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일러스트 출처: pinterest@myungaelee
내가 사는 도시 인근에는 유명한 온천이 몇 군데 있다. 예산군에 위치한 덕산 온천과 도고 온천, 아산시의 온양 온천 등이다. 그 시절 엄마가 왜 그토록 목욕에 매진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폭포탕의 고압 물줄기로 씻어내고만 싶은 무언가가 그득했을까. 비누 거품과 함께 좁다란 수채 구멍으로 흘려보내고 싶었던 건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에 와서야 어림잡아 헤아릴 수 있지만 그때는 단순히 목욕이란 중한 것이구나, 내 목에 걸린 때 목걸이가 조금 더럽기는 한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마도 집집마다 욕조와 샤워 시설이 갖춰지지 않아서일 테다. 언제까지 붉은 대야에다 온수를 받아 놓고 목욕을 할 수는 없으니까.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혼자 몸을 씻는 건 만만하지 않은 일이다. 엄마는 주말 꼭두새벽부터 억척스럽게 할아버지 할머니를 아빠의 차에 태우고 온천으로 향했다. 동이 트기도 전의 어둠과 새벽녘의 냉기, 충분하지 못한 잠으로 인해 시작부터 기분이 상쾌할 리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짧은 대꾸 한마디 없이 순순히 따라나섰으니 삼 대가 함께하는 목욕 행사를 즐기셨는지, 나처럼 억지로 끌려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발가벗고 탕으로 입장하면 동생과 나는 준비운동을 마친 후 냉탕으로 다이빙을 꽂았다. 아빠는 때를 불려야 한다며 부러 근엄하게 눈을 부라렸다. "45도는 45세 이상만 들어가는 거 아닌가?" 온탕 온도계의 숫자를 가리키며 얼토당토아니한 궤소리(궤변+개소리)를 시전했으나 통할리 없었다. "서양의 선진국에서는 때를 밀지 않는대. 때는 피부를 보호하는 보호장벽이라 때를 미는 것은 합당치 않다지." "형 말이 맞아. 심지어 고령자일 경우 온탕에서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잖아." 할아버지가 동생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동생이 눈물겹게 거들었지만 우리는 결국 삼계탕의 영계처럼 다리를 꼬고 더운물에 몸을 담갔다. 어른들은 정말로 이 뜨거운 물이 견딜만한 것인지, 심지어 "아, 시원하다."라고 내뱉는 그 탄성이 진심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탕 속에서 몸이 벌겋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괴로운 이유는 앞으로 더 무시무시한 작업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젊은 아빠는 기력이 충만했는지 할아버지와 나, 동생 순으로 꽤나 꼼꼼하게(왜 그럴 때만) 때를 밀었다. 몸 구석구석에 이태리타월이 훑고 지나간 상흔이 생기고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얼마나 세게 밀었는지 가끔은 피딱지가 앉기도 했다. 그때부터인가 보다. 초록색이 싫어진 게. "거봐, 때가 이렇게나 나오잖아. 까마귀가 친구 하자고 하겠네." 아빠는 굳이 눈앞으로 때를 들이밀어 가며 뻔한 국민 멘트를 날렸다. 마지막에 아빠의 등을 미는 것은 내 몫이었다. '앗싸, 복수다!' 어금니를 꽉 물고 힘껏 밀었지만 아빠는 간지럽다는 듯 요동도 하지 않았다. 때를 다 밀고 나면 비로소 냉탕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치 보상이라도 받는 듯 사방에 물을 튀겨 가며 수영을 즐겼다. 목욕은 고통스러웠지만 빨대를 꽂아 숨도 안 쉬고 마시는 바나나 우유는 꿀맛이었다. 어떤 위인이 언제부터 목욕 후에 바나나 우유를 마셨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만화방에서 먹는 라면, 당구장에서 먹는 자장면처럼 장소와 한몸으로 특화되어 있는 음식이 존재하는 법이다. 목욕을 마치고 온천 로비로 나가면 여성팀은 한 번도 제시간에 나온 적이 없었다. 심지어 우리는 네 명이고 그쪽은 두 명임에도 불구하고. 네 살까지 여탕에 끌려갔기에 세신사로서의 엄마가 얼마나 잔혹한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아빠가 선녀로 보일 정도였으니까. 묵은 때를 벗은 우리는 뽀얀 얼굴을 하고 아침식사가 되는 식당을 찾아 백반이나 해장국을 먹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수저 위에 뼈 바른 조기의 살점 따위를 올려놓았다. "이모, 케첩 있어요?" 이태리타월이 만든 쓰라림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동생과 나는 계란프라이 위에 케첩을 뿌려 먹었다. "형, 이태리에서는 때를 밀지도 않는데 왜 이태리타월이라고 부르는 거야?" "때수건의 원료를 처음 수입한 사람이 전주 이 씨에, 태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할머니는 철부지 형제의 괴소리(괴담+개소리)를 흐뭇하게 청취하며 자기 몫의 계란프라이를 반으로 갈라 동생과 내 밥그릇에 올려 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빠는 때를 밀어주지 않았다. 서로 등만 밀어줄 뿐 몸을 씻고 단장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그것은 이제 자기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독립의 서막 같은 것이었다. 또 달라진 것은 인원 구성이었다. 엄마와 조부모님이 빠지고 남자 셋이서만 함께하는 목욕이 더 잦아졌다. 온탕에 들어가는 일도 수월해져서 아빠와 함께 여유롭게 몸을 담갔다. 어이구, 오늘 물 좋네, 소리를 연발하며. 쑥 향이 나는 사우나에서 누가 더 오려 버티나 대결을 하기도 했다. 악바리인 동생은 언제나 일등이었고 나는 꼴찌였다. 목욕이 끝난 후에 곱창 구이나 아귀찜, 복국 따위의 음식을 먹었다. 철저하게 아빠의 취향을 따른 다소 이기적인 메뉴 선정이었으나 우리는 아무거나 잘 먹었다. 덕산 시내에 위치한 어느 복국 집에 가면 바가지에 아욱이 수북이 담겨 나온다. 심지어 무한리필이라서 시원한 복국 국물에 아욱을 원 없이 데쳐 먹었다. 언젠가 그 맛이 그리워 방문한 적이 있는데, 무한리필이 안 되고 추가 주문을 받고 있었다. 30년이 넘었으니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빠의 등은 이제 야위어서 마른 고목 같다. 아빠는 이제 과거의 할어버지 나이가 되었고 나 역시 그때의 아빠를 넘어섰다. 온탕 앞에서 엄살을 부릴 수 없는 45세가 된 것이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는 조부모님을 떠올리면 삼대가 함께하던 목욕과 아침식사가 떠오른다. 고역이었던 그 새벽의 행사가 이토록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세상에는 굳이 밀어서 씻어 버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어쩌면 목욕이란 정말로 생에서 꽤나 중요한 의식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