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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Oct 28. 2019

행복한 라짜로 리뷰

아름답고도 쓸쓸한 우리 시대의 우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한 가지 의문. 우리는 영화에서 과연 행복한 라짜로를 본 적이 있는가? 이 제목은 반어법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라짜로의 순진무구한 얼굴은 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판단도 머뭇거리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그는 언제나 행복한 것처럼 보이고 반대로 언제나 불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라짜로는 우리의 판단을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성자를 다루는 수많은 영화에서는 성자를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로 그리는 것에 반하여 행복한 라짜로에서 라짜로는 분명히 성자이지만 그에게서 성자로서 존귀함과 같은 느낌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끝에 가면 라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만이 남아있게 된다. 사실 성경에서 나사로(라짜로)는 분명 행복한 존재이다. 그는 예수의 기적을 통해 죽음에서 부활하였고 그 자체로 예수의 부활의 전조이면서 증거가 되었다. 영화에서도 라짜로는 분명 기적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기적은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외로운 기적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킬 때는 그의 제자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이 이를 직접 목격했고 예수의 부활과 승천도 그의 제자들이 경험하여 성경에 기록했다. 그러나 라짜로가 부활할 때는 아무도 그를 보지 않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사로와 예수의 부활은 누군가 이를 직접 경험했고 사람들에게 전파했기에 (적어도 성경 안에서는) 사실이 되지만 라짜로의 부활은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그저 우화로만 남는다.


2. 행복한 라짜로에는 두 가지 서사가 공존한다. 사실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현실의 서사와 현실의 서사와 대비되는 우화의 서사이다. 극의 초반부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인비올라타는 우화적 공간이다. 이곳 주민들은 현실 세계와 교류가 단절된 이후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인비올라타는 과거에 머물고 있는 공간이면서 그 자체로 우화의 배경이 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우화의 서사에 현실의 서사가 개입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우화적 공간인 인비올라타에 현실의 인물인 후작 부인이 들어오면서 서사가 진행된다. 마을의 주인인 후작 부인은 주민들을 농장에서 착취하며 이익을 챙기는 인물이다. 그리고 라짜로는 그러한 마을 주민들로부터 착취를 당한다. 영화에서 우화는 현실에 의해서 계속 착취당한다. 이는 후반부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우화는 현실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인비올라타에 새로운 우화를 만들고자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후작 부인의 아들인 탄크레디이다. 탄크레디는 극 중에서 계속 새로운 우화를 만드는 인물이다. 제일 처음으로 가짜로 납치극을 벌여 후작 부인의 착취를 끝내고자 한다. 그의 납치극이 가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라짜로 혼자이다. 납치극이라는 새로운 우화를 통해 현실의 서사가 더 이상 우화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작 부인은 이 납치극이 가짜라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챈다. 결국 현실의 서사를 물러나게 하려고 했던 탄크레디의 계획은 실패한다. 탄크레디는 라짜로의 기원까지도 우화로서 창조한다. 부모님이 누구냐는 질문에 라짜로는 부모님이 누군지 모른다고 답한다. 그러자 탄크레디는 본인과 라짜로가 배다른 형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아버지는 같으나 어머니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닌 여호와이다. 예수의 형제들은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다른 이부형제이다. 하지만 탄크레디는 라짜로와 자신의 아버지를 동일시하며 새로운 혈연적 근원을 만든다. 극 중에서는 탄크레디나 라짜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다만 라짜로가 겪은 기적을 통해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신이라는 추정을 할 수는 있다. 라짜로의 아버지가 신이라면 배다른 형제인 탄크레디의 아버지 역시 신일 것이다. 그런데 탄크레디는 자신의 아버지가 난봉꾼이었고 강가에서 빨래하고 있던 라짜로의 어머니에게 수작을 걸어 라짜로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라짜로는 불륜을 통해 태어난 인물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우화는 성경에서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은 것을 과격하게 비틀어 재창조한 우화이다. 라짜로와 탄크레디는 각각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두 인물의 위치는 전혀 다른 곳에 놓인다. 라짜로의 어머니는 라짜로와 마찬가지로 우화적인 인물이다. 탄크레디가 만들어낸 우화를 제외하면 라짜로의 어머니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탄크레디는 현실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은 현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탄크레디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우화를 만들 수 있다. 우화는 최소한의 현실이 바탕이 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다. 그렇기에 탄크레디는 능동적으로 우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우화를 창조할 수는 있어도 우화는 현실을 창조하지 못한다. 우화는 그저 이야기로서 받아들여질 뿐이다. 라짜로가 탄크레디와 달리 수동적인 인물인 이유는 그가 우화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라짜로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우화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탄크레디가 자신의 혈연을 우화로서 재창조하여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



3. 탄크레디는 계속해서 어머니를 속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후작 부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납치되었다고 테레사에게 말한다. 끊임없이 현실을 밀어내고자 하는 우화의 저항.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전혀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 탄크레디의 전화를 받은 테레사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경찰이 인비올라타에 찾아오게 된다. 이제 현실의 서사는 우화의 서사에 개입하는 것을 넘어서 우화를 집어삼키게 된다. 인비올라타에 찾아온 경찰은 후작 부인의 착취를 알아내고는 마을 주민들을 인비올라타에서 도시로 이주시킨다. 마을을 빠져나온 뒤 건너야 하는 얕은 강을 두고 겁을 먹은 주민들을 향한 경찰의 외침. “왜 그래요? 물길이 갈라지길 기다려요?” 마치 우화의 종식을 선언하는 듯한 한 마디. 이제 우화의 배경이 된 마을은 죽게 되고 라짜로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라짜로가 죽음을 맞이한 때는 경찰의 헬기가 인비올라타에 나타날 때이다. 즉 현실이 우화를 완전히 장악할 때 우화적 인물인 라짜로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제 우화는 끝난 것 인가. 그러나 영화는 갑자기 새로운 우화를 개입시킨다. 안토니아의 입으로 전하는 늙은 늑대를 찾아다니는 성자의 이야기. 무리에서 쫓겨난 늙은 늑대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마을의 가축을 잡아먹고 다니고 마을 사람들은 짐승과 대화할 수 있다는 성자를 찾아가 늑대에게 휴전을 요청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를 받아들인 성자는 늑대를 찾아다니지만 추위와 굶주림 속에 지쳐 쓰러진다. 그리고 똑같이 배고픈 늑대는 쓰러진 성자에게 다가가고 성자에게서 나는 선한 사람의 냄새를 맡는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처음에는 그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던 이 우화는 어느 순간 화면에 늑대가 등장하고 곧 라짜로가 부활하며 실재화 된다. 늑대는 양을 잡아먹는 맹수이다. 하지만 늑대는 악의가 있어 양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를 뿐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양치기 목자로 비유된다. 양을 치는 것은 양이 주인에게 복종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자연은 선한 자에게만 복종한다. 그러니 늑대가 성자를 만나게 된다면 늑대도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제 라짜로는 단순히 나사로의 부활만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까지 함께 체험하는 것이다. 늑대가 라짜로에게 다가가 있는 동안 카메라 역시 라짜로의 옆에서 그를 클로즈업으로 바라보며 그의 성스러움을 극대화한다. 그러다 내레이션이 끝난 뒤 카메라 역시 물러선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라짜로에게 일어난 기적은 그가 스스로 만든 기적이 아닌 그가 선택된 수동적인 기적이다. 예수는 자신의 부활의 의미와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라짜로는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더 이상 성자의 고귀함이 아닌 인간의 무기력함만이 보일 뿐이다. 이제 우화와 현실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부터는 우화의 서사가 현실의 서사에 개입할 차례이다.


4. 부활한 라짜로는 곧장 인비올라타로 향하지만 이미 마을은 사람들이 떠나간 뒤 황폐해져 있다. 예수는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했지만 라짜로는 수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부활했다. 시간은 우화의 성스러움을 점차 약화시킨다. 이때 라짜로는 그곳에서 마을의 물품들을 가져가고 있는 인비올라타 출신의 빈민들과 만난다. 그들은 분명 라짜로를 알고 있었지만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라짜로는 이미 잊혀진 존재이다. 우화의 배경이었던 인비올라타는 죽고 나서도 현실의 빈민들에 의해 착취당한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없다. 길을 따라 내려가던 라짜로는 예전과 똑같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니콜라를 만난다. 본격적으로 우화가 현실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니콜라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기적을 부정하듯이(혹은 거부하듯이) 라짜로를 내쫓는다. 도시로 내려와 빈민들과 합류한 라짜로를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은 성인이 된 안토니아 뿐이다. 기적을 알아본 안토니아는 곧장 무릎을 꿇고 라짜로에게 경배를 바친다. 그러나 아무리 성자라도 이 세계에서 공짜는 없다(“유령이라도 먹으려면 일해야지”). 안토니아와 일행들은 라짜로의 선하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이용해 사기극을 벌인다. 라짜로는 자신도 모르는 새 또 다시 착취당한다. 하지만 라짜로는 성자로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빈민들의 주거지 주변의 풀들이 사실 먹을 수 있는 풀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예수가 물로 포도주로 만든 기적과 같은 것이다. 또한 탄크레디를 위해 제과점에 들렀을 때 50유로만으로 80유로어치의 빵을 산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변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기적.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인 음악이 라짜로와 일행들을 따라오는 것까지. 이런 식으로 우화는 종종 현실에 개입한다. 그러나 잊으면 안 되는 한 가지. 이건 예수가 일으킨 기적과 달리 라짜로가 능동적으로 일으킨 기적이 아니다. 라짜로는 여전히 수동적이다. 라짜로가 능동적인 인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만나야만 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탄크레디이다.



5. 나물을 캐고 있던(착취당하고 있던) 라짜로는 탄크레디의 애완견 에콜레의 안내를 따라간 뒤 탄크레디와 재회한다. 라짜로가 부활할 때는 늑대가 쓰러진 라짜로에게 다가왔으나 이제는 라짜로가 다친 에콜레에게 먼저 다가간다. 본능적으로 성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이다. 탄크레디는 라짜로에게 우화적 근원을 만들어준 인물이다. 비록 라짜로는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그쳤지만 이는 라짜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뒤 주체적인 행위를 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 현실 세계에서도 탄크레디는 자신만의 우화를 만들고자 시도한다. 엔지니어와 만나 인비올라타의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사실 인비올라타는 탄크레디의 소유가 아니다. 엔지니어는 자신을 속인 탄크레디에게 분노한다. 탄크레디는 더 이상 우화를 만들지 못한다. 현실에서 우화는 그저 허풍이고 위선일 뿐이다. 우화를 만들 수 없는 탄크레디는 이제 무기력한 존재이다. 그리고 우화의 세계를 착취하며 부를 유지한 탄크레디의 집안은 현실의 은행에 의해 몰락한다. 우리는 여기서 은행에 집중해야 한다. 왜 하필 은행인가? 후작 부인은 공권력의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공권력이 아닌 민간의 은행이 탄크레디를 몰락시킨 것인가? 빈민들이 탄크레디의 허름한 집을 찾아갔을 때 그들을 만난 테레사는 은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기꾼이죠” 사기. 이건 어쩌면 우화의 또 다른 이름 일지도 모른다. 후작 부인이 인비올라타에서 주민들에게 강의를 할 때 내용은 “지식에 대한 갈증을 버려라”라는 내용이다. 즉 진실을 알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후작 부인은 이를 끊임없이 세뇌시킨다. 그러면 현실 세계는 어떠한가? 현실은 우리에게 뭐라고 세뇌시키는가? 잘 살 수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노력하면 지금보다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끊임없이 세뇌시키고자 한다. 그 세뇌의 절정이 바로 은행이다. 인비올라타의 주민들은 경찰의 안내를 받아 마을을 빠져나오지만 현실 세계에 들어온 뒤에도 바뀐 것은 없다. 피포가 당시 신문을 읽어줄 때 영화는 “농부들에 대한 보상이 요청되었다”라는 말까지만 듣고 다음 씬으로 넘어간다. 보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민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현실 세계로 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약속. 이것은 더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은행과 자본주의의 약속과 다르지 않다.


6. 그렇기에 라짜로와 탄크레디가 우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결국 약자들에 대한 구제이다. 탄크레디는 신의 이름을 팔면서 주민들을 착취하는 어머니에 대항하고자 하고 라짜로는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과 예술을 선물한다. 탄크레디의 집에서 돌아오며 빈민들은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가지만 교회는 비공개 의례라는 이유로 그들을 거부한다. 가장 약자들에 대해 관대해야 할 종교마저 약자를 배척한다. 과거에 종교는 착취의 수단이었고 지금의 종교는 배타적이다. 그러자 그런 교회에 실망했다는 듯이 음악은 라짜로 일행을 따라간다. 하늘에서 마치 라짜로 일행을 축복하는 듯이 울리는 음악. 영화 안에서 울리던 음악은 이제 영화의 배경음악이 된다. 안에서 밖으로 바뀐 음악의 시점. 이것은 관객의 시점인가? 혹은 감독의 시점인가? 아니면 신의 시점은 아닐까? 어쩌면 그 모든 시점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음악을 들은 뒤 라짜로는 일행과 떨어진 뒤 홀로 조용하게 눈물을 흘린다. 어떤 눈물? 기적을 마주한 순간 느끼는 기쁨의 눈물? 약자들에 대한 착취와 무관심이 이어지는 세계에 대한 분노의 눈물? 자신이 성자라는 것을 깨달은 자의 자각의 눈물?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한 성자의 눈물. 이제 라짜로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이제 스스로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라짜로는 은행에 찾아간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보안 시스템이 울리게 되지만 직원들은 고장이니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장이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 라짜로와 같은 성자는 분명 위험한 인물이다. 라짜로가 들어온 뒤 사람들은 그의 주머니에 있는 새총을 총으로 오해하여 겁을 먹는다. 새총은 탄크레디가 라짜로에게 “세상의 모든 후작 부인과 싸우기” 위해 준 것이다. 라짜로는 탄크레디의 말대로 그 새총을 들고 은행으로 간다. 그리고 직원에게 “가능하시다면 탄크레디의 재산 전부를 돌려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한다. 이건 시간을 되돌리고자 하는 행위이다. 우화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를 벗어나 다시 우화가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화를 만들어내는 탄크레디가 다시 원래의 부를 회복할 수 있도록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다. 탄크레디가 부를 회복하면, 그렇다면 다시 우화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약자들도 구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믿음. 하지만 이는 동시에 라짜로의 한계와 무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영화 상에서 라짜로가 행한 가장 적극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행위일 뿐이다. 설령 탄크레디의 재산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시간은 뒤로 가지 않는다. 만에 하나 시간이 뒤로 흘러간다고 해도 여전히 약자들에 대한 착취와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결국 라짜로는 은행에 있던 사람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죽음을 맞는다.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 성자를 스스로 죽이는 약자들. 성자는 철저하게 오해받는다. 현실에 세뇌된 약자들은 부조리와 싸우기 위한 무기인 새총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총으로 오해하고 그를 도둑으로만 여긴다. 분명히 라짜로는 자신에게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음에도, 그리고 총이 사실은 새총이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성찰할 생각이 없다. 니체는 현시대를 신이 죽은 시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은 누가 죽였는가? 바로 우리가 죽였다. 무신론자인 니체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을 창조하였고 더 이상 쓸모 없어진 신을 우리가 죽인 것이다. 그런 우리 앞에 진짜 성자가 나타난다고 한들 우리는 과연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아마 그 역시 라짜로와 비슷한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우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서사에는 우화의 서사가 개입할 수 없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라짜로를 다시 한번 찾아온 늑대. 늑대는 조용히 라짜로의 곁을 떠난다. 그의 우화는 끝났다. 이제 우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카메라는 떠도는 늑대를 누군가의 시점 쇼트로 바라보며 쫓아오는 늑대로부터 멀어진다. 그것은 누구의 시점일까? 관객의 시점일 수도, 감독의 시점일 수도, 혹은 이 세계에 더 이상 희망을 버린 신의 시점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 늑대는 주인을 찾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우리는 행복한 라짜로를 본 적이 있는가? 애석하게도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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