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전

화신(花信)

by 아옹다옹하다

기온이 오르니 귀신 같이 땅이 먼저 반응한다. 냉이 이파리가 지난한 전쟁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선두에 달려온 기수처럼 봄의 시작을 전한다. 냉이는 애써 심지 않아도 알아서 자생한다. 저온에서도 잘 자라며 전 세계 어딜 가도 보일 만큼 널리 퍼져 있다. 강력한 생명력으로 세상의 불모지를 전부 정복한 셈이다. 짧은 줄기에 다수의 잎이 장미처럼 동그랗게 배열되어 있는데, 겨울을 나기 위해 그런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줄기와 잎에 영양분을 저장하고 있으니 향과 맛이 탁월할 수밖에. 들판과 논길을 산책하다 보면 냉이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곳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잡초와 냉이를 구별하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했다. 재미 삼아 한두 개 뽑다가 아내가 호미를 가져왔고 결국 자리를 깔고 냉이를 캤다. 우리와 누리가 전진하자고 보채는 바람에 목줄을 풀어주었다. 우리가 달려들어 아내를 넘어뜨리고 얼굴에 흠뻑 침을 묻혔다.

봄이 와서 다 좋은데 미세먼지가 심해졌다. 회색 빛으로 열브스름히 칠해진 하늘 때문에 마음에도 희뿌연 안개가 생긴다. 시야가 주는 탁함 때문인지 심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 때문인지 온전히 봄을 만끽하지 못하는 나를 본다. 분명 잠을 충분히 잔 것 같은데 나른하고 기운이 없다. 몸이 기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바야흐로 춘곤증의 계절이 도래했다. "그럴 땐 제철에 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단다." 엄마라면 이렇게 말하며 냉이와 달래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끓여 먹였을 테다. 꼬막을 데쳐 비빔밥을 하고 알이 찬 주꾸미로 샤부샤부를 해줬을 거다. 아내가 임신하고 나서 집에서 밥을 해 먹는 날이 잦아졌다. 세상의 모든 엄마처럼 부지런하지도, 성정이 야무지지도 못한 나는 가끔 배달 음식을 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먹을 것에 관심이 없는 아내는 음식으로 까탈을 부리지도 않았다. 언제나 먼저 메뉴를 제안하는 것은 나였고 아내는 수동적이었다. 임산부는 잘 먹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괜히 내 사심만 채웠다. 잘 챙겨 먹인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내의 몸무게는 늘어만 갔다. 열매의 체중도 평균치보다 일 주 정도 빨랐다. 잠들기 전 아내의 배에 손을 얹고 열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면 태동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태아가 직접 보지는 못해도 들을 수는 있으니까 열매의 오감 중 청각으로 소통하는 셈이었다. "열매야, 일어났어? 뭐? 물이 마시고 싶다고?" "열매야,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 고양이가 똥을 싼 거 같아. 그럴 땐 빨리 치워줘야 돼." 아내는 열매와의 대화 형식으로 내게 지시를 내렸다. 고된 노역에도 불구하고 메신저가 된 열매와 통하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허기지고 찌뿌둥한데 마침 날이 궂다. 왜 비가 오는 날엔 파전이 당기는 걸까?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는 비가 오면 일을 쉬는 날이 빈번했다. 농경 사회에서 비는 필연적인 일의 중단을 의미했다. 집 안에서 딱히 할 일도 없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 자연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전은 기름 때문에 번거롭게 느껴지지만 집에 있는 김치나 파를 넣고 밀가루 반죽해서 대강 만들어 먹기 좋은 음식이다. 청각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썰도 있다. 후두두 빗소리와 전 부칠 때 지글지글 기름 끓는 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사람의 기억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이반 파블로프의 실험처럼 특정 자극과 경험이 반복되면 감각을 통한 기억으로 각인되는 법이다. 비 오는 날의 촉촉한 공기, 시원하게 들리는 빗소리, 고소한 파전 냄새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비=부침개라는 강력한 공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주말을 맞아 아산시의 유명한 파전 집을 찾았다. 식당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띤 부침개 장인이 거대한 철판에 전을 부치고 있었다. "여긴 가야 돼!" "열매야, 지글지글 소리는 언제나 진리란다." 아내와 함께 해물파전과 비빔국수를 주문해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다행히 비가 그쳐 인근의 민속마을을 산책했다. 전통 방식으로 인절미를 만드는 체험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인 일조로 한 명은 떡메를 치고 한 명은 반죽을 정돈했다. 쿵덕쿵덕 리듬을 타는 경쾌한 소리가 마음을 콩닥이게 했다. 행여라도 실수하여 손을 찧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능숙한 두 사람은 봄이 오는 모양처럼 산드랗게 반죽을 완성했다. 아내와 나도 쿵짝이 잘 맞는 저 이인조처럼 삶을 예쁘게 빚어낼 수 있을까. "열매야, 지금은 춘삼월이고, 네 덕분에 우리 인생의 계절도 봄이야." 냉이가 강인한 힘으로 대지를 뚫는 소리,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도 연둣빛 꽃눈이 피는 소리, 조용하고 은은하게 노래하는 바람 소리에 대해 알려주었다. 서서히 북상하는 화신(花信)에 열매는 힘찬 발길질로 화답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