한 모니터 안의 커서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채 깜박인다. 그 깜박임이, 무섭다.
고민하다 제미나이를 켠다. 챗 지피티는 똥을 싸도 칭찬해 주니 의미가 없다. 빈 공간에 SF소설 주제로 쓸만한 아무 질문이나 던진다. 그럼 아무 대답이나 돌아온다. 몇 번 그런 짓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는 질문이 정확한지 감을 잡게 된다. 주제를 점점 정밀하게 만들어 던진다. 그러면 '인간의 뇌를 가진 햄스터'에서 'AI 시대에서 프롬프트의 저작권 문제'까지 촘촘해진다. 전자도 물론 재밌게 쓰면 재밌어지겠지만 현재의 나에겐 그런 재능이 없다. 후자는 나름 재밌을 것 같다. 주제를 잡고 시놉시스를 쓰기 시작한다. 이미 머릿속에 결론까지 만들어져 있어 글 자체가 나오는 건 쭉쭉 나온다.
저녁까지 시놉시스를 쓰고 다음 날 주변 친구들과 아는 사람 모두에게 돌렸다. 혹독한 평가가 쏟아졌다. IT 쪽에 해박한 친구는 이미 현실에서 다 결론이 나온 이야기라며 나의 빈곤한 상상력을 반박하는 기사 몇 개를 던져준다. 전직 시나리오 작가인 가족은 앞 내용만 읽어도 결론까지 다 보이는 빈곤한 상상력이라고 질타한다. 그 앞에서 나는 어제 썼던 글들이 삽질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글의 시작점을 좀 더 미래로 옮겨봐. 그 말에 힌트를 얻어 다시 워드프로세서 파일을 새로 만든다. 2040년, AI 프롬프트가 완벽하게 저작권으로 보호되는 시대를 상정한다. 로그라인만 썼는데 이게 훨씬 나은 것 같다. 수정에 수정을 반복한다. 중간에 빈 공간이 있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친구들한테 보여준다. 글은 완성되어 갈수록 더 많은 구멍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걸 감수하고 쓴다. 더 나은 글이란, 더 짙은 쪽팔림을 인내한다는 의미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나의 빈곤한 인간에 대한 이해도와 상상력에 자학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글은 솔직하게 그 사람의 한계를 바라보게 한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나만 아는 양심처럼, 내면의 관찰자는 내 거울이 되어 스스로를 반추하게 한다. SF소설을 쓰면서 그런 걸 처음 알았다. 법정에 대해서 모르면 우주 법정이라고 퉁치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 안일하다. SF이기 때문에 더욱더 당위와 개연성이 촘촘해야 한다. 그 앞에서 내 소설은 너무 구리다. 주인공이 A라고 움직이는데 그 움직이는 동기가 너무 가볍다. 인간은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등... 계속해서 주인공의 동기와 설정을 수정한다. 결국 SF소설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SF적인 재미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의 인간이니까.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왜 총을 쐈는지 소설 안에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지만 독자들은 모두 그의 동기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처럼, 글을 잘 쓰려면 인간을 잘 써야 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SF소설을 쓰시는 분이 계실까요? 제가 순문학이 아니라 장르 소설을 쓰게 된 이유는 장르 소설의 대중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혹시 장르 소설을 쓰시는 분이 있다면 장르 소설의 문법에 대해서 같이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라이킷, 댓글, 구독 모두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