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친한 사람들이어도 만나기 꺼려질 때가 있다. 맘을 털어놓을 사람이 아예 없어 혼자 앓는 것보다 주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내가 나약해 보일까 봐, 내가 그 사람의 시간을 빼앗을까 꾹 참아내는 게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하면 내 우울함이 그 사람에게 옮을까 걱정했다. 항상 힘들다, 도와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다시 꾹꾹 삼켜내고 만다. 결국엔 집으로 돌아와 글만 끄적인다.
그동안 힘들었다. 나의 인연들에게 내가 짐이 되기는 싫었다. 그래서 항상 웃는 표정, 남의 얘기는 들어주지만 정작 내 이야기는 하지 않는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직도 주변 사람들은 나를 근심 걱정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 텐데. 그러다 가끔 혼자 있고 싶다 말하면 사람들은 경청의 귀보다는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날씨는 화창한데 나는 그렇지 못했던 적이 있다. 출발부터 지금까지, 순간순간 올라오는 울컥한 감정이 나의 발걸음을 방해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소소한 행복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나보다. 푸른 날에도 나무 밑에는 그늘이 지는데, 거기서도 나는 조금 넓은 그늘 안에 있었나 보다.
소박한 거리를 혼자 걷는다. 말을 걸 사람 하나 없이 묵묵히 걷는다. 그동안의 일이 떠올라 작게나마 중얼거려도 듣는 사람 하나 없다.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무거웠던 마음을 여기서는 잠시라도 덜어놓는 기분이다. 조금 쉬었다 다시 들고 가야 하겠지만 그래도 잠깐의 쉬는 시간이 얼마만인가.
내비게이션만 흘깃 훔쳐보며 걷기만 하다 모모타로의 전설이 깃든 기비쓰 신사 입구에 다다랐다. 나뭇잎만큼 파란 이끼가 슬어있다.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간다. 고요했다. 이곳에서의 소리는 그저 새가 지저귀거나 바람에 잎새가 흔들리는 소리뿐이 없었다. 적막함,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부의 모습을 남기고자 스마트폰을 들었지만, 그들의 기도를 방해하는 것 같아 스마트폰은 잠시 내려놓았다. 조금은 쉬었다 가자. 렌즈를 통해 보는 것보다 직접 두 눈에 담아두기로 했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향하자 기다란 회랑이 나타났다.
뜨거운 햇살과 빗방울이 떨어져도 회랑 밑은 평화롭다.
300m가 넘는 기다란 회랑 밑을 걷는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늘이자 우산이 되어준다. 중간중간 배치된 의자에는 잠시 쉬어가라는 따스함이 묻어있었다.
회랑을 걷는 것도 낭만적이었지만 회랑에서 바라본 풍경도 아름다웠다. 사람의 손이 미처 닿지 못해 이끼가 낀 돌담들 그리고 이곳의 주민들까지. 조금 더우면 의자에 앉아 신사를 방문한 사람들과 가벼운 목례도 했다.
회랑의 끝에 다다르자, 이곳에 방문하기 전 몸을 깨끗이 하는 초즈야가 있었다.
떨어지는 시냇물 소리가 무척이나 경건했다. 참배 전, 이곳에 흐르는 물을 바가지에 떠 입을 헹구고 손을 씻는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의 참배 방법을 모르는 나였기에 함부로 무례를 범하기보다는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다.
다시 왔던 회랑을 되돌아간다. 그리고 아까는 가지 못한 왼쪽을 들르자,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다. 왔다 갔다 고생했으니 조금 쉬어가라는 의미일까. 잠시 처마 밑 그늘에 땀을 식혀본다. 이런 친근함은 어디에서부터 온 걸까.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서양의 정원은 자연의 일부분을 뚝 떼어 가져온 느낌이라면 동양의 정원은 자연의 일부와 함께하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부자연스럽지 않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기분을 받게 된다.
다시 기비쓰 역으로.
신사에서 내려와 다시 역으로 돌아간다. 너무 편안했던 탓일까, 계속 걷는 와중에도 뒤를 돌아 사진을 남기게 된다. 내가 혼자 생각에 잠겨 무작정 걸을 때에도 이곳에선 아무 생색내지 않고 길을 알려주었고 뜨거운 햇살에 지칠까 긴 그늘도 내주었다. 무뚝뚝하게 나를 챙겨주는 것 같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심 먹고 나른한 시간일 텐데, 아이들의 노랫소리에는 해맑음이 가득 차 보였다.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진다. 그리고 천천히 아이들의 미소를 상상해본다.
푹 쉬었다. 더위도 한츰 가라앉았다. 덕분에 마음도 조금 가벼워진 것 같으니, 나는 다시 오카야마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