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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Oct 14. 2019

조커 리뷰

악(惡)과 광기의 탄생에 관하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일단 적어도 나는 조커를 보면서 범죄를 미화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이 영화가 아서라는 인물의 삶을 따라가면서 관객들이 그의 감정과 행동에 공감하고 동화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악을 미화하거나 악에 도취되는 느낌은 없었다. 한 가지 더. 조커는 서사적으로 특별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우리가 이전에 충분히 많이 봐왔던 형태이고 개연성 역시 충분히 예상 가능한 형태로 흘러간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주는 강렬함이 있다면 그것은 와킨 피닉스의 소름 돋는 연기와 영화의 주제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조커에서의 와킨 피닉스의 연기는 그 자체로 영화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광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내적으로는 자기파괴적이면서 허물어진 내면을 안고 가는 모순된 인물을 연기를 주로 해왔던 와킨 피닉스 특유의 스타일은 조커에서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나에게 와킨 피닉스 최고의 연기는 마스터에서의 연기이지만 그의 연기 스타일을 가장 잘 드러낸 영화를 한 편만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조커를 고를 수 있을 만큼의 강렬한 연기이다. 그리고 조커의 주제의식은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현재의 우리가 충분히 공감하고 질문할 여지가 많은 주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조커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아서는 한 번도 특별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목적을 위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도 정치를 잘 모른다고 선언한다. 이는 사회 전체를 혼란 속으로 빠트리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확연하게 대비된다. 아서가 저지르는 폭력은 모두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폭력이다. 그가 최초로 저지르는 폭력은 지하철에서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금융 회사 직원 세 명을 총살한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저지른 폭력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고담시의 분노를 분출시키는 원인이 된다. 후반부에 머레이를 살해하는 것도 시위를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복수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아서의 의도와는 반대로 그의 행동은 어느새 사회 전체의 폭력을 촉발시킨다. 하지만 아서의 모든 폭력이 조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것과 랜들을 살해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어머니와 랜들을 살해한 것은 온전히 그의 개인적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 회사 직원들과 머레이를 살해한 것은 그의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 상류층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의 폭력으로 변질된다. 아서는 금융 회사 직원들에게 폭행을 당하기 전 유사한 형태의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그는 동네 아이들에게 강도를 당하고 그 과정에서 구타를 당한다. 만약 이때 아서가 총기를 꺼냈다면 이것은 오로지 자신을 방어하는 차원에서의 폭력에 머무를 것이고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또한 아서가 특별한 명분 없이 금융 회사 직원들을 살해했다면 관객들은 그의 행동에 공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금융 회사 직원들이 아서를 폭행하기 전 한 여자에게 희롱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기에 아서의 살해는 자기방어를 넘어서 상류층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담시는 미화원의 파업으로 인해 쓰레기가 처리되지 못하고 길거리에 쌓여가고 있는 상태이다. 그만큼 고담시는 상류층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서 역시 길거리의 쓰레기처럼 내면의 분노와 광기가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쌓여가는 상태였다. 그것이 어느 순간 한번에 터져 나오게 되고 그러면서 아서는 조커라는 영웅이 된다.



3. 아서는 종종 이유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처음에는 그것이 병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것은 어린 시절 학대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아서는 페니의 친아들이 아닌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서를 입양할 당시부터 페니는 망상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도 토마스 웨인이 아서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페니의 그러한 망상은 곧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다. 동시에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는 현실 부정의 결과물이다. 아서의 웃음 또한 유사하다. 아서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대다수의 상황은 그에게 부당한 일이 생기는 때이다. 그는 자신에게 불합리한 일이 생겨도 분노를 표출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분노를 할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웃음은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억제된 분노와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측면에서 페니의 망상과 유사하게 보인다. 또한 아서 역시 페니처럼 망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그는 머레이의 토크쇼를 보다가 자신이 토크쇼에 출연하는 상상을 한다. 이는 후반부에 실현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양상으로 실현된다. 이때 영화는 현실과 상상을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기 위해 상상의 장면에 현실을 개입시키거나 반대의 방법을 쓰면서 둘 사이를 구분하는 반면 조커에서는 그러한 방식의 편집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상상에서 현실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그것이 상상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방식의 편집은 아서가 토마스를 만났을 때 한번 더 등장한다. 아서가 토마스에게 얼굴을 가격당한 뒤 토마스가 프레임을 벗어나자 갑자기 쇼트가 바뀌며 아서의 집으로 공간이 바뀐다. 아서가 머레이의 토크쇼에 나가는 상상을 한 뒤 현실로 돌아올 때와 거의 유사한 방식의 편집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아서가 토마스를 만나는 과정은 전부 망상인 것일까? 하지만 이는 누가 보더라도 현실이다. 여기서의 망상의 기준은 현실과 상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에 있다. 아서가 머레이의 토크쇼에(적어도 상상했던 방식으로) 나가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아서가 토마스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상류층을 위한 극장이다. 그에게도 상류층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는 존재한다. 토마스를 만났을 때 자신이 토마스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곧장 부정 당한다. 설령 그가 혈연적으로 토마스의 친아들이 맞을지 언정 두 사람은 엄연히 다른 계급에 속해 있다. 그래서 아서는 토마스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 한들 될 수가 없고 상류층에 속하고 싶어도 속해 있을 수 없다. 이때 아서가 느끼는 감정은 망상과 현실 사이의 커다란 낙차이다. 영화는 망상에서 현실로 한 순간에 돌아오며 이 낙차를 강조한다. 아서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망상은 결국 그의 분노와 광기의 원인이 된다.


4. 페니는 아서의 친어머니가 아니지만 아서에게 이러한 분노와 광기를 물려주었다. 그렇기에 페니는 아서의 정신적인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서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영화에서는 아서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아서가 페니의 편지를 처음 보았을 때는 토마스 웨인이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병원에서 페니의 입양신청서를 확인한 이후에 비로서 토마스 웨인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혈연적으로는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하게 된다. 혈연적인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점은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일치한다. 다만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모든 부분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것과는 다르게 아서는 혈연적 근원은 알 수 없어도 조커라는 자아의 근원은 알 수 있다. 토마스는 고담시 시민들을 광대로 비하하는 말을 한 뒤에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그 발언으로 인해 고담시에는 수많은 광대가 나타난다. 그의 오만하고 권위주의적인 발언은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시켰고 이러한 분노는 곧 조커를 탄생시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토마스는 아서의 정신적인 아버지가 된다. 즉 조커는 부당하고 억압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어머니)와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낸 지배층에 대한 분노(아버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렇게 탄생한 조커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죽인다. 어머니는 자신이 직접 살해하고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살해한다. 같은 계급에 있는 어머니는 직접 살해하지만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아버지는 사회의 분노가 대신 처단한다. 이로서 조커는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만든 이들에게 복수를 행한다.



5. “난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코미디였어.” 조커에서 가장 강렬한 이 대사는 자연스럽게 찰리 채플린의 명언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의 인생은 멀리서 지켜보면 그저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에 불과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보면 그의 삶은 고통으로 얼룩진 비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서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관객인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비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그의 삶은 그저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아서가 존경하는 머레이는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을 내보내면서 그를 조롱한다. 머레이는 왜 아서가 스탠드업 코미디 도중 혼자 웃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해나 배려 없이 그저 방송의 재미를 위해 아서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아서의 사장 역시 그가 강도를 당했을 때나 아동병원에 총기를 가져갔을 때 그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고 제멋대로 그를 규정한다. 이렇게 아서는 타인으로부터 제대로 이해나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머레이의 방송에서 “이 사회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어.”라고 한탄한다. 그래서 랜들을 살해할 때도 자신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게리는 살려준다. 아서는 세상으로부터 이해 받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방식은 바로 코미디이다. 코미디는 조크(Joke)을 통해 남을 웃게 하는 것이다. 이때의 웃음은 그 조크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아서의 조크에는 아무도 웃지 않는다. 그저 그에 대한 비웃음만이 되돌아올 뿐이다. 아무도 그의 삶과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고 그저 조롱할 뿐이다. 그러자 아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분노와 폭력이다. 조커라는 이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카드 게임에서의 조커이다. 여기서 조커는 카드 게임에서 변수의 역할을 하면서 게임에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다크 나이트에서의 조커는 이런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조크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조커(Joker)이다. 아서는 분노와 폭력을 통해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광대로 만든다. 광대는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폭력으로 자신만의 조크를 만들어낸 아서는 이제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진정한 광대이자 조커가 된다. 그리고 극의 종반부. 아서는 갑자기 웃는 자신에 대해 왜 웃느냐고 묻는 상담사에게 “웃긴 농담이 생각났거든.”이라고 말한다. 그게 뭐냐고 상담사가 묻자 아서는 “당신은 이해 못 할거야.”라며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이제 타인에게서 이해 받는 것을 포기한다. 어쩌면 그가 조커가 되면서 사람들에게 이해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 조커를 보고 열광한 사람들은 아서의 삶을 지켜보고 그에게 공감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가 저지른 폭력만을 본 것이다(그 중에서도 지배층에게 저지른 폭력만이 관심을 받는다). 그렇기에 영화 내에서 진정으로 그의 삶과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굳이 찾자면 그의 어머니인 페니와 게리 정도를 뽑을 수는 있을 것이다). 아서는 영화에서 총 세 번의 망상을 겪는다. 앞서 말한 두 가지 망상 이외에도 중요한 망상이 남아있다. 바로 소피에 관한 망상이 그것이다. 아서는 소피를 만난 후 그와 연애를 하는 듯한 망상에 사로잡힌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의미이다. 아서의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이해 받고자 한다. 이는 사실 실현 불가능하지 않은 망상이다. 하지만 가장 실현 가능할 법한 상상마저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 그는 끝까지 아무에게도 이해 받지 못한다. 이러한 이해의 부재가 결국 조커를 탄생시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서는 바닥에 피를 묻히며 걸어간다. 그리고 복도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며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 이전에도 아서가 쫓기는 장면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든 조커가 된 이후에도 그는 언제나 쫓기며 살 것이다. 아무도 그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으니 말이다.


6. 누군가는 조커가 폭력에 매혹되어 있고 악을 너무 아름답게 그려낸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계단 춤 장면이 이를 잘 나타낸다. 아서가 극 중에서 처음으로 춤을 추는 때는 늦은 밤 집에서 홀로 춤을 출 때이다. 그때 아서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상상을 하며 총을 쏜다. 그리고 금융 회사 직원을 살해한 후 화장실에서도 춤을 춘다. 악을 상상하거나 저지른 후 춤을 추는 것은 곧 악에 심취해 가는 과정이다. 아서가 계단에서 춤을 출 때는 페니와 랜들을 살해한 후이다. 그때 아서는 계단에서 내려가고 있다. 이전에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들은 쓸쓸하고 공허한 느낌으로 담겼다. 악에 심취하는 것은 곧 전락을 의미한다. 이때의 전락은 비록 하강이지만 아름답게 묘사된다. 악에 빠져드는 것은 그만큼 강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이것을 보고 악을 너무 아름답게 미화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그저 인물의 심리적인 진실을 담아낸 것이다. 여기서의 악이 아름답게 묘사된다고 해서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어떻게 한 인물이 악에 빠져드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이해와 공감의 첫 걸음이다. 조커는 이해와 공감의 부재로 탄생했다. 그래서 영화는 아서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이해의 노력마저 사라질 경우 개인의 저항은 사회적 폭력으로 변질되고 언제든지 조커가 나타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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