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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떡 May 03. 2024

찌르고 간 자리

단편소설, 엽편소설 | 레이먼드 카버 「뚱보」 모작

한 달에 한 번 있는 휴무날, 나는 기차를 타고 두 시간을 내려가 슬기를 만났다. 사장과의 다툼으로 일을 관둔 뒤 슬기는 우리와 좀처럼 만나주지 않았다. 연락을 해도 건성으로 대답하는 탓에 우리도 퍽 기분이 상했지만, 나는 슬기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카페에서 만난 슬기는 왠지 전보다 차분해 보였고, 사장이나 귀농한 뒤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지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초조해진 나는 슬기에게 최근에 온 손님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약도 없이 왔던 그 손님에 대해서.


얼마전에 예약도 없이 어떤 손님이 왔어. 요새는 네이버페이로도 쉽게 예약할 수가 있는데 대뜸 가게에 들어서더니 혹시 지금 손톱을 할 수 있냐고 묻더라고. 혜원 언니는 손님이 있었고 나는 마침 그 시간에 예약이 비어 있어서, 내 앞자리를 가리키면서 앉으라고 말했지. 가방은 어디에 두면 되겠느냐고 묻더라고. 깨끗하게 입고 있기는 했는데 이런 샵에 처음 온 사람인 게 티가 났어. 하긴, 손톱관리 처음 받는 사람이 한둘이겠냐마는.


어떤 서비스를 받고 싶냐는 질문에 그 사람은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는지 물었어. 기본케어부터 매니큐어, 젤네일, 이달의 손톱, 페디큐어며 속눈썹 관리까지 소개해줬지.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손톱 관리들의 차이를 물었어. 나는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은근히 젤네일 쪽을 권유했어. 그렇잖아. 젤네일이야말로 시간당 벌이가 제일 괜찮으니까. 오늘의 네일을 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럴 용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거든.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올렸는데……세상에, 생각 외로 손톱이 정말 깨끗한 거야. 큐티클은커녕 손톱 주변에 거스러미 하나 없었어. 손톱 모양도 아주 일정했어. 어제 관리를 받은 사람처럼.


최근에 관리를 받으셨나봐요.


손톱이요? 직접 잘랐어요.


나는 어쩐지, 라고 말하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반응했어. 잘 보니까 손톱이 조금 삐뚤빼뚤해 보이기도 했어. 첫눈에 봤을 때는 몰랐지만, 잘 보니까 말야. 정말 그랬어.


손톱 위에 지울 만한 컬러나 아트가 없었기 때문에 큐티클을 불리고 바로 제거해주고, 유분을 제거한 뒤에 원하는 손톱 모양을 물었지. 내가 뭘 묻는지 모를 것 같아서 둥근 모양, 각진 모양, 둥글게 각진 모양이라고 말했어. 그 사람은 순순히 둥근 모양으로 해달라고 말했어. 아마 키보드를 치는 직업은 아닌 것 같더라고.


사실, 사무직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진작에 했어. 손톱은 정말 깨끗하고 예쁜데 손이 엉망이었거든. 설거지 후에 핸드크림 한번 바른 적 없는 것처럼 건조하고 푸석푸석하고, 잔상처도 많았어. 그리고 머리카락이나 속눈썹도 전혀 관리가 안 되어 있더라? 어디 놀러갔다 온 걸 수도 있지만 피부도 엉망으로 타 있고……말은 안 해도 우리는 그런 거 보면 다 알잖아. 안 그러고 싶어도 다 보이잖아.


이쯤에서 나는 슬기의 피부가 까맣게 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슬기는 특별한 반응 없이 그래, 그렇지, 하며 맞장구쳤다.


혜원 언니랑 손님이 한참 수다를 떨고 있어서 나는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손톱 관리는 처음인지, 근처에 사는 사람인지 물을 수가 없었어. 혜원 언니 단골 알지? 저번 달에 결혼한다고 웨딩네일 하고 갔는데 파혼했다더라. 세상에, 결혼식 일주일도 안 남기고 파혼했다는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어떻게 내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겠어.


그런데 그 사람이 먼저 말을 했어. 베이스젤을 바르고 처음으로 큐어링할 때였어.


영화에서나 봤지, 이런 건 처음이네요.


옆자리에서 나누는 대화가 너무 흥미진진했던 나머지 나는 처음에 그 사람이 말을 한 줄도 몰랐어. 그런데 그 사람이 자꾸 젤 램프 안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구부리더라고. 어깨가 말릴 때마다 내가 잡고 있는 손이 약간씩 그 사람 쪽으로 끌려갔어. 나도 힘을 줘서 그 손을 끌고 오려다가 그제서야 그 사람이 한 말을 들은 거야.


사람들이 손톱까지 관리를 받는 줄은 몰랐어요.


내가 자기 말을 잘 못 듣는다고 생각했는지 그 사람의 목소리가 커졌어. 덕분에 혜원 언니 손님도 말을 멈췄지. 혜원 언니랑 그 손님이 우리 쪽을 힐긋댔어. 왠지 나까지 창피해지는 기분이 들더라.


한번 받고 나면 장벽이 낮아져서 많이들 다시 찾으세요.


선생님 손톱도 예쁘네요.


그 사람은 어느새 젤 램프에서 눈을 떼고 내 손톱을 쳐다보고 있었어. 이번 달 이달의 손톱으로 내놓으려다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내놓지 못한 디자인이었어. 왼손은 내가 직접 했는데, 오른손은 혜원 언니가 해줬어. 언니도 이건 안 되겠다 그러더라, 가성비가 안 좋다고. 봐봐, 지금은 아래 손톱이 자라서 좀 안 예뻐.


슬기는 이번에도 내 손을 건너다보고는 군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한때 슬기는 손톱을 바늘처럼 가늘게 다듬고도 그 손톱을 부러뜨리거나 망가뜨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에 10시간 동안 갇혀서 남의 손톱을 가꾸면서도 자기 손톱을 전혀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슬기는 그래서 건당 30%만이 우리 것이고 나머지는 샵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몫이라고 한 사장에게 반기를 들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슬기는 언제나 사장은 우리가 없으면 샵을 운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혜원언니와 나는 반대로 생각했다. 우리는 샵을 차리지 못했고 사장의 샵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샵 없이 노점에서 손톱을 해준다고 하면 아무도 안 올 테니까. 우리도 언젠가 샵을 차리면 되는 거잖아, 우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도 슬기는 군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던가. 지금 슬기의 손톱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낯설었다.


베이스까지 끝내고 컬러를 골라야 하는데 그 사람은 내가 컬러차트를 줘도 한참이나 고르지 못하더라고. 하는 수 없이 원하는 컬러를 말해주면 여러 후보를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는데 그래도 망설였어. 나는 그다음 타임에 예약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초조했어. 컬러만 바르면 끝날 걸 가지고 그렇게 시간을 끄니까. 한참을 조용히 실랑이하는데 문득 그 사람이 젤네일을 바르면 얼마나 가냐고 묻더라. 나는 관리에 따라 한 달 정도 간다고 말했지.


그럼 아래 손톱이 자라죠?


네 물론이죠.


아래 손톱이 자라서 모처럼 한 네일이 지저분해 보이는 건 모두가 싫어하지. 뿌리염색을 해놔도 한 달이면 금세 새 머리가 나서 지저분해지고, 그것도 싫잖아. 하지만 그게 싫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관리를 받는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은 그럴 것 같지 않았어. 그 사람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실 몇 만 원씩 들여서 매번 아래 손톱이 보이지 않게 관리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그 돈이며 시간이며……정말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결국 그 사람은 컬러를 하지 않았어. 베이스 위에 탑을 바로 바른 뒤 큐어링을 했지. 혜원 언니 손님은 이미 갔는데, 그 탓에 샵 안에 TV 소리만 계속됐어. 어쩐지 침묵보다 더 조용한 것 같았어. 큐어링까지 다 끝내고 마지막으로 손톱을 보는데 도무지 관리가 안 된 손끝에 달린 손톱이 좀 우스워 보이더라. 컬러는 안 하길 잘했지.


그날 밤에 돌아와서 자기 전에 혜원 언니 손님이 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했어. 결혼식을 일주일도 안 남기고 파혼을 하고, 공들여 고른 파츠들을 직접 떼지도 못해서 샵에 다시 와서 그 사연을 줄줄 읊어야 한다는 게 조금 애처롭고 웃기기도 하더라고. 그러다 문득 그 손님이 다시 생각이 났어……컬러도 안 할 거면 대체 뭘 위해서 샵에 왔을까? 하는 내내 괜히 샵에 들어왔다고 후회한 걸까? 들인 돈에 비해서 예쁨은 오래가지 않고, 지우려면 또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는 이 굴레를 일찍부터 알았던 걸까?


슬기는 대답하지 않고 앞에 놓인 컵을 들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슬기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듣고 싶었지만 내가 슬기에게서 알아챌 수 있는 건 그 맨 손톱뿐이었다.


슬기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손톱에서 파츠 하나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다른 손으로 그 손톱을 가리는 대신 덜렁덜렁 붙어 있는 부분들을 함부로 뜯어냈다. 뜯어진 손톱 옆에서 조그맣게 피가 새어 올라왔다. 나는 한 손에 버려야 할 파츠를 들고 피가 나는 구멍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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