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 참치롤

양배추 인형

by 아옹다옹하다

아옹이와 다옹이가 털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퇴근하고 귀가했는데 아내가 기진맥진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더군요. 화장실에서 1시간 가까이 털과의 사투를 벌였다고 해요. 처음에는 녀석들도 혀가 닿지 않는 부분까지 긁어주는 빗질을 골골대며 즐깁니다. 발라당 누워 그루밍을 하기도 하고요. 화장실이란 공간이 좋은 기억으로 각인되어 아내의 꽁무니를 잽싸게 따라 들어갑니다. 행복은 전염되는 것이 틀림없어요. 고양이가 만족하는 것을 보면서 내 안의 결핍도 채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영원히 유지시켜주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그러나 달콤한 시간도 잠시뿐, 일순간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손길을 거부하고 강력하게 퇴거 의사를 표명하죠. 한동안 털 미는 일을 게을리했더니만 걸러줘야 하는 털의 분량이 쌓이고 말았어요. 빗질도 일종의 스킨십이라서 고양이와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순간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주선 내부처럼 밀폐된 공간을 부유하는 터래기들의 공격은 입과 코 안까지 진격해 들어옵니다. 고양이 털이 빠지는 원인으로는 그루밍과 건강 상의 이유도 있지만 체온 조절이 가장 큽니다. 기온이 낮은 겨울, 풍성한 털로 온도 유지를 하다가 포근한 봄이 오면 체온 조절을 위해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4월에서 6월, 10월에서 12월이 털갈이가 가장 심한 시기입니다. 아내는 드디어 미뤄뒀던 옷장 정리와 봄 이불 교체를 감행했습니다.(4월에 썼던 글을 이제야 발행합니다.) 고양이가 묵은 털을 벗고 새 털로 옷을 갈아입듯 봄은 옷차림을 통해 걸음을 맞춥니다. 아내는 빗질로 고양이 털뭉치를 네 개나 빚어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뺏은 전리품으로 공을 만들어 다시 장난감으로 줍니다. 욕심이 많고 활발한 다옹이가 털 공으로 드리블을 하는가 하면 아옹이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입에 물고 으르렁거립니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사람으로 따지면 동그랗게 말린 옷일 뿐일 텐데요.


가난에 대한 표면적 인식은 가장 먼저 '의'로부터 옵니다. 먹는 음식과 사는 집은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지만 의복은 외출을 하는 한 숨길 수 없어요. 집을 구입하는 것에 비해 그럴듯한 옷으로 치장하는 것이 수월하기에 직관적으로 보이는 옷에 더 치중하게 되죠.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 집 형편을 알 수 있었어요. 유년에 유독 겨울이 싫었답니다. 단벌신사. 춘추복과 하계복은 여러 벌 있어서 요일마다 다르게 입을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겨울 외투는 몇 벌 없어서 같은 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이에요. 매일 같은 싸구려 점퍼에 코르덴 바지를 입고 등교하는 것을 누군가 알아볼까봐 두려웠어요. 무릎이나 팔꿈치가 해지면 알뜰하게 기워진 동그란 헝겊이 마음 한편을 초라하게 했죠. 다행히 시골 학교에는 그런 친구들이 대다수였지만요. 그럼에도 엄마는 세탁만은 확실하게 해서 깨끗한 옷을 입혔어요. 손재주가 좋은 엄마는 색깔별로 알록달록한 스웨터를 떠 입혔습니다. 겨울을 기다리며 뜨개질에 몰두하던 엄마의 작품이 드디어 내 몸에 걸치게 됐죠. 까슬까슬해서 입기에 불편했지만 알록달록한 털실로 만든 스웨터를 요일별로 다르게 입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선생님이 엄마의 솜씨를 칭찬하는 것도 기분 좋았고요. 옷이 입는 사람을 꾸미고 그 자격과 역할을 규정하기도 하죠. 유니폼을 입게 되면 행동 양식이 변모하는 것처럼 엄마의 스웨터가 내 캐릭터와 자신감까지 바꾸고 말았어요. 중학생이 되자 외모를 꾸미는 일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선 교복을 입었지만 사복을 입을 일이 있을 때면 늘 주위의 시선을 의식했죠.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사춘기엔 터무니없이 비싼 브랜드의 옷을 사기도 했어요. 껍데기보다 내실을 다지는 게 훨씬 더 자기 가치를 높이는 방식이란 걸 알았어야 했는데. 겉모습이 내 가치를 결정한다고 착각하고는 매일 거울을 보았어요. 하루는 당시 돈으로 각각 10만 원이 넘는 청바지와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친구들 앞에 섰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거예요. 브랜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그저 엇비슷한 옷에 불과했죠. 결국엔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만족에도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허망했어요. 그때부터였나 봐요. 아인슈타인처럼 같은 색, 같은 디자인의 옷만 사기 시작한 것이. 이른 나이에 스티브잡스, 마크주커버그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죠. 세기의 천재들은 우선순위에 집중하는 것 외에 결정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 그랬다고 해요. 전 단지 귀찮았어요. 옷을 고르는 데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고, 마침 돈도 없고.


"오래 살려면 이런 걸 먹어야 된대. 우리는 고양이 털 때문에 더 챙겨야 돼." 찐 양배추에 밥과 쌈장, 참치를 넣고 양배추롤을 만들어 먹었어요. 달고 달고 달디단 양배추. 양배추는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할 만큼 항암제와 항산화 물질을 갖고 있다죠. 소화관을 정화하고 유해한 화합물 중 일부를 무력화시키며, 간이 정상적 기능할 수 있도록 한대요. 양배추의 비타민 C와 미네랄 성분은 독소 제거 및 피부 미용에도 효과적입니다. 여담으로 미국에선 "엄마 난 어떻게 태어났어?"라고 물으면 "양배추 밭에서 주워 왔어."라고 한답니다. 우리나라 버전인 황새, 다리 밑 드립이랑 비슷한 거죠. 광활한 농장의 수많은 양배추가 아기 얼굴이라고 상상하니 조금 기괴하긴 합니다. 양배추 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바로 양배추 인형이에요. 미국의 한 피혁가공업체에서 제작돼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켰죠. 수제 인형이라 모양이 다 다르고 땅딸만 한 외모가 귀여워서인지 한국에서도 절찬리에 팔렸어요. 캐릭터의 성공에 힘입어 드라마와 게임으로도 제작됐죠. 특히 재믹스 버전의 'Cabbage Patch Kids.'란 작품은 최애 게임 중 하나였습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할 캐릭터의 머리 모양과 색, 옷 색깔을 조합할 수 있는데, 비디오게임 사상 최초의 캐릭터 에디트였다고 해요. 게임 방식은 단순합니다. 양배추와 거미, 물고기, 웅덩이 등의 장애물을 피해 전진하면 돼요. 처음엔 쉽지만 스테이지를 지날수록 난이도는 상승해서 100판까지 클리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죠. 그땐 몰랐는데 인생이란 게임과 다를 바 없네요. 해를 거듭할수록 생의 난도는 높아만 가요. 게임 클리어의 관건인 거리 조절과 점프 타이밍의 중요성은 삶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어떤 타이밍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이 달라집니다. 간혹 옷을 역할에 비유하곤 하잖아요. 영원히 단벌신사에 혈혈단신일 줄 알았던 제게도 새로운 옷이 입혀졌네요. 비장하게 의상과 헤어스타일을 정하고 게임에 들어가는 양배추 인형처럼 오늘도 통통 도약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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