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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Dec 20. 2019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리뷰

삶을 짓누르는 시간의 무게에 관하여 

*이 글에는 특별한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결말과 일부 장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관람에 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니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시간의 흐름이란 “세계와 나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일 뿐이다(p. 355).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시간의 흐름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했을’때에만 비로서 지각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이 과거의 순간과 관계를 맺을 때, 즉 우리 주변의 것들이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던 그 순간과 비교되었을 때이다.” – 크리스티앙 메츠,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 2> (이수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1. 영화와 문학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수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나에게 하나만 뽑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고 소설은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 다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엄연히 영화는 극장 상영에 최적화된 예술이다. 반면 소설은 장소의 제약이 거의 없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소설은 독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원할 때마다 읽는 것을 멈출 수도 있고 원하는 부분만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볼 때 관객은 객체로서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미지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체험하는 예술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소설은 공간적 재현이 중요한 예술이다. 소설을 읽으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텍스트 만을 보고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 영화는 공간의 재현보다 시간에 대한 묘사가 중요하다. 영화에서의 시간은 두 가지가 있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시간인 디제시스적인 시간. 다른 하나는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이 실제로 느끼는 실제적 시간. 영화가 시간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디제시스적인 시간과 실제적 시간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줄이고 관객이 영화의 시간을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어쩌면 후 보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은 이러한 영화적 시간의 체험을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는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를 보며 3시간 54분이라는 장대한 시간 동안 인물들과 함께 그 시간을 체험했다. 단순한 시간이 아닌 인물들을 짓누르는 삶의 거대한 고통, 그 고통의 거대한 무게감을 함께 느낀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함께 견디도록 하는 영화이다. 


2. 아마도 어떤 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하다는 인상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카메라가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그 인물의 동선을 롱테이크의 긴 호흡으로 따라가는 촬영은 내내 답답하다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카메라는 인물에 초점을 두고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여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왜 이런 촬영 방식을 사용한 것인가? 만약 카메라가 딥 포커스로 배경을 선명하게 했다면 그로 인해 공간적 깊이가 발생하고 관객은 인물이 아닌 배경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오직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서 관객은 인물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관객은 인물의 시간과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카메라의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단순한 관찰자의 시점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인물에 가까이 있다. 이 영화에는 단 한번도 누군가의 시점 쇼트가 나오지 않는다. 또한 쇼트와 리버스 쇼트 역시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시점 쇼트의 성립이 불가능하다. 시점 쇼트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인물이 선행해야만 하는데 그러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 이 카메라는 누구의 시점인가? 이 시점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이는 영화의 시점이다. 영화적 체험을 온전히 완성시키기 가장 적합한 시점을 후 보 감독은 찾은 것이다. 오로지 인물에게만 집중하게 만드는 촬영을 통해 감독은 디제시스적인 시간과 관객이 실제로 느끼는 실제적 시간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 하면서 영화적 체험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3. 후 보 감독이 촬영과 함께 영화적 시간의 체험을 선사하는 또 다른 방식에는 편집이 있다. 이 영화에는 종종 비경제적으로 보이는 편집 방식이 나타날 때가 있다. 한 가지 예. 친구의 아내와 함께 방안에 있던 위청을 보여주던 영화는 위청의 친구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장면까지 보여준 뒤 컷을 바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와 친구가 방안에 있는 위청을 보고 자살하는 씬이 등장한다. 하나의 공간에서 두 개의 다른 씬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편집 방식이다. 그러나 저 두 개의 씬은 엄연히 다른 씬이다. 왜? 위청의 친구가 방안에 들어오기 전과 후의 방은 다른 공간이다. 그리고 친구가 방안으로 들어오기 전과 후에 위청이 느꼈을 시간은 다른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시간의 흐름은 전혀 달라진다. 세계와 나의 관계가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간의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공간의 변화가 있어야만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다. 후 보 감독은 이를 파악한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공간에서도 그 공간이 변할 때 인물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 위청이 웨이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웨이부는 한 건물에 쪽지를 붙이고 도망간다. 컷이 바뀐 뒤에 황링이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자신과 원조 교제 하는 부주임 교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 웨이부가 창문에 쪽지를 붙이고 도망가는 씬이 이어진다. 이건 시간의 흐름을 역행한 편집이다. 순행하던 시간의 흐름을 다시 뒤로 돌려 같은 장소에 있던 다른 인물로 시점을 옮긴 것이다. 이번에는 같은 공간에 있는 인물들의 시간을 배열한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인물이 같은 시간을 체감하는 것은 아니다. 웨이부에게는 웨이부만의 시간이 있고 황링에게는 황링만의 시간이 있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가 우리에게 영화적 시간의 체험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독의 이해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4.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에서 코끼리는 무엇인가? 제목에 들어간 코끼리를 본 뒤 혹자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를 떠올릴 수 있다. 두 작품은 실제로 형식적으로도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에서의 코끼리와 <엘리펀트>에서의 코끼리가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두 영화는 모두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중요한 작품이다. <엘리펀트>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축에 두고 그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각기 다른 시간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즉 여기서 코끼리는 맹인의 손길로 만져지는 코끼리이다. 그러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에서는 모든 인물에게 공유되는 사건이 없다. 위솨이의 죽음이 어느 정도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인물이 연관된 것도 아니다. 극 중에서 언급되는 코끼리는 만저우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는 코끼리이다. 그러나 정작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마지막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코끼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왜 인물들은 만저우리에 가서 코끼리를 보고자 하는가? 만저우리의 코끼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극 중에 등장하는 네 인물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왜? 살기 위해서.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실존적 증거이다. 다시 말해 죽지 않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코끼리는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마음 속에 내재된 무력감 그 자체이다. 그 코끼리를 깨워야 한다. 언제 코끼리가 깨어나는 가? 마지막 장면에서 웨이부는 버스에 탔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기를 찬다. 황링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말한 그 제기. 그러나 그 제기를 함께 차는 순간 코끼리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저 움직이기만 한다고 코끼리는 깨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모여 움직일 때, 각자의 고통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공유의 감정이 되는 순간 코끼리가 깨어난다. 마치 <매그놀리아>에서 인물들이 모두 Wise Up을 부르는 장면처럼. 이제 코끼리가 깨어났으니 영화는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함부로 희망을 말하지도 않지만 절망에 빠진 채로 떠나지도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희망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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