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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깡 Aug 19. 2019

내가 이 노래를 듣지 못했던 이유(1)

이소라 - 바람이 분다.

며칠간 여름 더위는 잠시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 선선한 바람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덥지도 않으니 주변 소리며, 풍경이며 방금 듣기 시작한 노래들도 한층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에게 음악이란 항상 그런 것 같다. 예전 기억으로 향하는 일종의 '바로가기 파일' 같은 느낌. 그래서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노래를 시간이 흘러 다시 듣고 있다 보면 그때의 상황과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어렴풋이 되살아난다. 정말 기쁠 때 들었던 노래는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피식거리기도 하지만 슬펐을 때 들었던 노래는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잘 듣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집에 가면서 들었던 노래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이다. 그냥 바람이 부니까 들었다. 그리고 가사에 나오듯이 시기상으론 여름의 끝이기도 하니까. 뜬금없이 선곡했지만 이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웃음도 나고 그때의 내가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이 노래의 가사에 푹 빠져있던 사춘기 시절 내가 떠오른다.




내 첫사랑이 시작되던 때, 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의 나는 한창 사춘기를 정면으로 맞던 터라, 얼굴엔 여드름도 많았고 게을렀던 탓에 살도 많이 쪘었다. 100kg에 육박할 정도로 거구였던 때의 일이다.


4교시가 끝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기다란 줄에서 배식을 기다리며 친구들과 한창 떠들고 있을 때 그 아이를 처음 봤다. 친절해 보이는 미소와 무언가 알파걸의 느낌을 가진 아이였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날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제야 느꼈다. 이게 첫사랑이라는 감정이구나. 가슴이 슨 탓인지 아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살도 찌고 소심한 성격이었던 탓에 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기 바빴다. 사실 그 아이를 마주치게 되거든 테니스 공 같은 짧은 나의 머리부터, 살이 찐 내 모습과 얼굴에 화사하게 핀 사춘기가 부끄러웠다. 초라한 내가 그 아이를 마주 보기만 어언 2년, 나는 그 아이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같은 이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고대하던 수학여행을 갔다. 내가 누군가에게 진지한 고민을 이야기했던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지 아닐까 싶다. 나는 내 친구들과 밤을 새 가며 조용히 떠들기 바빴고 그러다 짝사랑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8반의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분위기는 빠르게 달궈지고, 우린 작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의 조력자를 자청하던 친구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8반이었던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계획의 일부를 말했다. 피식거리던 그 친구가 나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안녕'


조심스레 말을 건넸고, 수화기 너머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사를 하고 몇 초가 흘렀을까, 그녀도 나에게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나를 아예 모르지는 않는 눈치였다. 행복했다. 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던 순간이고 어떻게 보면 첫 대화의 순간이었을 수도 있었기에 그리도 기억에 남나 보다. 우린 수줍게 인사를 마치고 서로 부끄러운 탓에 휴대폰을 각 주인들에게 넘기기 바빴다.


하지만 소심했던 나였기에, 그 이후로 발전은 하지 못했다. 번호를 알고 싶다는 나의 부탁에 내 조력자들은 백방으로 노력해보겠다고 했으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공부도 열심히 하던 그 아이에게 나의 부탁은 조금 부담스러웠나 보다. 그렇게 거절당했다. 처음 느껴보는 상심. 처음으로 누굴 좋아한다는 감정과 더불어 나에게 불어왔다. 이 모든 게 처음이었고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100Kg을 목전에 두었던 내가 날씬해지기 시작했다. 몇 달만에 2~30Kg이 빠지고 한창 뚱뚱했던 탓에 변성기도 괜찮게 지나갔다. 무엇보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 보니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겹경사라고 해야 할지, 그 아이가 나에게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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