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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다람쥐 May 25. 2016

기자를 그만둔 후 찾아온 공허함

기자를 꿈꿀 때부터 현재까지 에피소드

기자를 그만둔 지도 3달 정도가 됐다. 사표를 내기 전 결심할 때도 그랬지만 전혀 후회는 없다. 다만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꿈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예상치 못한 공허함이 찾아왔다. 방향은 잡혔지만 목적지는 아직 희미하다.


오늘은 이런 텅 빈 마음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기자를 꿈꾸기 시작할 때부터 지난 2월 그만둘 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기록 삼아 간략히 정리해봤다.


2016년 2월 말. 생각보다 빠르게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뒀다. 2011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일은 최소 10년은 할 줄 알았으나 조기에 끝내게 됐다.


내가 기자라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꿈꿨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이 네덜란드에 0-5로 지는 경기를 새벽에 보면서 울먹거렸던 중학생 소년(그만큼 스포츠를 좋아했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눈앞에서 확인하며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FIFA 에이전트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종류의 축구 혹은 스포츠와 관련된 일을 찾던 나는 기자라는 직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엔 단순히 '유명 선수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보면서 일을 할 수 있어서'라는 점이 좋았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 기자가 되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어림도 없는 글쓰기 실력에, 때로는 부족한 각종 지식수준 때문에 어려웠지만 좋은 스승님과 선배, 친구들을 만나며 졸업 전 2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운 좋게 기자가 될 수 있었다.


다만 기자의 시작은 스포츠가 아닌 종합지에서 시작했다. 나의 경력 관리를 위해 스포츠라는 좁은 영역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종합지라는 조금 더 넓은 영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낫다는 스승님과 주변의 조언을 따랐다.


난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언론사에 다니지는 못했다. 흔히 말하는 '메이저 언론사' 면접까지 간 적도 있으나 결국 합격은 못했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랬을 것이다.


첫 직장은 비록 작은 언론사였지만 기자로서 기본적인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부장과 선배들을 만났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동기와 후배들(지금은 친구 같은)도 만났다.


좌충우돌하며 맨땅에 헤딩도 해보고, 갖은 욕을 먹어가면서 그렇게 2년 정도가 지났다. 요즘 불황이라는 조선업체들부터 시작해 정유사, 자동차 회사 등을 담당하며 부족하지만 열심히 일했다. 생각해보면 가장 열정 가득히 일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사내정치가 혼탁해지면서 2013년 여름 대규모 인사가 났고, 난 거기에 휘말렸다. 내가 따랐던 부장이 소용돌이 한 복판에 있었는데 나도 같이 휩쓸린 것이다. 이후 첫 직장에서의 생활은 꼬여만 갔다.


평생 살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했고, 의욕은 떨어져만 갔다. 이상한 취재도 이어졌다. 여기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이 계속 겹쳤다. 그러면서 내가 좋아했던 동료들은 타사로 잇따라 이직하기 시작했고, 회사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은 사라졌다. 외부에서 회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부정적인 것 투성이었다.


이후 해를 넘겨 우연한 기회에 스포츠 인터넷 매체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물론 이전 경력을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첫 번째 이직을 했다. 축구는 아니었으나 야구와 배구, 각종 아마추어 스포츠, 아시안게임, 유니버시아드대회 등등을 취재하며 내가 어렸을 적 꿈꿨던 장면들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활'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봉착하면서 꿈을 이어갈 동력이 떨어졌다. 주변 선배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내 생각도 '꿈이라는 것도 내 생활이 우선 어느 정도 해결이 돼야 유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활 유지가 힘든데, 핑크빛 미래를 그리기 어려운데 마냥 꿈을 좇는 것도 옳은 길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또 해가 지났고, 무더운 여름 한 선배의 제의로 경제지 이직 기회를 얻었다. 이후 회사를 다시 한 번 옮겨 자동차 담당 기자가 됐다. 생각해보면 남들이 재밌을 것 같다고 하는 분야는 다 취재해 본 것 같다. 실제로도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재미는 100% 만족했다. 그리고 이직 운도 참 많이 따랐다. 내가 부족함에도 주변에 날 생각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많은 덕이라 생각한다.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후배와 둘이서 자동차 업계를 열심히 취재했다. 때마침 폭스바겐 사태 등 업계에 여러 가지 사건이 계속 터지면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이후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고, 후배와 일처리에 있어서도 체계를 함께 잡아가면서 일할 맛도 났다. 이제 새해가 되면 본격적으로 어떻게 취재하고 기사를 쓰자고 논의도 했다.


그런데 회사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회사가 수익 창출에만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부서가 개편되고 새로운 부장이 왔다. 회사는 뒤숭숭했고 또 한 번 인사가 났다. 그런데 이번 인사에서도 난 다시 부서를 옮기게 됐다. 인사가 난 '적절한' 이유는 없었다. 편집국장과 해당 부서 부장을 포함해 회사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설명을 못했다. 선후배들도 내가 왜 부서를 이동해야 하냐며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를 다른 부서로 보냈던 부장(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 사람은 업계에서 비웃음을 받고 있다)은 인사가 공지된 날부터 현재까지도 단 한 마디의 말이 없다. 체계가 없던 인사가 나며 회사 전체가 뒤집혔다.(이후 내부 취재로 진짜 인사가 난 이유를 파악했고, 난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왔다.)


이후 새롭게 간 부서의 부장은 나를 자신의 광고영업과 협찬 기사 확보를 위한 '소모품' 정도로 치부했고, 나는 이를 거부했다. 사표를 내기 전 부장과 많은 말을 나눴는데 아직까지도 이 말은 잊을 수 없다.


나: 전 이 회사에 좋은 기사를 쓰려고 입사했습니다.

당시 부장: 그럼 좋은 기사 쓸 수 있는 회사로 가. 여기는 그렇게 못하는 곳이야.


(언론사 부장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아주 바람직한(!!) 말이었다.)


1~2월 두 달간 나는 고민을 거듭했고, 여러 상황을 종합해 결국 기자를 그만두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미 이 판은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고, 거듭해서 안 좋은 일을 겪은 나로서는 더 좋은 기사를 쓰지 못했던 아쉬움은 있었지만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찾고자 했다.(동료 기자들조차 나에게 기자를 그만두라고 할 정도였으니 참...)


기자를 그만두고 한 달가량 여행도 다녀오면서 몸과 정신 모두 정상 상태로 회복이 많이 됐다. 주변에서도 생각보다 밝은 모습이어서 다행이라며 잘 그만뒀다고 위로를 해줘서 참 고마웠다.


한 가지 꿈을 위해 달려왔고, 100%는 아니지만 80% 정도는 꿈을 이뤘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평균 이상은 해봤으니 어떻게 보면 운도 좋았다. 그리고 기자를 하는 동안 겪었던 모든 일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무슨 의미에서든지)


그런데 오랜 시간 하나만 바라보고 오다가 이제 그 목적지를 변경하려고 하니 공허함이 좀 크다. 생각지 못한 감정이다. 다음 달부터 공부할 목록이 정리가 되고 있는데 안 쓰던 머리를 다시 쓰면서, 주변 지인들을 많이 만나면서 목적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인생 뭐 있을까. 어차피 도전의 연속이고, 힘들지 않은 일 없는데. 이젠 공허함을 꽉 채울 계획과 행동이 남았다.



**사족: 내가 비록 그만두기는 했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분명 매력적인 직업이다. 어린 나이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며 흔히 얘기하는 '사람 만나는 기술'을 충분히 익힐 수 있었다. 다른 일을 했다면 만나지 못했을 위치의 사람들도 '기자'라는 이유로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저 사람에게 배워야 할 점', '배우지 말아야 할 점' 모두 깨달았다. 또 아직도 부족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글쓰기의 기본은 배웠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다양한 취재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건 기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아무리 글을 쓸 수 있는 통로가 많아졌다고 해도 아직까지 미디어라는 파워는 견고하기 때문이다. 다만, 회사와 리더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꽤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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