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
아내는 고양이에게 자신의 성(性)을 붙였다. 아내의 성은 '이'였고 나는 '한'가였다. 그래서 고양이의 풀네임은 아옹이, 다옹이가 아니라 이아옹과 이다옹이었다. 가능하다면 출생 신고도 하고 호적에도 올릴 기세였다. 그야말로 가족의 탄생이었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아도 일정 기간 동거하며 부부간을 인정하면 사실혼으로 보듯 고양이는 사실상 가족이 되었다. 아무리 호주제가 폐지되었다고 한들 일절 상의도 없이 두 마리 모두에게 자신의 성을 붙인 건 너무한 처사였다. 농담조로 서운함을 내비쳤더니 자기를 피하고 곁을 주지 않는다며 아옹이는 당신 아들 하라고 했다. 누워 있기 좋아하고 게으르며 소심한 면이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닮았다고 했다. 여보, 티브이에서 오은영 박사가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집에서 오래 누워 있는 사람은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래.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집에서는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누워 있는 자세를 취하는 거래. 그러니까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축적하는 거지. 소파에 누운 채로 먹태깡을 먹으며 아내에게 일침을 가했다. 아내는 금쪽이에게도 가끔은 사랑의 매가 약이라며 밥주걱을 들고 성큼 다가왔다. 호적에 잉크는 칠하지 않아 마를 일은 없겠지만 불과 일주일 만에 개명할 수는 없어 그냥 이아옹, 이다옹으로 이름 짓기로 했다. 다들 이 씨인데 혼자만 한 씨라 소외감이 느껴졌다. 엄마도 이런 고독을 느끼며 나를 키웠을까. 고작 고양이 이름이 무슨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름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람을 처음 사귈 때면 꼭 이름의 뜻을 먼저 물었다. 모든 이름에는 지은 사람의 마음 씀이 존재했다. 내 이름의 뜻은 서로 상, 빛날 희였다. 너 혼자만 빛나지 말고 같이 좀 빛나라. 뜻은 아주 훌륭했다. 할아버지가 내 동생은 제발 여자아이가 태어나길 바라며 돌림자도 무시하고 붙여준 이름이었다. 남자답게 준호나 성훈이, 성민이 정도는 돼야지. 아니면 단정하고 말쑥한 느낌이 들게 서준이나 현우, 도윤이도 좋겠다. 하필 상희가 머냐고, 동네에서 계집애라고 놀린다며 할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그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름대로 되길 바랐다. 만약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고 나를 자신의 형상대로 빚었다면 나는 그 의도대로 살고 싶었다. 누군가를 비추는 사람 되고 싶었다. 삶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에 아직 성공과 실패, 선과 악, 빛과 어둠으로 명확하게 나를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의 나는 빛보다는 어둠 속에 더 오래 적을 두고 있었다.
어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주로 악의 종류 중 하나로 여겨졌다. 암흑 같다는 말의 뜻처럼 암담하고 비참한 상태를 비유하기도 했다. 반대로 빛은 선을 상징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 거하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빛이라도 존재한다면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눈은 거기에 적응을 하고 기어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일 분에 15번 정도 눈을 깜빡이기 때문에 빛과 어둠이 아주 짧은 찰나에 교차되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때의 어둠은 아무런 공포도 주지 못했다. 이윽고 강력한 빛이 오래도록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둠은 실제 존재하지 않고 실체가 없었다. 단지 빛의 부제 상태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 안에 어둠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빛이 부족해 칠흑 같이 캄캄할 뿐이었다.
밤이 되자 아옹이는 돌변했다. 낮에는 몸을 구겨 넣을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나 음침한 소파 밑에 기어들어가 병든 닭처럼 잠만 잤다. 밤이 되면 눈빛부터 달라졌다. 마치 밤의 활동을 위해 힘을 아껴둔 것처럼 일변했다. 스위치가 켜지자 동태 눈깔처럼 초점 없고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불이 들어왔다. 낮엔 관 속에서 잠을 자다 밤이 되면 무시무시한 힘으로 사냥에 나서는 드라큘라 같았다. 고단한 몸을 누이고 슬슬 잠 좀 자려고 하면 고양이 두 마리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추격전을 펼치곤 했다. 낮에는 주로 사냥감 역할을 하던 아옹이가 의기양양하게 다옹이를 쫓고 있었다. 육중한 몸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라는 듯 소파를 밟고 높이 날아올랐다. 사뭇 아름다운 점프였다. 잠을 이루지 못해 화가 나기도 했으나 아픈 손가락이던 아옹이에게도 저런 면이 있구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녀석을 응원했다. 어둠조차 녀석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야행성 동물이 밤에 활동하는 주된 이유는 사냥이었다. 그리고 낮에 활동하는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밤에는 빛이 적어 쉽게 숨어 포식자를 피할 수 있었다. 야행성 동물은 빛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고양이의 눈은 밝은 곳에서는 동공이 축소되어 일자형 눈동자가 되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동공이 넓어져서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일찍 자기는 글렀다. 손에 땀을 쥐고 녀석들의 난투극을 관람했더니 잠이 달아나버렸다. 고양이의 이름을 '아옹다옹하다'에서 가져온 나의 잘못이었다. '고분고분하다'나 '다소곳하다'에서 따왔어야 했다. 침침한 어둠 속에서 아옹이의 눈빛이 반짝, 하고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