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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Oct 01. 2019

투 러버스 리뷰

사랑이라는 성장에 관한 클래식 러브 스토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사랑에는 늘 어느 정도 광기가 있다. 그러나 광기에도 늘 어느 정도 이성이 있다.”-니체


1. 투 러버스를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비판적이든 호의적이든 동의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이 영화의 압도적인 분위기와 정조이다. 오직 제임스 그레이만이 만들 수 있는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와 정조는 그 자체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 영화는 서사적으로 특별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자칫 관성적이고 뻔하게 보일 수 있는 스토리조차도 섬세한 심리 묘사와 품격 있는 정조를 만나면서 클래식한 스토리로 탈바꿈한다. 투 러버스 이전에 만든 세 편의 영화가 영화광으로서 만든 영화이면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워가고 증명하기 위한 단계였다면 투 러버스부터는 본격적으로 제임스 그레이 본인의 능력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2. 레너드는 불안정한 인물이다. 전 약혼녀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후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는 조울증을 앓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가지 못하는 인물이다. 대신 그때그때 감정과 상황에 휘둘린다. 이러한 레너드에게 있어서 사랑은 주체성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이때 주체성을 얻어가는 것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레너드에게 있어 가족은 족쇄이면서 굴레이다. 그가 자살하기 위해 강으로 갈 때 세탁소에 맡겨진 옷을 들고 가는 것은 가족과의 연을 끊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산드라의 가족이 레너드 가족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코헨 부부의 아들이 감사 인사 없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은 이전 씬에서 레너드가 자신을 구출해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 없이 떠나는 것과 일맥상통 한다. 레너드에게 가족이란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굴레이다. 전 약혼녀와 헤어지게 된 이유도 본인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약혼녀 측 부모의 반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레너드는 가족에게 계속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투 러버스는 사랑 영화인 동시에 레너드 라는 인물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3. 레너드가 사랑하는 인물은 자신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 인물이다. 전 약혼녀와 헤어지게 된 원인은 자신과 약혼녀가 같은 유전병을 앓고 있어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레너드는 자신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 사람에게 이끌리는 인물이다. 그가 미셸에게 이끌리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레너드가 미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미셸이 아버지를 피해 자신의 집 앞으로 피해 있을 때였다. 미셸 역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또한 미셸은 레너드처럼 감정이 불안정한 상태이다. 무엇보다 레너드와 미셸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공통점을 가진 미셸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레너드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조금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미셸은 레너드의 내면이 외면화 되어 나타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셸에게는 또 다른 유부남 남자인 로날드가 있다. 그는 레너드와 미셸보다 훨씬 부유하면서 미셸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도 한다. 미셸은 그런 로날드에게 아파트 세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 역시 레너드와 같이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인물이다. 심지어 로날드에 대하여 레너드에게 물어볼 정도로 스스로 결정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 미셸에게 레너드는 실망감과 싫증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욱 그녀에게 이끌린다. 그러나 레너드에게도 다른 여자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코헨 부부의 딸인 산드라이다.



4. 산드라는 레너드의 부모와 사업적으로 가까운 코헨 부부의 딸이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서 이끌림을 느낀다. 외부의 시선에서 두 사람의 조합은 무엇보다도 이상적인 조합으로 보인다. 계급적으로도 비슷한 위치에 있고 두 집안은 사업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레너드는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산드라와 미셸 사이의 관계 속에서 레너드는 미셸에게 더 큰 이끌림을 느낀다. 레너드에게 산드라는 자신을 바라봐주는 여자이고 미셸은 자신이 바라보는 여자이다. 그렇기에 산드라는 레너드에게 있어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레너드와 산드라가 첫 키스를 하는 씬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두 인물이 키스를 한 뒤 방으로 들어가자 카메라는 두 인물을 따라가지 않고 벽에 걸린 레너드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바라본다. 이것은 레너드의 현 상태를 그대로 나타내는 쇼트이다. 레너드는 아직 유아기적 상태를 탈피하지 못한 미성숙한 인간이다. 그래서 산드라의 보살핌이 필요한 인물이다. 산드라의 직업이 제약회사 직원으로 설정된 것도 산드라가 레너드의 마음의 병을 치유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모와도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이는 곧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굴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레너드가 산드라를 사랑할수록 그는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가족의 굴레 속으로 더욱 깊게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미셸이 겪고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미셸은 로날드가 언젠가 자신을 버리고 가족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불안해 한다. 그녀에게는 로날드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결국 그녀는 로날드를 떠나게 된다. 이제 그녀는 의존할 누군가가 없는 상황이다. 온전히 자유로워진 그녀에게는 이제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고 나아가야 하는 책임이 생기게 된다. 레너드는 그러한 미셸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5. 레너드는 미셸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녀를 위한 반지까지 준비한다. 드디어 그에게도 가족을 떠나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누릴 기회가 온 것이다. 그의 어머니도 이러한 그의 결정을 눈치채지만 그를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미셸과 떠나기로 한 날 그녀는 레너드와 떠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위해 가족을 버린 로날드와 재결합한다. 레너드와 로날드 모두 가족을 벗어나 미셸에게 새로운 삶을 제안하며 다가왔다. 그녀는 결국 로날드를 선택한다. 로날드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예전처럼 의존적인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다. 그녀는 주체적인 삶 대신 안정적인 삶을 택한 것이다. 이제 레너드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쩌면 레너드는 처음부터 미셸과 함께 할 수 없는 운명 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셸은 오페라를 좋아하지만 레너드는 오페라를 잘 모른다. 하지만 산드라는 레너드처럼 오페라를 잘 모른다. 그리고 레너드와 미셸은 영화상에서 제대로 섹스를 나누지 못한다. 산드라와 레너드의 섹스는 완전한 형태의 섹스였던 반면 미셸과 레너드가 옥상에서 나눈 섹스는 불완전한 형태였다. 레너드는 통화 도중에 미셸이 창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보여줄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그녀의 몸을 보지도 못한다. 이제 레너드에게 남은 선택지는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미셸에게 주기 위해 산 반지를 산드라에게 바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기 위해 산 반지를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것. 이것은 곧 자신의 주체성을 바치는 것이다.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는 이제 그 굴레 속으로 더욱 깊게 들어갈 일만이 남았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새드엔딩인가. 성장 영화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슬픈 엔딩이다. 하지만 사랑 영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해피엔딩으로 보여질 수 있다. 다만 조금 비극적일 뿐이다. 투 러버스. 여기서의 투 러버스는 한 커플 만을 뜻하지 않는다. 투 러버스에는 서로 사랑하는 두 명의 커플이 여럿 등장한다. 그리고 인물들은 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한다.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는 너무나도 비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그 안에 광기를 품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그 광기 안에도 어느 정도의 이성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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