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재 Nov 29. 2019

홀리 모터스 리뷰

영화, 사랑, 연기, 삶의 모든 것에 대한 경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레오스 카락스 영화에는 언제나 기이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이 기이함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결핍.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영화에는 결핍이 존재하지만 레오스 카락스의 결핍은 조금 특별하다. 그의 영화에서 결핍은 결코 채울 수 없는, 공허한 결핍이다.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위해 몸부림 치는 알렉스(드니 라방)의 모습을 차갑게 담아낸 작품이 사랑 3부작(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면 홀리 모터스는 영화에 대한 레오스 카락스 본인의 결핍과 공허함을 담아낸 작품이다. 그의 영화에서 결핍은 채우거나 극복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영화의 동력이 된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그 결핍은 채워지지 못하고 남겨진다. 채워지지 못한 결핍은 그저 결핍으로 계속 남게 된다. 결핍이 남겨진 영화는 답을 내며 수렴하지 못하고 질문의 형태로 발산하며 끝을 맺는다. 그렇기에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에는 죽음이 자주 등장한다(죽음은 결핍의 극단이다).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가 신비롭고도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영화적 특색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작품이 바로 홀리 모터스일 것이다. 


2. 홀리 모터스는 첫 장면부터 기이하게 시작한다. 원시적인 형태의 초기 동영상이 화면에 나온 뒤 극장에서 자고 있는 듯한 관객들의 모습이 보이고 동시에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의 소리와 극장 바깥에서 자동차와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이때 두 가지의 충돌이 발생한다. 사운드와 이미지. 정적으로 멈춰있는 이미지와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운드. 이로서 두 번째 충돌이 생긴다. 움직임과 멈춤. 스크린에서는 영화가 움직이고 있고(이때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킹 비더의 <군중>이다) 바깥에서는 자동차와 배가 움직이고 있다. 반면 극장 안의 관객들은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레오스 카락스가 극장 안으로 들어와 죽어 있는 듯한 관객들을 보게 된다. 그 죽어 있는 듯한 관객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다니는 아기와 개. 다시 한번 움직임과 멈춤이 충돌한다. 이 프롤로그는 두 가지 결핍을 보여준다. 관객에 대한 결핍. 앞에서 분명히 영화가 상영되고 있음에도 더 이상 그 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있는 관객들을 보며 레오스 카락스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도 더 이상 영화의 진정한 가치에 관심을 잃은 최근 관객들에 대한 탄식이 아닐까? 또 다른 결핍. 움직임에 대한 결핍. 멈춰 있는 관객들, 그리고 움직임을 잃은 관객들과 현대 영화들에 대한 탄식과 초기 영화가 갖고 있었던 활기에 대한 경외심. 이 두 가지 결핍이 만나면서 홀리 모터스의 영화적 동력이 완성된다. 



3. 홀리 모터스에는 시종 죽음의 기운이 감돈다. 오스카가 연기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은행원은 (자신이 직접 연기한)괴한에게 총을 맞아 죽고 테오를 암살하면서 알렉스 역시 같은 곳에 칼을 찔려 죽어가고 보강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멈춰있는 상태의 극단이다. 홀리 모터스에서 레오스 카락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첫 번째로 연기한 할머니는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음에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보강은 죽어가면서 “죽는 것도 좋긴 하지만 그럼 사랑도 없잖아”라고 말한다(사랑은 곧 감정의 움직임이다). 오스카의 캐릭터들은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때의 움직임은 초기 영화들의 활기찬 움직임과 맥락을 함께한다. 레오스 카락스는 이 영화에서 내내 초기 영화의 순수한 움직임에 경배를 바친다. 오스카가 연기한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죽음과 동떨어져 있으면서 가장 수동적인 인물은 CG 특수 촬영을 연기하는 캐릭터이다. 이때의 캐릭터는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 우스꽝스러운 액션들을 연기한다. 그 뒤에 또 다른 여성 인물이 연기를 위해 들어오면 오스카와 여성이 서로 춤을 추듯이 연기하고 카메라가 패닝하여 특수 촬영된 결과물을 보여준다. 이때 다시 한번 충돌이 발생한다. 스크린과 스크린 밖. 스크린에서는 특수 촬영의 결과물로서 두 괴물을 교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만 스크린 밖에서는 두 배우의 우스꽝스러운 연기만이 있을 뿐이다. 레오스 카락스를 이를 통해 현대 디지털 영화에 대한 탄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가장 사실적이고 활기차다고 여겨지는 디지털 영화의 실체를 그대로 나타내며 초기 영화의 역동성을 잃은 현대의 디지털 영화에 대하여 한탄한다. 이 시퀀스는 다음 시퀀스인에서의 광인과 대비된다. 광인은 특수 촬영을 위해 러닝 머신을 뛸 때의 배경과 유사한 녹색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광인은 특수 촬영의 캐릭터와는 다르게 역동적이고 능동적이다. 또한 특수 촬영된 영상에서 괴물들의 교합과 달리 광인은 자신의 벗은 몸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광인은 서서히 잠들어간다. 자신이 납치한 모델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드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멈추는 것의 극단이다. 광인과 모델은 확연히 대비되는 캐릭터이다. 광인은 계속 능동적으로 움직이지만 모델은 언제나 수동적이며 멈춰있다. 광인은 추(醜)를 상징하고 모델은 미(美)를 상징한다. 광인은 사람들이 아름답거나 귀하다고 여기는 꽃이나 돈, 머리카락 등을 먹는다. 광인이 미(美)를 상징하는 다른 것들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면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레오스 카락스는 우리가 추하다고 여기는 것들도 그 나름의 활력과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면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광인이 잠들어 간다. 옷을 모두 벗고 마치 자장가를 듣는 아기처럼. 움직이지 않는 아름다운 모델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결국 아무리 역동적인 광인이라고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모델은 계속 아름답게 살아갈 것이다. 움직임에 대한 레오스 카락스의 결핍은 결국 채워지지 못한다. 


4. 홀리 모터스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가장 중요한 홀리 모터는 리무진일 것이다. 리무진은 극 중에서 극장이면서 영사기이기도 하며 오스카의 분장실이다. 리무진은 일반적인 차에 비해 크기가 크고 관리가 불편한 차이다. 그렇기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리무진은 한편으로는 부를 상징하고 고귀한 차이기도 하다. 만약 리무진을 카메라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현대에 들어와서 카메라는 점점 작아지고 경량화 되었다. 반면 과거의 카메라는 크기도 크고 훨씬 무거웠다. 리무진을 탄다는 것은 과거의 크고 무거운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동시에 그런 크고 무거운 필름 카메라로 영화를 찍었던 시대에 대한 향수와 그런 카메라로 찍은 영화들에 대한 경외심을 바치는 것이다. 리무진은 주차장에 가기 전까지 끊임없이 파리 시내를 돌아다닌다. 오스카가 리무진 이외의 차를 타는 것은 딱 한 번 앙젤의 아버지를 연기하는 때이다. 오스카는 앙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앙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을 알게 되고 곧 앙젤이 파티에서 화장실에서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화를 낸다. 오스카는 단순히 딸의 거짓말에 화난 것이 아니다. 그는 딸이 숨어있었다는 것,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 있었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영화에 대한 감독의 탄식이 투영된 것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초기 영화에 비하여 움직임이 사라진 현대 디지털 영화에 대한 탄식. 그리고 마치 이를 해소하려고 하듯이 이어지는 막간. 손을 움직이는 모습의 초기 형태의 동영상이 나온 뒤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오스카와 그 뒤를 따르는 악단들. 이러한 막간은 과거의 영화 상영 형태를 떠올리게 만들며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 그리고 오스카와 악단들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왜 하필 막간에 이런 장면을 넣었는가? 우리는 잠시 레오스 카락스의 이전 작품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나쁜 피>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두 영화에서는 영화의 중간 중간에 검은 화면이 갑자기 나타날 때가 있다. 이때의 검은 화면은 주인공의 결핍과 공허함, 그리고 인물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이것이 감정이 때때로 아무 예고 없이 불현듯 나타나는 것처럼 주인공의 상태가 영화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홀리 모터스에 나오는 초기 형태의 동영상이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동영상들은 모두 움직임에 관한 것으로 움직임에 대한 레오스 카락스의 경외심을 반영하는 장치이다. 막간은 이러한 방식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다. 움직임이 사멸해 가는 현대의 영화에서 움직임에 대한 경외심이 영화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장면이 바로 한 남자가 오스카의 리무진에서 오스카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여기서 남자는 감독 스스로의 자문자답을 위하여 서사의 바깥에서 개입한 인물이다. 남자가 오스카에게 당신의 연기를 못 믿겠다는 불평이 있다고 말하자 오스카는 카메라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육중했던 카메라가 이제는 머리보다 작아져서 연기를 못 하겠다는 이상한 핑계. 사실상 디지털 영화에 대한 감독의 탄식이 또 다시 드러나는 것이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오스카에게 묻는다.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오스카가 연기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말하자 남자는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며 “보는 사람이 없어지면요?”라고 물은 뒤 사라진다. 프롤로그에서 드러났듯이 현재의 관객들은 연기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관객들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는가? 남자가 사라진 뒤 셀린은 오스카에게 아름다운 파리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스크린에 자동차 밖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데 스크린에는 마치 CG처럼 녹색의 파리의 풍경이 나온다. 마치 CG 특수 촬영의 배경처럼. 여기서 파리의 풍경은 자동 연출된 디지털 영화와 같은 것이다. 극 중에서는 오스카가 리무진의 스크린을 보는 장면이 총 세 번 나오는데 첫 번째로 볼 때는 한낮의 파리의 풍경이 있는 그대로 나온다. 두 번째로 볼 때는 녹색의 풍경이 나오고 세 번째로 볼 때는 열화상 카메라로 찍힌 파리의 풍경이 나온다. 또 다시 스크린과 스크린 밖이 충돌한다. 스크린 밖에는 아름다운 파리가 펼쳐져 있지만 스크린에는 기괴한 모습으로 찍힌 파리가 나온다. 여기서 낮과 밤의 대비를 주목해야 한다. 낮이 끝나고 밤이 깊어가는 것. 하루가 끝나가는 것이고 하루가 죽어가는 것이다. 활기찼던 낮이 사라지면 적막한 밤이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이 현재의 관객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영화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레오스 카락스는 디지털 영화에 대한 탄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무기력함 또한 담아낸다. 아무리 탄식하고 과거를 그리워한다고 한들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오스카의 일정이 끝나고 셀린이 주차장에 리무진을 주차하고 떠난 뒤 리무진들이 대화한다. 그 대화에서 리무진들은 자신들이 결국 폐차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멘”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그렇게 관객과 영화에 대한 레오스 카락스의 결핍 역시 채워지지 못한 채 끝나게 된다. 



5. 홀리 모터스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에 관한 영화이면서 연기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오스카가 연기하는 9명의 캐릭터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리무진을 타고 가던 오스카는 자신이 연기했던 은행원 캐릭터를 보고 괴한으로 분장하여 은행원을 죽인다. 그리고 한 마디. “드디어 정리됐군”. 경호원들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 오스카를 일으키며 셀린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용서하세요. 약간의 혼동이 있었네요”. 어떤 혼동? 정체성의 혼동. 배우로서 여려 인물들을 소화하면서 생기는 정체성에 대한 혼동. 이러한 혼동이 외부로 표출될 때 사람들 역시 혼동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배우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레오스 카락스는 극 중에서 현실과 연기의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오스카가 연기한 광인 캐릭터는 레오스 카락스가 2008년 찍은 옴니버스 영화 <도쿄!>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해당 시퀀스와 <도쿄!>에서 레오스 카락스의 단편은 촬영 방식이나 스토리가 매우 유사하다. 또한 후반부에서 셀린을 연기한 에디뜨 스콥이 녹색 가면을 쓰는 것은 과거 자신이 출연했던 <얼굴없는 눈>의 캐릭터를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배우들의 과거를 영화에 그대로 차용하면서 연기와 현실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현실의 우리도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어떤 오스카가 진짜 오스카인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 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켜본 모든 오스카가 진짜 오스카일 테니. 


6. 어쩌면 홀리 모터스는 사랑에 관한 영화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별한 레오스 카락스의 연인인 예카테리나 고루베바의 사진이 이런 질문을 유도한다. 단순히 애인에 대한 사랑만이 아닌 영화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다. 진과의 시퀀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일 될지도 모른다. 오스카가 진과 뮤지컬을 연기하는 장소는 <퐁네프의 연인들>에 나왔던 사마리땡 백화점이다. 백화점 안에는 마네킹들이 널브러져 있고 백화점은 폐업한 상태이다. 이것은 영화의 죽음일 수도 혹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일 수도 있다. 오스카는 옥상에서 진에게 둘에 관하여 진이 모르는 것이 있지만 시간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떠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결국 시간의 마법이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되돌리기 위하여 레오스 카락스는 해당 시퀀스를 통해 잠시나마 잃어버린 자신의 사랑을 마주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시간을 한정되어 있다. 오스카와의 대화가 끝난 뒤 진은 에바 그레이스의 복장을 입고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때의 죽음은 진의 죽음인가, 아니면 에바 그레이스의 죽음인가? 혹은 이 죽음은 연기인가, 실제인가? 그 구분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이다. 오스카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가 오스카의 일부이듯이 에바 그레이스 역시 진의 일부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오스카는 비명을 지르며 리무진으로 뛰어들어간다. 허망한 표정의 오스카를 보여준 뒤 나타나는 열화상 카메라 속의 파리. 그리고 특수 촬영 당시 쓰였던 모션 캡처 불빛들 밑에 있는 오스카. 사랑의 죽음은 곧 영화의 죽음이다. 사랑이라는 동력을 잃은 오스카는 이제 모션 캡처 촬영 당시의 캐릭터처럼 죽음을 향해가는 수동적인 인물이 될 것인가? 움직임을 가진 영화는 모두 죽고 이제 디지털 영화만이 남을 것인가? 그럼에도 레오스 카락스는 일말의 희망을 남기고자 노력한다. 자정이 되기 전 웃기 위해 셀린과 오스카는 유머를 던지고 오스카는 원숭이들의 집으로 들어간다. 원숭이들은 활기차게 움직인다. 아무리 죽을 것만 같아도 인간은 움직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어쩌면 홀리 모터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자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경외심을 바치는 영화이다. 홀리 모터스가 걸작인 이유는 독창적인 형식과 내러티브 뿐만이 아니라 두텁고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층위 때문일 것이다. 홀리 모터스는 아무런 정답도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은 어떤 홀리 모터스를 봤는가? 당신은 어떻게 홀리 모터스를 봤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한 라짜로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