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팔씨름의 제왕

단편소설, 엽편소설 | 누가 우리를 비둘기로 만드는가

by 김호떡

한 부장은 점심시간마다 회사 앞 공원을 산책했다. 공원 나무들은 계절에 맞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가을이 되면 초록색 잎들 사이로 누런 사과와 주홍 감들이 매달렸다. 그곳에는 산책을 나온 개들과 공원에 사는 길고양이들이 있었고, 까치와 비둘기 같은 새들도 많았다. 어느 날 한 부장은 고양이 한 마리가 공원을 돌아다니는 비둘기를 덮치는 모습을 보았다. 비둘기는 거의 잡힐 뻔했지만, 재빠르게 하늘로 날았다. 비둘기가 있던 자리에 깃털 두 개가 원을 그리며 천천히 내려왔다. 세상에. 한 부장은 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은 깃털을 주워 들었다. 굉장한 것을 본 것 같았다. 고양이의 발톱에 긁힌 깃털은 털이 고르지 못하고 일부가 엉켜 있었다. 생존의 흔적. 한 부장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는 아직도 풀숲에 숨어 자신을 노려보는 고양이에게 말했다. 비둘기를 얕보지 말라.


그날부터 한 부장에게 이상한 일들이 생겼다. 45년 평생 부실하기 그지없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자판을 치는 데 그쳤던 팔에서 힘이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한 번도 단번에 따본 적 없는 페트병 음료 뚜껑이 쉽게 열렸고, 물을 잔뜩 머금은 빨래에서 물이 쭉쭉 짜졌다. 보도블록에서 떨어져나온 연석이 한 부장의 손짓 한 번에 제자리로 돌아갔고, 남편조차 물건을 모두 꺼내야만 반듯하게 둘 수 있다던 장롱도 한 부장이 밀자 쉽게 벽에 밀착했다. 학원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온 큰아들에게 팔씨름을 이긴 밤, 그녀는 뜻밖의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흔히 하는 상상과 달리 하늘이나 한 부장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발코니로 나가보니 한 부장의 아파트 발코니 난간에 비둘기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앉아 있었다. 비

둘기는 어눌하고도 몹시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제 팔씨름의 제왕이 되었다…….


놀란 한 부장은 그대로 뒤를 돌아 거실로 들어갔다. 문턱에 걸려 고꾸라졌지만, 튼튼한 팔이 온몸을 지탱한 덕분에 전혀 다치지 않았다. 비둘기는 한 부장의 뒤통수에 대고 여전히 느리게 말을 계속했다. 한 부장의 힘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한 달 내로 전 세계를 제패하지 않으면 힘을 거둬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깟 힘! 한 부장은 힘 없이도 잘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며 비둘기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평소 그녀는 비둘기가 사람들과 함께 인도를 걷고 횡단보도를 건너도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비둘기란 고양이에게도 잡아먹힐 만큼 약한 동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팔씨름의 제왕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팔 힘이 약해 우스워 보였던 날들이 떠올랐다. 페트병 뚜껑 하나를 못 열어 몇 시간 동안 갈증에 시달렸고, 좌석에 앉은 채로는 봉고차 문을 제대로 닫지 못했다. 누군가 정리해두지 않은 바벨을 기구에서 빼내지 못해 헬스장 이용 자체를 포기한 날도 있었다. 자신에게 운동 동작을 알려주는 트레이너를 볼 때면 그녀는 트레이너한테 맞을 경우 자신이 어디까지 날아갈지를 남몰래 상상하곤 했다. 사무실 의자와 책상에 맞춰 이상하지만 새롭지는 않은 모양으로 뒤틀린 그녀의 근육으로는 영영 벗어나지 못할 상상이었다.


다음 날, 한 부장은 시범 삼아 부하 직원들에게 팔씨름을 청했다. 이미 중학생 큰아들을 이긴 터라 평소 운동을 좀 한다는 직원들을 상대로 팔씨름을 시작했다. 이상한 짓을 한다는 소문이 날까 봐 조심스러웠던 것과 달리, 한 부장이 처음 몇 번의 대결에서 이기자마자 온 사무실에서 힘깨나 쓴다는 직원들이 대결을 청해 왔다. 한 부장은 이겨나갔다……. 동년배 동기들은 물론이요, 20-30대의 청년들까지 모조리 그녀의 힘에 무릎을 꿇었다. 직속 부하 몇몇이 한 부장 자리로 와서 팔씨름 영상을 찍었다. 한 부장의 팔씨름 영상은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한 부장의 대결 상대는 이제 좁은 사무실에 국한되지 않았다. 전국에서 한 부장에게 대결을 청했다. 한 부장은 이겼다. 강호동도 서장훈도 장미란도 추성훈도 윤성빈도. 해외에서도 한 부장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드웨인 존슨과 헐크 호건. 그들은 모두 놀랐다. 한 부장의 조그마한 키에. 가느다란 팔에. 볼품없는 근육과 힘줄에. 허리. 어깨. 목. 등. 유튜브에서 통증을 고치는 스트레칭과 운동을 알려준다는 영상들을 찾아보면 모두가 한 부장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쓸데없이 비대해지거나 가련하게 작아진 근육들.


하지만 한 부장이 이겼다.


언제나 한 부장이 이겼다.


2주일이 지나자 한 부장의 상대는 시대까지 초월했다.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병사(아주 오만했다)와 독일 유보트 전함의 대원들(그들은 머리만 좋았지 특별하지 않았다)……칭기즈 칸의 전사들(팔씨름 전 기선제압이 대단했다)……인디언 전사들(그들은 매우 날랬다)과 러다이트 운동 중의 분노한 노동자들(흥분을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과 오다 노부나가의 사무라이들(수가 매우 많았다)……네덜란드 사략선의 선원들(이들만큼은 상대할 가치가 있었다)까지. 모조리 한 부장 앞에서 굴욕을 당하거나 그녀에게 존경을 표하며 돌아갔다.

한 부장은 초조했다. 이 모든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잠까지 줄였지만 전 세계를 제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했다. 무엇보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장기 휴가를 내보기도 했지만, 관리자인 한 부장이 한 달을 내리 쉴 수는 없었다. 회사 사람들이라면 이미 한 부장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 부장은 그들을 아주 우습게 이겼다……상사조차 우스웠다. 그러나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 종종 일어나는 초과 근무는 우습지 않았다. 일을 간신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테이블 맞은편에 대결 상대가 앉아 있었다. 한 부장은 눈을 감고도 그들을 이길 수 있었지만, 너무나도 기진맥진했다. 거울 속에 비친 한 부장은 힘을 가지기 이전보다 더 작고 초라해 보였다.


각종 픽션의 주인공들과 시대를 초월한 영웅들이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 한 부장은 세계 제패가 머지않았음을 실감했다. 캡틴 아메리카와 충무공은 서로를 알아보며 추켜세웠다. 그럴 만한 영웅들이었지만 한 부장에게 졌다. 그리고 장발장! 그는 정말로 힘이 셌다. 하지만 한 부장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제패까지 단 두 명의 상대가 남았다. 최종 보스를 만나기 전 한 부장이 상대해야 할 마지막 상대는……세종대왕이었다.


한 부장은 당혹스러웠다. 대왕은 비만한 몸에 여드름투성이였다. 그의 몸은 한없이 약해 보였다. 한 부장은 대왕 앞에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고는 왜 편히 쉬지 않으시고 여기에 오셨느냐고 아뢰었다. 경은 웃기는 소리 말고 덤비라. 세종은 대왕의 아우라를 풍기며 대답했다.


대왕은 생각보다 강했다. 과연 대왕(大王)이었다! 한 부장은 발코니에서 처음으로 비둘기와 마주했던 한 달 전을 떠올리며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풀숲의 고양이에게 비둘기를 얕보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사람과 함께 인도를 걷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는 도시의 동물! 한 부장은 자신이 비둘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비둘기의 거대한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겼다.


한 부장은 공손하게 손을 내려놓고 다시 대왕 앞에 엎드렸다. 건강관리를 잘하셔야 저와 대적하실 수 있을 줄로 아뢰옵니다. 대왕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낮게 웃더니 내가 최근에 과로했다, 하고 말했다. 집현전 애들이 일을 너무 대충해서 봐줄 수가 없다. 대왕이 관자놀이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리자 한 부장은 어딘가 불쾌해졌다. 그것은 한 부장에게 익숙한 장면이었다……. 한 부장은 구태여 사무실을 떠올리는 대신 구겨진 몸으로 한글을 만들 집현전 학자들을 애도했다.


이제 마지막 상대만이 남았다.


한 부장은 다시 출퇴근을 반복하며 몸을 키웠다. 세종대왕과의 대결이 제법 자극이 되었다. 최종 보스는 그보다 더 강한 상대일 터였다. 헬스장에 등록해 근육을 단련하고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사무실에서도 틈틈이 몸을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당연히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상대를 만나기 위해 퇴근하러 가는 길, 한 부장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사무실용 텀블러를 씻었다. 6시 1분이 되면 사무실에서 나갈 계획이었다. 펜을 정리하고, 마우스를 움직여 시스템을 종료하려는 찰나, 오래 전 한 부장에게 패배한 상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다가오는 발걸음에서 그가 한 부장 쪽으로 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한 부장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빠르게 시스템 종료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한 부장,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는데…….


6시 1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 부장은 두려움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 상사는 정말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한 부장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터진 자동차에서 연기가 새어나오듯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마우스를 놓쳐버렸다. 모니터는 밝고 선명했다. 한 부장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작업을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아들은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장거리 출퇴근하는 남편은 차 안에 갇혀 세월을 낭비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알맞게 구겨진 몸을 이끌고 소파에 눕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한 부장은 잠시 그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비둘기가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누이트식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