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호떡 May 06. 2024

이누이트식 산책

단편소설, 엽편소설 | 좀스러운 남자 이야기

남자가 조카에게 옷을 선물한 지 8개월이 지났다. 친구들의 아이들에게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선물한 적은 많았어도 갓 태어난 아기에게 선물을 주기는 처음이었다. 아내는 아기보다는 산모에게 주는 출산 선물이 좋겠다며 시누이에게 줄 영양제와 립스틱, 산후조리 물품을 한가득 쌓아두었지만 남자는 오직 갓 태어난 조카의 선물만을, 진중하고도 신중하게, 시간을 들여 골랐다. 양가 어른들이 선물할 게 분명한 배냇저고리는 제외하고, 아기가 커가면서 입을 만한 귀여운 옷과 양말, 모자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골랐다. 여동생은 난임인 오빠 부부보다 먼저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미안해했다. 남자는 그런 여동생의 미안함을 불식시키고 싶었다. 첫 조카의 탄생은 남자에게도 기쁨이었다. 남자는 티끌만큼의 질투나 부러움, 시샘 없이 순수하게 행복했다.


여동생은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하기도 전에 SNS 활동을 재개했다. 남자는 여동생의 SNS를 통해 갓 태어난 조카의 얼굴을 마음껏 구경했다. 조카가 눈을 뜨고, 밥을 먹고, 트림을 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웃고,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질리지도 않고 보았다. 핸드폰 화면 안에서 조카는 점점 예뻐졌고 의사표현이 뚜렷해졌다. 언제쯤 내가 사준 옷을 입을까? 모자나 양말은 역시 답답한가? 8개월이 지났지만 남자는 아직 자신이 선물한 옷을 입은 조카의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예쁜 옷을 사주고 싶다는 생각에 외출복을 골랐던 게 낭패였던 듯싶었다. 신생아는 주로 내복을 입고 지냈고 그마저도 금세 더러워져 갈아입혀야 했다. 남자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백화점에 들러 다시 조카의 옷을 샀다. 여동생은 선물을 배송받자마자 고맙다며 남자에게 인사를 전했다. 남자는 다시 한 달을 기다렸다. 이번에도 자신이 보낸 옷을 입은 조카의 모습은 SNS에 올라오지 않았다. 


남자는 이제 더 자주 여동생의 SNS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출근길은 물론 화장실에 가서 앉아 있을 때나 버스정류장에 서 있을 때, 점심시간에 동료들이 수다를 떨 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마다 남자의 손가락은 의지와 상관없이 SNS 어플을 켜고 여동생의 피드를 띄웠다. 어느 날 남자는 그런 자신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를 찾아냈다. TV를 보며 박장대소하던 아내가 출연자를 보며 던진 말이었다. 


참 사람이 좀스럽다, 좀스러워.


남자를 더욱 비참하게 한 것은 그 순간에도 자신이 여동생의 SNS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최근 게시물에서 자신이 선물한 옷을 찾지 못해 여동생이 올린 사진 하나하나를 넘겨보고 있었다. 피드에는 물론, 스토리에도 자신이 선물한 옷이 없었다. 커가는 조카의 얼굴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남자는 아내를 불렀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고백했다. 남자가 여동생에게 보낸 두 벌의 외출복과 신발과 모자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여태껏 여동생의 SNS를 훔쳐봐왔다는 것에 대해서. 아내는 처음에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웃었지만, 이내 침울한 남편의 태도를 알아채고는 자신이 시누이에게 이야기해보겠다고 했다. 남자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는,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산책을 좀 해보면 어때?


아내는 자신이 어딘가에서 읽었다며 남자에게 이누이트족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누이트족은 화가 나면 막대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 걷다가, 화가 누그러지면 그곳에 그 막대를 꽂고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좀스럽다고 여겨질 때마다 밖으로 나가 여동생의 SNS가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걸을 수 있었다. 


아내가 제안한 방법은 금세 효과를 발휘했다. 남자는 출근길에 핸드폰을 드는 대신 몇 개의 정거장을 걸었고, 점심시간에도 산책을 했다. 산책을 할 수 없는 화장실에서나 엘리베이터 등에서는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대체했다. 마음이 편해진 것은 물론이고 건강도 좋아지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는 다른 면에서 자신이 좀스럽다고 느낄 때에도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에게는 자신이 해준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 동료들은 남자가 베푼 배려나 도움을 까마득하게 잊었고, 친구들은 번번이 남자에게 얻어먹었으며, 가족들은 남자가 챙기는 소소한 기념일과 행사를 곧잘 까먹었다. 후배들조차 남자가 해준 조언을 잊고 다시 물어왔다. 그때마다 남자는 걸었다. 해준 것은 잊어야 마땅했다. 걷다 보면 자신 또한 다른 이에게 받은 배려를 잊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너그러워졌다. 모두에게 관대해질 수 있었다.      



조카가 세 살이 될 무렵 남자의 부부에게도 아이가 생겼다.


산달에 들어설 때부터 주변에서 선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종 백화점 상품권과 아기 수건, 젖병과 젖병 소독기, 때이른 장난감, 아기띠, 아기 베개, 아기용 세제는 물론이고 아내에게 전하라며 온갖 영양제와 산후조리품, 티세트, 손목아대, 수면용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들어왔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은 단연 옷과 신발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위해 남자와 아내의 것보다 훨씬 많은 옷들이 들어왔다. 남자는 서랍에 아기용품들을 넣다 지쳤고, 드러누워 있다가도 다시 신이 나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기가 태어나고 100일이 될 무렵 집으로 여동생 부부가 찾아왔다. 세 살배기 조카는 자신보다 어린 아기를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여동생은 갓난아기를 안고 이리저리 흔들더니 100일이 지났으니 이제 잠은 잘 수 있겠다며 새내기 부모의 노력을 치하했다. 옆에서 매부가 선물을 하나씩 풀어 보이며 쓰임새를 설명했다. 하나같이 유용한 것들이었다.


오빠, 근데 오빠 인스타 보면 우리가 선물한 거 하나도 안 쓰더라.


어느새 가족들에게로 돌아온 여동생이 남자에게 말했다. 쌜쭉한 표정이었다. 아내가 깜짝 놀라며 아니라고, 잘 쓰고 있다고 말했지만 남자는 여동생이 무엇을 선물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선물은 너무나도 많았고 아기 옷이라면 더더욱 많았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도 아기 옷은 시도 때도 없이 들어와 집을 점령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남자는 여동생의 말에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은근슬쩍 싱그러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랜 산책 끝에 마침내 막대 꽂을 곳을 발견한 이누이트처럼 어딘가 자꾸만 산뜻해졌다. 남자는 어른들의 대화를 지루한 표정으로 견디는 중인 조카를 안아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조카는 이제 제법 몸무게가 늘어 무릎 위가 묵직했다. 남자는 씰룩씰룩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조카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다 여동생을 불렀다. 너, 산책을 좀 하면 어때?


여동생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그래 내가 요새 좀 지쳤어, 하며 웃었다. 그러고는 식탁에 앉은 자신의 오빠와 남편에게 아기들을 봐주면 여자들이 한 바퀴 돌고 들어오겠다고 말했다. 여동생의 말에 매부도 좋다며 산책을 다녀오라고 말했다. 여동생이 일어섰을 때, 남자의 아내가 남자를 불렀다. 자기야. 


자기가 산책을 좀 다녀오면 어때?


아내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 주변이 잔뜩 오므라든 상태였다. 남자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신발을 꿰어 신었다. 한창 나가 놀기 좋아하는 조카가 남자의 옆에 바로 붙었고, 염치없이 아이를 맡길 만큼 뻔뻔하지 못한 여동생과 매부가 그 뒤를 따랐다. 남자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지만 자신의 손에 또다른 막대가 들렸음을 깨달았다. 마침 날씨가 좋았다. 남자는 세 살배기의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오래 걸을 생각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찌르고 간 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