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유
https://youtu.be/RNc7rgP16QI?si=hw6sqnvWMtj2GzLl
응급실엔 특유의 성마름이 있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그 매몰찬 기운에 기선을 제압당해 그만 움츠러들고 말았다. 접수표를 받고 먼저 온 대기자들의 수를 헤아리며 순서를 기다렸다. 환자들의 표정에서 아픔과 짜증이 동시에 흘러내렸다. 근심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때론 럭비공처럼 엉뚱한 대상에게 튀어 분노를 표출시킨다. 얼굴에 황달기가 있는 남자가 간호사와 실랑이를 펼쳤다. 위중한 상황이니 빨리 진료를 받게 해달라고 보채는 중이었다. 구급차를 타고 이동식 침대에 실려온 여자는 주차 차단기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여자는 장차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응급실엔 저마다의 사연이 존재했다. 아내와 나는 서로의 눈빛에서 포착한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손을 꼭 잡았다. 산부인과를 통해 미리 접수가 되어서인지, 출산이 임박한 산모여서인지 간호사는 친절하게 휠체어와 도우미까지 호출해 주었다. 휠체어에 몸을 맡긴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고위험 산모 병실에서는 면회가 되질 않아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 당직 의사가 진찰 결과를 말해주러 올 때까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만 동동거렸다. 초조한 마음에 도저히 엉덩이를 붙이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 나타난 의사가 말했다. "아직 아기가 덜 자란 상태니까 폐성숙 주사를 맞으면서 며칠 더 기다려 보죠. 엄마 뱃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커서 나와야 돼요." 폐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태어나서도 자가 호흡을 못 한다는 말이 청천벽력 같이 느껴졌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코와 입으로 관을 삽입한 채 옅은 숨을 거칠게 내쉬는 열매를 상상했다. 필요한 짐을 챙겨 다음날 면회를 오기로 하고 병원을 나섰다. 담담하게 수긍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열매가 잘못될까봐, 아내가 낙심할까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시련에 서러워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무도 보고 들을 수 없는 차 안이니까 오늘만 울자.' 생각해 보니 결혼부터 출산까지 계획대로 된 게 없었다. 처가의 반대로 인해 사 년 만에 결혼했고, 자연 임신이 되지 않아 시험관 시술로 사 년만에 아이를 가졌다. 출산 또한 예정일이 사십일 넘게 남았으니 중대사 중에 쉽게 이룬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맞다. 사람은 이토록 연약한 존재였지.' 늘 착각하지만 우리에겐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고난은 비로소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공짜로 받으면 소중함도 몰라. 결혼과 임신을 기다리며 더 간절할 수 있었잖아." 아내와는 늘 서로를 위로하며 감사하기로 했다. 아기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시원하게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받침이 많지 않아 부르기 편하고, 어감이 세지 않고 둥글둥글한 말소리의, 너무 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이하지도 않은 이름. 왜 요즘 유행하는 이름이 다 비슷비슷한 것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가지가 잘 자라야만 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삶이 평안하다는 신앙적 고백에서 '한지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거저 이뤄지는 것이 없듯이 모든 시련 속에는 각성과 성찰의 기회가 숨어 있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업무적인 배려라도 받을 요량으로 부러 과장해서 이야기했다. 슬픔을 나누는 게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수월하다. 시기 질투보다는 차라리 동정이 낫다. 친한 직원 몇 명에게는 속속들이 사정을 말하고 위로를 받았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지인들에게 기도 부탁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그러나 출산하게 되면 이십일 동안 출산 휴가를 써야 돼서 어느 정도 정리를 해놓아야만 했다. 수술 예정일은 입원 사일 차인 목요일로 잡혔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무심하게 시간은 잘도 흘렀다. 퇴근 후 병원에 가는 길에, 라디오에서 '작은 자유'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티베트 분리독립운동을 보며 만들었다는 노래에는 잔잔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힘과 평화를 향해 손 내미는 작은 정성이 담겨 있었다.
너와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네
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름다운 것들을 같이 볼 수 있다면 좋겠네
작은 자유가 너의 손안에 있기를
작은 자유가 너와 나의 손안에 있기를
지구 저편에는 여전히 국가 간 전쟁이나 내전으로 인해 최소한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염원이 될 수도 있다. 노래의 가사처럼 얼굴도 모르는 어느 나라의 작은 아이의 자유를 위해 기도했다. 어차피 생이란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조산도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작은 교전에 불과할 뿐이기에 오늘 진다고 해서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것은 아니다. 매일 벌어지는 작은 전투에서 근소하게라도 이기다 보면 종국에는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겠지. 출산을 하루 앞두고 짐을 싸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고 아내와 통화만 했다. 오일 동안 집을 비워야 돼서 장모님께 고양이를 부탁했다. 어설프게 짐을 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아내는 홈캠으로 말을 걸어왔다. 지나가던 아옹이를 잡아다가 캠 화면에 들이댔다. 맑고 청량한 아내의 웃음소리가 적막하기만 한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짐을 챙기기 위해 서랍을 뒤지다가 연애 시절 아내에게 쓴 편지를 발견했다. 자유와 구속에 관한 대목이 있었다. 자유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지만 때론 그것이 방종이 되어 나를 위태롭게 할 때도 있다. 행동과 의사의 자유를 속박하기도 하지만 서로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한 사랑을 하자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 지안이게도 안전한 울타리를 지어줄 수 있을까. '지안아, 내일이면 만나는구나. 조금만 더 힘 내. 엄마 아빠도 기운 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