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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Oct 01. 2019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리뷰

영화와 연극, 죽음과 삶 사이에서의 아찔한 줄타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극이다. 극 중에 등장하는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는 단순히 영화의 소재나 요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라는 영화와 하나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시그리드가 연상의 상사 헬레나를 유혹해 자살로 이끌어 간다는 내용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말로야 고개를 감싸는 뱀 모양의 구름을 뜻하는 것으로 이 연극을 최초로 만든 감독인 빌렘이 말로야 스네이크를 찍은 영상을 본 다음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빌렘은 말로야 스네이크를 볼 수 있는 산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연극에서는 헬레나가 시그리드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과거 헬레나를 연기했던 수잔은 1년 후 자동차 사고로 죽게 된다. 그리고 말로야 스네이크는 악천후의 징조이다. 이렇듯 말로야 스네이크는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마리아가 헬레나 역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헬라나 역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의 죽음일 수도 있고 배우로서의 죽음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시그리드를 동경하고 과거의 자신처럼 시그리드 역을 계속 소화하기를 원한다. 시그리드를 동경한다는 것은 과거의 젊었던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리허설 도중 끊임없이 헬레나 역을 비하한다. 동시에 새롭게 시그리드 역을 맡게 된 조앤을 질투한다. 조앤에게는 자신이 갖지 못하는 젊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중년이 된 마리아는 세상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한다. 인터넷을 경멸하여 새로운 소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새로운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


2. 이에 반해 마리아의 비서 발렌틴은 계속해서 마리아에게 헬레나 역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한다. 그녀는 위선적이고 잔인한 시그리드 역보다는 인간적이고 진정성 있는 헬레나 역이 더 매력 있다고 강조한다. 발렌틴은 끊임없이 진정성을 강조한다. 마리아와 함께 조앤이 출연한 슈퍼 히어로 영화를 보러 갔을 때도 마리아는 조앤의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 하지만 발렌틴은 조앤의 캐릭터가 진정성 있고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며 그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마리아와 달리 새로운 소식과 흐름을 제대로 알고 있다. 마리아의 정보통 역할을 하며 그녀는 마리아에게 현실세계로 돌아오라고 (조롱하듯이)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마리아에게 헬레나 역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자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발렌틴은 사실상 시그리드 역을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는 마리아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발렌틴은 시종일관 충돌한다. 두 인물은 실스마리아에 있는 빌렘의 집에서 리허설을 하게 된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리허설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 관객에게 신호를 주고 그것이 리허설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아무런 예고없이 리허설을 보여주고 관객들은 이것이 리허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연극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 지면서 둘은 어느 순간 하나가 된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헬레나가 되고 발렌틴은 시그리드가 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결국 실스마리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인 셈이다.


3. 한편으로 발렌틴과 시그리드는 마리아의 과거이다. 시그리드는 과거에 마리아 자신을 유명하게 해준 배역이다. 그리고 발렌틴은 마리아에게는 없는 젊음을 가지고 있다. 시그리드를 맡은 발렌틴은 그 자체로 마리아의 과거이고 마리아의 삶의 잔상이자 유령이다. 마리아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과거는 자신을 냉정하게 밀어낸다. 두 인물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마리아는 발렌틴을 필요로 한다. 마리아와의 의견 충돌에 지친 발렌틴은 자신의 의견을 듣지 않을 것이라면 자신을 쓰지 말라고 불평하지만 마리아는 발렌틴을 계속 붙잡는다. 발렌틴이 떠난다는 것은 시그리드가 떠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삶에 남아있는 젊음과 시그리드의 잔상이 떠나는 것이다. 동시에 시그리드의 부재는 마리아와 헬레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시그리드의 역할은 헬레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고, 시그리드가 떠난다는 것은 곧 헬라나의 죽음과 직결된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발렌틴을 붙잡아두려 한다. 그래야만 자신 안의 시그리드가 남아있으면서 헬레나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4. 하지만 발렌틴은 끊임없이 유혹한다. 마리아에게 헬레나를 받아들이라고. 마치 시그리드가 헬레나를 자살로 이끄는 것처럼. 발렌틴은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연극의 끝을 위해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기 위해 산을 올라간다. 앞서 언급했듯이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연극은 말로야 고개를 감싸는 뱀 모양의 구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온 것이다. 그리고 말로야 스네이크는 죽음의 기운들로 가득 차 있다. 말로야 스네이크를 본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는 뜻이다. 발렌틴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러 간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장면이 이어진다. 두 인물은 분명 함께 산을 올라가지만 발렌틴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마리아가 그녀를 찾지만 그녀는 그 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마리아의 죽음이란 실제적인 죽음이 아닌 배우로서의 실존적인 죽음이다. 마리아의 과거인 발렌틴이 부재한다는 것은 더 이상 마리아는 시그리드가 될 수 없다는 뜻이고 영원히 헬레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동경하는 과거의 영광이 사라진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는 가능성만이 남아있는 것이고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죽음뿐이다. 이제 마리아는 완벽하게 헬레나이다. 동시에 발렌틴은 이제 역할이 다했기 때문에 퇴장한 것이다. 시그리드의 역할은 헬레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고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면서 마리아는 실존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니 이제 시그리드의 역할은 끝났고 이와 함께 시그리드를 연기한 발렌틴도 함께 퇴장하는 것이다.


5. 그렇게 실존적인 죽음을 맞이한 마리아는 이제 서서히 잊혀지는 일만이 남게 된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는 시그리드를 맞기로 한 조앤이 사건의 중심이 된다. 조앤과 외도한 크리스의 아내가 자살을 기도하자 모든 관심은 조앤에게로 향한다. 마리아는 분명 함께 연극에 출연하면서도 관심을 받지 못한다. 조앤의 말대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야기는 헬레나의 이야기가 아닌 시그리드의 이야기이다. 헬레나가 된 마리아는 이제 배우로서 소멸에 다가간다. 그리고 젊음을 잃은 중년의 마리아는 곧 실제의 죽음에 다가설 것이다. 결국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6.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감독의 다음 작품인 퍼스널 쇼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두 영화는 마치 2부작처럼 보인다. 두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출연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스타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두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물을 다루고 그 인물들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기에 두 영화 모두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 차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면 퍼스널 쇼퍼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동경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 두 영화를 통해 인간의 실존에 관한 과감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한들 우리는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자신을 받아들인 채로 천천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두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죽음이라는 우리 내면의 황폐한 실존적 증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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