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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Dec 28. 2019

살인마 잭의 집 2차 리뷰

자아 분열과 자기 파괴, 그 혼돈으로 지은 집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전작 <님포매니악>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두 작품은 형식적으로 한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내용상으로는 세상의 상식과 통념에 정반대되는 인물이 자신의 믿음을 실천해 나간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보인다. 두 주인공은 모두 자신의 행위에서 통념을 제거한다. <님포매니악>의 조는 섹스에서 사랑과 감정을 제거하고, <살인마 잭의 집>에서 잭은 살인에서 죄의식을 제거한다. 조가 섹스의 양이 아닌 다양성을 중요시 하듯이, 잭 역시 살인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그에게는 같은 살인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따라서 다른 살인이 된다. 그러나 <살인마 잭의 집>이 <님포매니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주인공이 남자라는 점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그 중에서 우울 3부작(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비는 영화의 핵심 그 자체이다. 여성은 위악적이지만 숭고하고 남성은 위선이면서 무지하다. 남성은 이성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일정한 틀로 규정지으려 하고 여성은 이러한 남성에 반대하며 그러한 틀을 부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특성은 창작자인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우울증과 자기 분열이 인물에 투영된 것인 동시에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남성의 이름으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동시에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개별적 존재에게 가해진 폭력을 뒤틀어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살인마 잭의 집>은 이를 다시 한번 뒤집는다. 이번에는 남성이 주인공이다. 이는 지금껏 자신이 만들어온 세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과연 자기 부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2.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잭이 버지와 함께 지옥으로 가고 있다. 잭이 버지와 대화를 해도 되냐고 묻자 버지의 답. “끝까지 한마디도 않는 객은 드물다네. 이 여정에 오른 인간들은 기이하고 난데없는 고해 욕구를 느끼지”. 그러면서 충고 한 가지. “다만 자네의 이야기만이 남다를 거란 착각은 하지 말게”. 잭은 왜 지옥으로 가고 있는가? 죄를 지었으니 가는 것이다. 무슨 죄를 지었는가? 기독교적 사고에서 벗어난 행위. 단테의 <신곡>을 떠올리게 하는 버지와의 여정은 철저히 기독교적 전통 안에 사로잡혀 있다. 기독교적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자를 기독교적 방식으로 처벌 하는 것. 버지는 이때부터 이미 실패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잭의 고해. 12년간 저지른 살인들 중 5가지 살인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들려준다. 첫 번째 살인은 차를 타고 가던 중 고장난 잭을 고쳐달라고 말하던 여성을 살인한 이야기이다. 우연인지 아닌지, 여성이 들고 있는 고장난 도구의 이름은 잭이다. 잭을 고치기 위해 낯선 남자와 철공소로 가는 여자. 차를 타고 가던 도중 여자는 잭이 연쇄살인마가 아니냐고 묻는다. 이어서 하는 말. “이 잭을 집어 들고 당신 머리를 쳐야겠어요”. 본인 스스로 살인의 방법을 알려준다. 철공소에 도착한 후 잭이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막고 함께 가고자 한다. 관객을 답답하게 만들 정도로 무지하게 행동하는 여자. 잭을 고치고 난 후 돌아가던 중 하는 말. “연쇄살인범을 못 잡는 이유는 범인과 피해자 사이에 연결 고리가 없어서예요”. 살인의 방법을 넘어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주는 이상한 행위. 잭이 또 다시 부러지자 여자는 다시 잭과 함께 철공소를 향한다. 이때 차에서 하는 말. “했던 말 최소할게요. 연쇄살인마처럼 보인다는 거요. 살인자라기에는 너무 좀스럽잖아요”. 그리고 갑자기 차를 세우는 잭. 이윽고 옆에 놓여진 잭을 들어 여자를 살해한다. 무언가 이상하다. 잭이 살인마가 된 순간은 여성이 자신을 살인마라고 규정하지 않은 순간이다. 규정하는 자는 라스 폰 트리에 영화에서 언제나 남성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성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여성이 자신의 규정을 철회하는 순간 남성은 그 규정을 받아들인다. 라스 폰 트리에는 언제나(특히 우울 3부작에서) 자신의 자아를 여성과 남성으로 분리시켰다. 그러나 <살인마 잭의 집>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자아는 여성과 남성이 아닌 잭과 버지로 분리된다. 여성은 라스 폰 트리에의 세계관 그 자체이다. 남성이 세계와 여성을 규정짓고 틀 안에 가두고자 한다면 여성은 그 규정과 남성에 저항한다. 말하자면 여성은 자신에 대한 규정을 거부하며 역설적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여성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내린 규정은 기독교적 전통에 반하는 존재로서의 규정이다. <님포매니악>의 조가 섹스에서 감정과 사랑을 제거한 것 역시 기독교적 전통을 조롱하는 것이다(기독교에서 섹스는 곧 임신과 출산으로 직결되고, 임신과 출산은 신이 내린 축복이 아닌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신의 벌이다). <살인마 잭의 집>에서 여성이 잭에게 내린 규정은 살인마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기독교 윤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존재. 이러한 규정을 철회하는 것은 곧 자기 부정이다. 자신이 만든 세계가 자신을 부정하는 이상한 아이러니.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미 그런 적이 있다. 자신이 주도한 도그마 운동의 원칙에 입각하여 만든 <백치들>에 정반대 되는 <도그빌>이나 우울 3부작 같은 영화를 통해서 말이다. 이제 라스 폰 트리에는 또 다른 파괴를 시작한다. ‘잭’을 통해서. 고치려고 했지만 고쳐지지 않는 잭. 그 잭으로 살인을 저지른 잭. 그 잭은 영원히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3. 그리고 이어지는 글렌 굴드의 연주. 결벽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행위를 글렌 굴드의 연주와 연결하며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잭(글렌 굴드 역시 결벽증이 있었다). 버지에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잭은 “건축 자재가 지닌 고유한 의지를 그대로 따른 건축물이 가장 아름다운 법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살해 도구인 잭의 고유한 의지를 따라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말한다. 잭(라스 폰 트리에)의 의지는 무엇인가? 파괴하는 것. 그의 예술이 지닌 힘은 파괴하는 힘에서 나온다. 이제 그의 본성이 발현되기 시작할 때이다. 두 번째 살인. 잭은 자신을 경찰이라고 속이며 한 여성의 집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여성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잭을 바라본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잭. 그런데 연금을 늘려준다는 잭의 거짓말에 여자가 잭을 들여보낸다. 그리고 갑자기 잭은 화를 내기 시작한다. 표면상으로 잭은 문전박대 당한 것에 화를 낸 것이지만 진짜 이유는 여자의 무지함 때문이다. 즉 자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인 것에 화가 난 것이다. 잠시 질문 하나. 잭이 살인을 시작한 것은 여성이 부정하고자 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왜 잭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인가? 우울 3부작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 영화에서 모두 여성은 남성의 세계에 저항하지만 그 저항은 실패로 끝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은 남성의 손에 죽게 되고, <멜랑콜리아>에서 남성은 죽지만 여성에 의한 살인이 아닌 자살이며, <님포매니악>에서 조는 셀리그먼과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은 곧 깨지게 된다. 다시 말해 라스 폰 트리에의 여성은 숭고하지만 나약한 존재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러한 나약함에 실망한 것이다. 잭을 살인마라고 규정하다가 그 규정을 철회하는 나약함. 의심스러운 잭을 들여보낸 무지함. 그렇기에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 세계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 결벽증이 잭을 사로잡는다. 강박적으로 집을 청소하다가 결국 경찰과 만나고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은밀하게 자랑이라도 하듯이 자세하게 수사하라는 말을 남겨놓고 떠난다. 차에 시체를 매달아 오면서 도로에 묻은 피는 신이 내린 비가 씻겨준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조롱하는 라스 폰 트리에. 풀의 죽음을 보면서 풀의 숨소리를 듣는 그에게 세상은 조롱의 대상이다. 호랑이가 양을 잡아먹는 것이 본능이듯이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예술이다. 


4. 잭은 두 번째 살인 이후로 살인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것도 네거티브 필름으로.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체를 챙겨가 다시 찍기도 한다. 강박증도 점차 약해진다. 잭은 네거티브 필름이 빛 속의 어둠을 볼 수 있어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즉 신성한 예술에 내재된 어두운 부분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제 그 어두운 부분에 더욱 깊숙하게 들어간다. 세 번째 살인. 이번에는 가족을 끌어들인다. 무언가 건들이면 안 될 것 같은 것을. 그것도 아이가 있는 가족을. 자신만의 터무니없는 논리로 무장하며 또 다시 살인을 정당화하는 잭은 사냥한 새들과 가족의 시체를 눕혀 놓으며 자신의 예술 작품을 선보인다. 영화 스크린처럼 직사각형 모양인 나뭇가지 직사각형 프레임 안에 놓여진 새들과 가족의 시체. 그 시체들을 보여주는 부감 쇼트. 마치 <안티크라이스트>나 <님포매니악>에서의 부감 쇼트를 떠올리게 만든다. 버지가 묻는다. “내 찬사나 박수를 바라나?” 잭의 대답. “너무 비판적이셔서 애석할 따름입니다. 제 행실이 아닌 작품을 봐주세요”. 아마도 라스 폰 트리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외관이나 행실이 아닌 자신의 작품을 봐달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파괴적이고 흉악하게 보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을. 가족의 시체를 냉동 창고로 옮긴 뒤에 둘째 아이의 시체를 조정하여 표정과 자세를 바꾼다. 살인은 육체와 영혼은 분리시키는 것이다. 잭에게 육체는 자신의 예술을 위한 재료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근대 이후 이성이 아닌 육체의 중요성에 주목한 것처럼, 네거티브 필름이 빛 속의 어둠을 보는 것처럼, 잭은 영혼이 아닌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는 자이다. 육체의 죽음 이야말로 영혼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니 말이다. 이어지는 네 번째 살인. 이번에는 자신의 연인이다. 동정에 호소하려는 듯이 목발을 집고 연인의 집으로 올라간다. 그녀는 ‘재클린’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잭은 그녀를 ‘심플’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재클린’이라고 부르라는 그녀의 말에 잭은 답한다. “단순한 네 부모한테 그런 상상력도 있었어?” 여자의 부모는 누구인가? 그 세계를 창조한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이다. 잭이 심플의 부모에 대하여 하는 말은 곧 자기 비하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창조했던 세계에 대한 비하. 심플은 잭에 비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이다. 우울 3부작의 여성들이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것과는 정반대 되는 설정. 자신이 ‘교양 살인마’라는 잭의 말에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고 잭 역시 자백하지만 경찰은 그들을 무시하고 곧 심플은 잭에게 동정심을 준다. 잭이 깨어나 위협을 가하자 온 힘을 다해 소리지르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라스 폰 트리에는 깨달은 것이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예술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설득하지 못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잭이 그들을 처리한다. 잭은 심플을 묶은 뒤 그녀의 가슴에 그려놓은 선을 따라 그녀의 가슴을 도려낸다. 이때 잭이 하는 말. “왜 늘 남자가 잘못이라는 거야? 남자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뜻이야. 여자는 늘 피해자잖아? 남자는 언제나 범죄자고 말이지”. 이것을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조롱으로 봐야할까? 다시 한번. 우울 3부작에서 여성은 위악적이면서 숭고한 존재이고 남성은 위선적이고 무지하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존재이다. 즉 우울 3부작에서 남성은 가해자이고 여성은 피해자이다. 잭이 하는 말은 라스 폰 트리에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계관에 대한 조롱이면서 자기 비하이다. 심플의 유방을 도려내는 행위는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이 자신의 음핵을 스스로 자르는 행위와 대비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이 자신의 음핵을 자르는 것은 쾌락을 거부하고 고통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잭이 심플의 유방을 도려내는 것은 여성의 상징인 유방을 도려내면서 자신의 지갑으로 개조하여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이전 세계를 파괴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살인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심플의 유방 하나를 차에 붙여두고 가는 잭. 그것조차 예술인가? 잭은 버지에게 말한다. “당신은 무자비하고 꽉 막힌 노인입니다. 도덕적 잣대로 생명의 예술성을 죽이죠. 해방을 원합니다. 예술은 불가해할 정도로 방대하니까요”. 



5. 잭은 엔지니어이면서 건축가이다. 그는 자신만의 집을 짓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집을 짓지 못한다. 그는 파괴에는 재능이 있을지 언정 창조에는 재능이 없는듯 하다. 그의 예술은 파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버지는 사랑이 예술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보지만 잭에게 예술은 다른 것이다. ‘파괴가 곧 예술’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슈투카라는 폭격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급강하 폭격기인 슈투카는 급강하하는 순간 조종사가 정신을 잃는다. 폭격기의 목적은 곧 파괴이다. 슈투카는 폭격을 통한 파괴는 물론 급강하를 통해 조종사마저 파괴한다. 그 파괴를 자랑하듯이 굉음까지 내는 슈투카를 ‘걸작 그 이상’이라고 부르는 잭. 다른 생명과 물질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는 슈투카는 잭에게 완벽한 예술품이다. 그리고는 ‘우상의 가치’를 설파하던 잭은 20세기의 수많은 독재자를 화면에 보이며 세상을 파괴하는 모든 우상이 곧 예술이라며 극단적으로 나아간다. 마치 과거 자신의 히틀러 발언을 의식하는 듯한 장면과 대사의 연속. 그러자 이 궤변을 듣고 있던 버지는 잭을 ‘안티크라이스트’라고 규정하면서 “내가 인도한 인간 중에 자네만큼 철저하게 타락한 인간은 없었네”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남다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던 버지는 그렇게 잭에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버지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갑자기 부헨발트 수용소에 있었던 괴테의 참나무를 말하며 인본주의나 존엄성과 같은 선은 인류가 가장 잔혹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잭이 선에 대한 파괴를 통한 예술을 말했다면 버지는 그러한 파괴를 통해 역설적으로 선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자 잭의 대답. “어떤 사람들은 작가가 허구 속에서 저지르는 잔혹 행위는 문명 사회에서 못 하는 범죄의 내적 열망을 예술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라고 하죠. 저는 동의 못 해요. 저는 천국과 지옥은 하나라고 믿어요. 영혼은 천국에, 육체는 지옥에 속하죠. 영혼은 이성이고, 육체는 예술과 우상 같은 온갖 위험의 온상이에요.” 그때 스크린에는 라스 폰 트리에 영화들의 장면들이 이어져 나온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이 위험해 보이는 것은 작가 스스로의 뒤틀린 열망을 해소한 결과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육체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성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잭이 살인을 하는 것은 육체에서 영혼을 분리해 진정한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기 위함이다. 아니, 정확히는 예술에 대한 이성의 개입을 없애는 것이다. 


6. 마지막 다섯 번째 살인. 이번에는 여성이 아닌 남성에 대한 살인이다. 게다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을 한번에 살인하려 한다. 히틀러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 독일군의 처형 방식을 모방해 여러 명의 남성을 한번에 죽이고자 한다. 지금까지 여성을 살해한 것은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세계관을 파괴한 것이라면 남성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을 넘어서 타인의 세계관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전 세계관이 타인의 세계관을 바꾸지 못하자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타인의 세계관, 즉 통념의 변화를 꾀한다. 예술의 목적은 파괴이고, 예술가가 가장 파괴하고 싶어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과 통념이다. 그러나 무언가 일이 뒤틀린다. 자신이 풀메탈자켓탄이라고 믿고 산 탄알이 사실 일반적인 사냥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가게로 돌아가 따지지만 오늘따라 점원이 이상하다. 그러자 자신의 친구 SP를 찾아가 풀메탈자켓탄을 요구하지만 SP는 잭을 총으로 위협하며 경찰에 신고한다. 그가 잭을 신고하는 이유는 살인이 아닌 강도질이다. 무엇을 강도질 한 것인가? 잭은 통념을 강도질 한 것이다. 아직 죽이지 않았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그동안 우리의 통념을 수도없이 강도질 했다. 그리고 잭이 드디어 통념을 죽이려고 하자 세계는 그를 처벌하기 위해 움직인다. 마치 단테를 연상시키는 붉은 옷을 입은 SP. 잭은 그를 좋은 친구라고 부른다. 탁자 밑에 칼을 숨기면서. 단테도 잭과 같이 예술가이다. 그러나 단테는 잭이 조롱하는 기독교적 가치 안에서 작품을 만든 예술가이다. 둘은 공존할 수 없다. 잭이 세계관을 파괴하기 시작한 이상 단테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SP에게 총구를 치워 달라고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잭. SP는 거짓말한 적 없는 잭을 믿고 총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잭은 SP를 살해하고 곧 찾아온 경찰 역시 살해한다. 드디어 풀메탈자켓탄을 구한 뒤 SP의 붉은 옷을 입고 냉동 창고로 돌아온 잭은 처형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총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어떻게든 처형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민하던 잭은 그동안 안 열리던 창고 안의 방문을 기어코 연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갑자기 버지가 개입한다. 어떻게 오게 되었냐는 잭의 질문에 버지는 잭이 불러서 왔다고 대답한다. 버지는 잭의 살인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곁에 있었다. 잭이라는 자아가 날뛰는 것을 지켜보던 버지라는 자아는 잭의 행동이 용납할 수 없는 쪽으로 나아가자 그를 막는다. 버지는 세계에 속해 있는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이성이면서 영혼이다. 잭의 살인을 멈춘 버지는 제안한다. 집을 지어보라고. 지금 짓고 있는 집을 완성할 수 없다면 새로운 집을. 자재의 의지에 모든 것을 맡긴 집을. 잭은 드디어 자신만의 건축 재료를 찾았다. 그동안 자신이 살해한 시체를 이용해 집을 짓는 잭. 스스로의 세계관을 파괴하면서 얻어 낸 재료를 통해 마침내 자신만의 작고 멋진 집을 짓는다. 버지의 눈에도 쓸모 있어 보인다. 잭은 결국 남성들을 살해하지 못하고 떠난다. 스스로의 통념을 넘어 타인의 통념까지도 집의 재료로 삼고자 했던 잭의 바램은 이뤄지지 못한다. 그것이 라스 폰 트리에 스스로가 느끼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제 남성들은 경찰이 구출할 것이다. 그리고 잭은 버지를 따라 지옥으로 간다. 



7. 버지를 따라 지옥의 소음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던 잭은 잠시 창 밖의 천국을 바라본다. 천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잭. 천국에서는 일꾼들이 풀을 베고 있다. 이제 잭은 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없다. 순간 잭이 그동안 저지른 살인들과 직접 지은 집이 플래시백으로 나타난다. 수레바퀴와 함께. 잭은 죽음을 통해 생명력을 느끼는 인간이다. 그렇기에 살인을 통해 생명력이 살아 숨쉬는 천국을 만들고자 했지만 이제 돌아갈 수 없다. 그저 아무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한다. 버지와 함께 지옥의 최하층까지 내려가는 용암을 본 잭은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발견한다. 다리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벽을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원래는 두 층 위의 지옥에 가야하지만 최하층까지 갈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벽을 타기 시작한다. 버지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잭이 지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천국에서 생명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면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서 천국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실패한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잭을 잡은 화면은 잭이 떨어지자 갑자기 네거티브 필름으로 바뀐다. 빛 속의 어둠, 어둠 속의 빛이 들어있는 필름과 함께 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의 소음이 들려온다. 하강하는 잭. 어째서인지 잭이 걸작 그 이상이라고 말하는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가 떠오른다. 그리고 지옥의 소음은 슈투카의 굉음을 대체하는 것처럼 들린다. 잭은 스스로 걸작 그 이상이 되었다. 드디어 자기 자신을 파괴했으니 말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그러한 잭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네거티브 필름으로 그가 떨어진 지옥을 찍는다. 잭은 기독교적 사고의 밖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존재를 기독교적 방식으로 처벌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과연 잭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을까? 다시 한번. 그에게는 천국과 지옥이 하나다. 영혼은 천국에 있고 육체는 지옥에 있다. 육체는 그에게 예술을 위한 재료이면서 예술 그 자체이다. 그리고 지옥에는 고통받는 육체가 가득하다. 즉 지옥은 예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잭이 지옥으로 떨어진 것은 처벌이 아니라 축복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네거티브 필름으로 그러한 어둠 속의 빛, 빛 속의 어둠을 보여준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OST. “Hit The Road Jack”. 잭에게 떠나서 돌아오지 말라고 말하는 라스 폰 트리에. 잭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는 돌아올 필요가 없다. 그곳에는 잭을 위한 예술적 도구들이 가득하니 말이다. 아마도 지금쯤 잭은 지옥 어디선가 그만의 집을 짓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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