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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깡 Jun 14. 2019

솔직하게, 오카야마에서.

마지막 날 - 오카야마, 밤.

느지막이 오전에 일어나 오카야마를 걸어 다녔다. 누군가는 시간 아깝다고 할 정도로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연달아 시키고 멍을 때리기도 했다. 사지도 않을 물건들을 쳐다보며 가벼운 손으로 숙소에 돌아오기도 했다. 시원하지는 않았던 탓에 샤워를 하고 잠시 침대에 누워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오후 4시에 다시 밖을 나선다. 아직 해는 저물어 갈 기분이 아닌가 보다.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늦은 오전과의 차이점으로는 사람들의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사람이 있는 어딜 가든지 그들의 행복한 표정은 하루의 시작보다는 마무리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영업을 마치려는 몇몇 식당가와 영업을 시작하려는 선술집들. 서로의 시간대는 달랐다. 각각의 시간대에서 그들은 하루를 시작하며 마친다. 난 그것도 모르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언제쯤 성공할까, 그래도 쟤보다는 일찍 시작했다라며 나를 원망하고 안쓰러워했던 때가 있다. 그저 시간대가 다른 것일 뿐인데 나는 왜 이리 누군가와의 저울질에 집착했을까.


Takeuchi Mariya - Plastic Love

오카야마에 어둠이 내려앉고 1부의 막이 내린다. 택시 서치라이트와 부딪히는 술잔 그리고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2부의 오카야마가 시작된다. 하나둘씩 불을 밝히는 건물들. 여태 다녀왔던 시골의 느긋함과는 다른 도시의 안도감이 드러난다. 무사히 하루를 마쳤다는 그런 안도감. 직장에서 퇴근하는 사람들과 하교하는 학생들도 주머니에 저마다의 오늘을 접어 넣는다.


하나의 종이 제등에 불이 들어온다. 무사히 하루는 마쳤지만, 마지막은 유쾌하게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며 신호를 보내듯 사람들이 몰려든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든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오카야마의 중심에서 사람 냄새가 풍겨온다. 낮과는 다른 들뜬 공기 속에서.


나도 그들의 하루를 느껴보고 싶었다. 사람 사는 곳 다 비슷하다지만 여긴 한국이 아니니까.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많은 선술집에 방문했다.


그들처럼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간단한 안주도 하나 곁들였다. 되도록이면 휴대폰은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여행객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들처럼 이곳에서 나름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고 내가 앉아있는 이 장소의 공기에 동화되고 싶었다.


무거운 담배연기가 실내를 채운다.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한숨이 뒤이어 깔린다. 오늘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누군가에게 핀잔을 들어 기분이 안 좋나 보구나. 그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위로 한 마디씩을 생각했다. 사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듣고 싶어서 아예 문장까지 외워버린 그런 중얼거림들.


시원한 맥주가 나오고 한 모금 들이킨다. 젓가락을 찾다 옆에 앉아있던 중년의 일본인과 눈이 마주친다.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와 이미 잔을 비운 상태였다. 취기도 좀 올라온 것 같았다. 그렇게 어색한 눈인사를 마치고 안주 한 점을 입에 넣는다. 간장소스를 묻힌 닭날개 구이가 썩 맛있다.


'아노 칸코쿠... '


일본인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일본어를 모르는 탓에 앞에 있던 두 단어뿐이 듣지 못했다. 대충 한국에서 왔느냐는 질문인 것 같아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지만 알아듣지 못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아저씨는 자기소개를 하는 것 같았다.


이름은 기쿠지로. 올해 44살이라고 하신다. 순간 기쿠지로의 여름이라는 영화가 생각나 눈을 바라보니 그렇게 무서운 인상의 아저씨는 아니었다. 몇 마디 주거니 받거니 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탓에 우리는 번역기 어플을 통해 대화를 나눴다.


아저씨는 긴 출장을 다녀왔다. 하지만 자신의 딸은 한창 사춘기인지 방문을 닫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내는 화를 잘 못 내는 탓에 스트레스받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고. 그런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다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이른 저녁부터 이곳저곳에서 한잔 하고 왔다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이런 대화를 걸었을까. 아버지라는 역에 기쿠지로 씨도 큰 부담감을 안고 살았었나 보다. 나이도 어린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저 가만히 들어주었다. 아저씨도 나에게 해답을 원해 털어놓은 것은 아닐 테니까. 그저 누군가의 공감을 바랐을 테니까.


한 시간 정도를 털어놓자 아저씨는 담배 한 대를 물고는 웃음 지으며 미안하다 말했다. 마음이 한편 가벼워진 걸까, 아니면 초면에 실례라고 생각해 사과한 걸까. 아저씨의 끝맺음에 다시 이어나갈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이유던 간에 이 이야기를 그만 하겠다는 기쿠지로 씨의 결정이었으니까.


그렇게 서로 몇 잔을 더 마시다 거하게 취한 아저씨가 먼저 일어났다. 가벼운 만남에 걸맞은 가벼운 인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도 남은 잔을 털어 넣고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자카야에서 나와 거리를 걷는다.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 난 어떻게 할까. 우리 아버지가 그랬듯 나도 비슷하게 아이를 훈육하겠지. 그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줘야 할까. 돈도 넉넉하게 벌었으면 좋겠는데...


한 번 생각을 하니 끊임없이 가지를 친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인데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서 들어가서 자야지. 여기까지 와서 머리 아플 일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내일 공항버스를 타려면 어서 들어가야겠다.


오늘 난 여기서 끝내더라도 앞으로 몇 시간은 불빛들이 거리를 비춰줄 것이다. 누군가 하나쯤은 없더라도 시끄럽게 돌아가는 게 도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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