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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Oct 01. 2019

시리어스 맨 리뷰

가볍지만 소름끼치는 냉소와 유머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냉소적이고 비관적이다. 세계는 언제나 부조리와 우연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은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이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코엔 형제의 세계관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이 바로 시리어스 맨일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영화의 주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유대인 성서학자 라시의 말을 빌리면서 시작한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이 문장만큼 코엔 형제의 세계관을 잘 드러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프롤로그. 한 독일인 부부는 지금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악령인지 아닌지를 두고 다툰다. 그리고 손님이 집에 찾아왔을 때 아내는 기어코 그 손님을 칼로 찌른다. 피를 흘리며 떠나는 손님을 두고도 부부는 끝까지 다투지만 영화는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가 정말 악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2. 시리어스 맨의 내용은 텅 비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특정 사건과 사건 속으로 뛰어들어 이와 부딪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반면 시리어스 맨에서 주인공 래리는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릴 뿐이다. 그러한 무기력한 기다림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공허함을 남길 뿐이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러한 텅 빈 내용만으로도 능수능란한 연출력을 가감없이 뽐낸다. 주인공 래리에게는 한 번에 많은 시련이 닥친다. 아내는 자신의 친구와 외도하여 이혼을 요구하고 자신을 집에서 쫓아낸다. 동생은 도박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아들과 딸은 자신의 지갑에 몰래 손을 댄다. 대학에서는 누군가가 래리의 대학 종신재직권 심사에 안 좋은 내용을 제보하여 래리를 낙마시키고자 하고 유학생인 클라이브는 부모까지 동원하여 성적을 위조 해달라고 요청하며 뇌물까지 준다. 이러한 시련들은 모두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으로 인해 받는 고통이다. 외도를 한 것은 아내인데 쫓겨나는 것은 래리이고 뇌물을 준 것은 클라이브인데 부모에게 협박을 받는 것도 래리이다. 논리적으로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실존적인 운명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과 우연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게 기다리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이다. 래리는 이러한 자신의 불행의 이유를 알기 위해 랍비들을 찾아가지만 아무도 그에게 답을 주지 못 한다.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뿐이다(심지어 마지막 마샥 랍비는 생각할 것이 많다고 만나지도 않는다). 신을 대행하는 사람들조차 답을 모른다. 신에게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그저 인간을 세상 속에 던져놓고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3. 시리어스 맨에서는 세 번의 중요한 교차 편집이 나온다. 첫 번째는 영화의 초반부에 래리의 건강검진 장면과 대니의 교실 장면이 교차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래리의 교통사고와 사이의 교통사고가 교차되는 것이다. 마지막 교차 편집은 래리가 의사와 통화하는 장면과 대니의 하교 장면이 교차되는 것이다. 두 번째 교차 편집에서 래리는 지나가는 클라이브를 욕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한다. 클라이브를 욕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원인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이다. 래리의 사고는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지나간 원인을 붙잡고 있다가 생긴 사고이다. 이때 교차 편집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되는 사이의 사고는 사이 역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전까지 사이는 래리의 아내와 외도하면서 래리의 불행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결국 우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출 방식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교차 편집은 유사하게 보인다. 말하자면 세 번째 교차 편집 장면은 첫 번째 교차 편집 장면의 결과이다. 첫 번째 교차 편집 장면에서 래리는 건강 검진을 받는다. 그때 의사는 분명히 큰 이상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지만 세 번째 교차 편집에서 무언가 불길한 이야기를 남긴다. 이것은 래리의 건강 검진의 최종 결과인 셈이다. 래리의 삶은 지금까지 큰 이상 없는 평탄한 삶처럼 느껴졌지만 래리는 수많은 불행과 모순에 빠지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러한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때 의사의 전화를 받기 이전에 래리는 결국 뇌물을 받고 클라이브의 점수를 합격 점수로 바꾼다. 영화에서 래리가 실제로 잘못을 행하는 몇 안 되는 장면이다. 이 때문에 의사의 불길한 전화가 마치 래리의 죄에 대한 대가로 보이게 된다.



4. 코엔 형제의 영화에는 꿈 혹은 환상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예지몽의 성격이기도 하고(밀러스 크로싱) 현실 부정의 반영이기도 하고(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인물을 무기력함과 허무함을 드러내기도 한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시리어스 맨에서 래리는 총 세 번의 꿈을 꾼다. 첫 번째 꿈은 죽은 사이가 강의실에 찾아와 마샥 랍비를 만나라고 재촉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 꿈은 이웃집 여자인 샘스키 부인과 섹스를 하다가 관에 묻히는 꿈이다. 세 번째 꿈은 클라이브에게 받은 뇌물을 자신의 동생에게 건내 주다가 유대인을 사냥하는 이웃집 부자에게 총살당하는 꿈이다. 첫 번째 꿈에는 마샥 랍비를 서둘러 만나 이러한 불행들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래리의 욕구가 담겨있다. 이때 자신을 “시리어스 맨”이라 말하는 사이는 래리가 가르치는 수학에 대해 수학은 가능성의 학문이며 삶에 있어서 답을 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죽은 뒤 올람하바에 있는 사이는 그러한 진리를 알고 있으나 래리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무지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사이가 마샥과의 만남을 재촉하는 것은 만난다 해도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는 마샥 랍비를 만나 자신이 통제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이다(이는 래리가 마샥을 만나 아무런 답도 얻지 못 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언적 성격 또한 가지고 있다). 또한 래리는 샘스키 부인의 집을 염탐하고 후에 마리화나를 함께 피우게 된다. 이에 자신이 샘스키 부인과 외도를 하는 것까지 나아갈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두 번째 꿈에 반영된 것이다. 또한 래리는 여러 가지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렇기에 돈에 대한 욕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뇌물을 받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세 번째 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유대인을 사냥하는 이웃집 부자를 래리는 반유대주의자라고 생각하기에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이렇듯 래리도 완전히 깨끗한 인간은 아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을 만한 죄의식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불행이 과거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지닌다. 하지만 래리가 겪는 불행은 래리의 잘못에 비해 불합리하게 벅차 보인다. 불행이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비례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코엔 형제 식으로 말하자면)그냥 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만 한다.


5. 대니는 학교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교사에게 압수된다. 그 안에는 자신의 친구 페이글에게 갚아야 할 돈이 들어 있다. 이를 찾기 위해 교사실에 몰래 들어가지만 라디오는 그곳에 없고 엉뚱하게도 성인식을 마친 뒤 마샥 랍비에게 돌려 받게 된다. 라디오를 돌려주면서 마샥 랍비는 견딜 수 없는 불행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답을 내놓지 않고 그저 착하게 살라는 말만을 남겨놓는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게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존재이다. 대니는 라디오를 돌려 받은 뒤 전과 같이 교실에서 라디오를 몰래 듣는다. 그리고 토네이도로 인해 일찍 하교할 때 페이글에게 돈을 갚고자 하지만 주지 못한다. 이때 카메라는 페이글을 바라보는 대니의 뒷모습을 담아낸다. 이때의 쇼트는 이전에 페이글이 대니를 쫓아가다가 멈춰선 후를 잡아냈을 때와 유사한 쇼트이다. 두 쇼트의 공통점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바라보는 자의 무기력한 뒷모습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페이글은 대니를 잡지 못했고 대니는 페이글에게 돈을 갚지 못했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쇼트이다. 그리고 대니의 하교 장면과 교차 편집되는 장면에서 래리는 클라이브의 점수를 고치고 난 뒤 의사에게 불길한 전화를 받는다. 래리가 받은 불길한 전화의 원인이 래리가 저지른 죄의 대가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둘의 상관관계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래리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자신의 운명을 잘못된 방법으로 바로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래리가 클라이브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클라이브의 문제만 해결하면 자신의 불행이 모두 끝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불행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잘못된 방법으로라도 통제하고자 할 때 가장 큰 불행의 늪에 빠진다. 그러한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는 어떤 식으로라도 대가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래리가 받은 전화는 래리의 운명이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예측할 수 없고 래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코엔 형제는 두 장면을 교차 편집하면서 인간의 무기력함과 어리석음을 능수능란한 솜씨로 드러낸다.


6. 코엔 형제는 언제나 과거의 미국을 다뤄왔다. 그리고 코엔 형제가 다루는 시기의 미국은 대부분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시리어스 맨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때 당시 미국은 냉전과 베트남 전쟁, 쿠바 사태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러한 거대한 사건을 영화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이러한 혼란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일상스럽고 작은 사건으로 탁월하게 담아낸다(영화의 배경이 된 미네소타 주는 코엔 형제가 태어난 곳이다). 시리어스 맨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미국을 그대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토네이도에 찢어질 듯이 휘날리는 성조기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혼란과 불안함에 빠진 미국을 묘사한 것이다. 코엔 형제가 과거의 미국을 다루는 것은 이러한 혼란과 불안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이기에 당연한 운명이다. 시리어스 맨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 래리가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 중 유대인을 다룬 또 다른 영화는 바톤 핑크이다. 두 영화에서 주인공의 공통점은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탁상공론 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바톤 핑크의 바톤은 작가이고 시리어스 맨의 래리는 물리학 교수이다. 바톤은 작가라는 자신의 직업에 자만심을 품고 다른 직업을 낮춰보지만 세상을 제대로 경험하지 않은 그의 글을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래리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면서 불확정성의 원리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가르친다. 두 이론의 공통점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내용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가르치면서도 래리는 수학처럼 인생을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많은 불행을 겪으면서 결국 삶은 수학 공식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톤과 래리가 이러한 유사점을 지니는 것은 학자적인 이미지를 지닌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를 풍자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는 코엔 형제가 유대인이기에 가능한 형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코엔 형제는 사실상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비슷한 이야기와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엔 형제의 영화가 여전히 매력적인 것은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언제나 새롭고 기발하기 때문이다. 시리어스 맨은 그러한 코엔 형제의 연출력과 세계관의 정점에 해당하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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