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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an 20. 2020

사랑을 카피하다 리뷰

그 사랑은 어디까지 진실인가?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글에서 직접적인 출처 표시 없이 큰 따옴표(“”)안에 포함된 구절들은 모두 발터 벤야민,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심철민 옮김, 도서출판 b, 2017)에서 인용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구멍은 테두리 선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 선 안의 빈 공간이야말로 구멍이다. 그러니까 구멍을 그린다고 여길 때 실제로 그리고 있는 것은 구멍의 경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빈 공간을 그릴 수 없다. 구멍을 그리려는 행동은 단지 그 텅 빈 채로 편재하는 공간의 연장을 차단하여 작은 폐곡선 속에 가두려는 무방한 행위일 뿐이다.” – 이동진,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中 버닝 평론 (위즈덤하우스, 2019) 


1.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해 의미는 이미지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의도나 관객이 지닌 관습과 통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감독이 의도한 편집에 따라 수많은 이미지를 보게 되고 그 이미지들에서 얻은 수많은 단서를 이용해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한다. 감독이 만들어낸 길이 단순하고 쉽다면 관객은 손쉽게 따라가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만약 감독이 아무 길 없이 울창한 숲과 같은 곳에 관객을 자리 시킨다면 관객은 방황하게 된다. 그럴 때 이미지들이 그려낸 경계선 안의 빈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다. 그것이 꼭 감독의 방법과 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 키아로스타미는 언제나 관객에게 섣불리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관객 스스로가 숲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픽션인가 다큐인가? <체리향기>에서 바디는 마지막에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가?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여자(줄리엣 비노쉬)와 제임스 밀러는 정말 부부인가? 키아로스타미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온전히 관객이 감당해야할 몫이다. 


2. 영화는 제임스 밀러의 강연에서 시작한다. 그는 저서 “기막힌 복제품”에 관한 강연을 위하여 이탈리아에 왔다. 그리고 들어오는 여자. 다행히도 그에게 사인을 받았다. 강연이 시작되자 여자가 자리를 잡는다.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게 가장 앞자리에 자리잡는 그녀. 강연(저서)의 요지는 복제품 역시 원본과 같이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는 내용이다. 이 말을 듣고 (키아로스타미의 의도와 관계없이) 벤야민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가 붕괴되었다는 주장. 복제기술의 발전으로 예술의 가치는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적 가치로 전도되었고 “수용자가 그때그때의 자신의 상황에서 복제품과 대면하는 것을 가능케 함으로써, 복제기술은 그 복제품을 현실화한다”. 이 주장을 계승하듯이 복제품의 가치를 전파하는 밀러. 물론 벤야민이 말한 복제품의 가치와 밀러가 말한 복제품의 가치는 완전히 일맥상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벤야민이나 제임스 밀러나 모두 원본의 권위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들이 볼 때 원본과 복제품은 큰 차이가 없다. 다시 여자를 바라보자. 강연을 듣던 여자는 아들의 투정에 의해 도중에 밖으로 나간다. 나가기 전 사회자에게 전화번호를 남기고 떠나는 여자. 언뜻 제임스 밀러의 열렬한 팬으로 보이는 이 여자는 사실 밀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밀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곧 복제품과 다른 원본만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섯 권이나 책을 샀다. 그 책이 자신의 일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그녀의 일은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골동품들은 복제품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밀러가 그 가게에 찾아온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골동품들을 바라보던 밀러가 하는 말. “집에선 실용적인 걸 선호해요. 집의 분위기에 맞는 골동품만 들여놓고, 안 맞는 건 버려요”. 오로지 전시적 가치에만 의미를 두는 벤야민적 태도. 그리고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두 남녀. 차에 타자 그녀는 밀러에게 자신이 산 책들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사인을 받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인은 그 작가가 “지금-여기”있었다는 아우라의 증거이다. 그녀는 여전히 예술의 아우라를 믿는다.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진 두 사람이 한 차에 탑승한다. 



3. 차를 타고 루치냐노에 도착한 여자와 밀러. 그러다 여자에게 아들이 전화해 온다. 통화를 마치고 여자는 육아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밀러는 아이의 편이다. “아이들은 현재에 충실하고 삶을 즐기려 하죠. 결과나 비용은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자 여자의 항변. “정말 주옥 같은 말이긴 한데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관계의 역전.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걸 선호하는 밀러는 이상적인 말을 하고 예술의 아우라를 믿는 이상적인 여자는 현실적인 말을 한다. 그리고 박물관에 들어가 ‘투스카니의 모나리자’를 관람하는 두 인물. 그 작품은 몇 세기 동안 진품으로 여겨져 왔지만 50년 전 위작으로 밝혀졌다. 마치 자신의 주장을 함축하는 듯한 그림을 보고 그가 하는 말. “원본도 실제 모델의 아름다움을 모방한 거잖아요. 그 모델이 진정한 원본이죠. 그 표정이 모델의 표정인지 화가의 의도인지는 모르죠”. 그러자 원본은 어디 있느냐는 여자의 질문에 “동생의 남편”이라 답한다. 여자의 동생 마리의 남편은 누구인가? 그는 말을 더듬는 습관 때문에 마리의 이름을 늘어뜨려 부른다(“마마마마마리”). 그리고 마리는 그러한 남편의 말버릇을 좋아한다. 남편은 마리를 정식으로 등록된 이름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 밀러에게 원본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창작자의 관점과 의도 그 자체이다. 마치 뒤샹의 ‘샘’처럼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나 예술 작품도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재해석되고 그것이 곧 원본이다. 즉 객체가 아닌 주체가 중심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밀러에게 원본과 복제품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여자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두고 여자와 밀러는 커피숍에서 밀러의 책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를 바꾼다. 밀러가 책의 영감을 얻은 것은 시뇨리아 광장에서 한 모자의 대화를 통해서이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던 여자는 “꼭 내 얘기 같네요.”라고 말한다. 그 둘을 아느냐는 질문에 “내 사정이 안 좋았던 때죠.”라고 여자는 답한다. 당황하는 밀러. 잠시 그가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카페 여주인이 여자에게 말한다. “좋은 남편 같아요”. 


4. 카페 여주인은 왜 여자와 밀러를 부부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 여주인은 영어를 모른다. 따라서 영어로 대화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카페 여주인이 언제 처음 카메라에 등장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두 사람이 카페로 들어올 때 목소리가 담기기는 하지만 프레임 안에 그 모습이 담긴 것은 여자와 대화할 때이다. 이전까지 여자와 밀러 만을 따라다니던 카메라가 두 인물 이외에 비중 있게 담은 인물은 첫 장면에서의 사회자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때 사회자는 카메라가 사회자를 찾아가지 않고 사회자가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직접 들어왔다. 그러나 카페 여주인은 카메라가 쇼트의 변화를 통해 직접 찾아가 프레임 안에 담는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여자와 밀러를 제외하고 이러한 쇼트의 변화로 등장한 인물은 카페 여주인이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여주인이 등장한 쇼트는 다른 쇼트들과 비교해 이질적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사실상 카페 여주인이 영화 밖에서 개입한 인물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영화 밖의 시점에서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를 오늘 만난 유명 작가와 팬으로 보기에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다. 밀러의 강연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앞자리에 착석하고 사회자에게 번호를 남기는 것부터 헌정사에 왜 자신의 성을 빼고 이름만 적었냐는 아들의 질문에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여자의 행동,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여자의 가게에 찾아온 밀러, 그리고 카페 여주인의 걸어온 말에 “매번 저래요”라고 대답하는 여자의 말까지. 여기서 구멍이 발생한다. 어떤 구멍? 미스터리를 차단하기 위한 구멍. 제임스 밀러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구멍. 그렇다면 테두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지금까지 관객이 보아온 수많은 이미지들이 구멍의 테두리이다. 관객은 이 기묘한 관계에 답을 내기 위해 이미지의 테두리로 미스터리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구멍의 안은 언제나 텅 비어있다. 관객은 여전히 텅 비어있는 구멍 안에서 방황한다. 여자와 카페 여주인의 대화가 진행된다. 부부 관계에 대하여 다소 보수적인 가치를 지닌 듯한 여주인은 남편(밀러)이 일에만 신경 쓴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일에 몰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여주인의 말. “장밋빛 이상에 대한 꿈에 젖어 현실을 탓하는 건 바보짓 이에요”. 여자는 현재 어떤 상태인가? 그녀는 남편없이 혼자 힘으로 육아를 책임지고 있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에 지친 상황이다. 예술에 관해서는 이상적인 여자는 육아에 관해서는 철저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다. 전화를 마친 밀러가 다시 들어온다. 여자가 카페 여주인과 나눈 대화 내용을 알려주자 밀러는 “사실 우린 잘 어울리죠”라고 답하는 밀러. 이제 두 사람은 작가와 팬의 관계에서 부부 관계로 변모한다. 



5. 밀러는 어째서 자신들을 부부라고 생각한 여자와 카페 여주인의 규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것? 물론 실제로 두 사람이 부부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페 여주인이 두 사람을 부부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즉 카페 여주인이 두 사람이 부부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두 사람은 부부인 셈이다. 왜 이 규정을 따라야만 하는가? 여기서 다시 한번 벤야민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관객은 기계장치에 감정이입이 됨으로써만 배우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그러므로 관객은 기계장치의 태도를 넘겨받아서 직접 테스트하는 것이다”. 기계장치, 즉 카메라의 태도는 곧 창작자인 감독의 태도이고 그것은 곧 관객의 태도로 직결된다. “인간은 분명 자신의 살아있는 인격 전체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제 최초로-이것이야말로 영화의 작용이다-이 인견의 아우라를 포기하는 가운데 활동해야만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인간이 ‘지금-여기’에 있는 것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배우가 연기하는 극 중 인물은 배우 자신이 아니다. 배우는 자기 자신의 인격적 아우라를 포기해야 하고 감독이 창조한 가상의 인격체에 이입해야 한다. 감독이 새로운 인격체를 요구하는 순간 새로운 인격체가 배우에게 형성된다. 관객은 감독이 만든 인격체에 기반하여 배우에게 이입한다. 영화가 처음 시작한 곳은 밀러의 강연이 있는 곳으로 이때 밀러와 여자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작가와 팬으로 규정된다. 키아로스타미는 이를 뒤집어버린다. 밀러와 여자를 부부라고 규정한 카페 여주인은 영화 텍스트 밖에서 개입한 인물로 사실상 관객을 대신하는 인물이다. 이제 밀러는 밀러가 아니다. 그저 한 명의 남편이자 남자이다. 전혀 다른 두 개의 관점. 커져가는 미스터리. 그리고 미스터리의 확장을 막기 위한 구멍. 카페 여주인을 통해 관객이 만든 구멍은 여전히 텅 비어있다. 이 구멍을 채워야만 한다. 여자와 남자는 카페를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6. 거리를 걸으며 두 남녀는 계속해서 싸운다. 여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남편이 불만이고 남자는 끊임없이 자기 변호를 한다. (이 어휘 선택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한계를 수용하면서도 선택하자면) 여자는 결혼생활에 이상에 가득 차 있고 남자는 현실적이다. 이건 여자와 남자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현실 문제를 이야기 할 때는 정반대이던 남녀는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현실 문제를 바라본다. 여자는 육아에 지쳐있는 상태이다. 그녀에게는 이 현실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남편없이 혼자 육아를 책임지는 자신에게 함께 시간을 보내줄 수 있는 남편의 존재가. 그런 그녀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카페 여주인이 두 사람을 부부로 규정하면서 드디어 자신에게 남편이 생겼다. 이제 자산의 장밋빛 이상을 마음껏 펼칠 기회가 왔다. 하지만 남자는 너무나도 차갑다. 함께 사진을 찍은 신혼부부에 대해서도 오래 못 갈 환상을 가지고 있다며 냉담하게 이야기하는 남자. 이때 싸우는 두 사람은 종종 불어와 영어를 혼용하여 사용한다. 여자는 카페 여주인에게 남자가 불어를 할 줄 모른다고 답했으나 남자는 학교에서 불어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불어도 능숙하게 말한다. 끊임없이 싸우던 남녀는 어느 조각상 앞에 도착한다. 여자는 조각상을 보고 남자 어깨에 기댄 여자의 표정을 좋아하지만 남자는 이 조각상이 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조각상은 여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결혼생활 그 자체이다. 남편의 어깨에 기대 행복해하는 아내. 그러나 남자의 눈에는 여자 이외에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남자의 무책임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자 어떻게든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지나가는 행인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아내. 행인 부부의 아내는 여자와 같이 남자의 어깨에 기댄 여자의 표정을 강조하며 작품의 위대함을 전파한다. 그렇다면 조각상의 여자는 어떤 표정인가? 관객은 볼 수가 없다. 카메라는 조각상의 형체를 어렴풋이 보여줄 뿐이다. 왜 보여주지 않는가? 키아로스타미가 볼 때 영화는 거기까지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조각상의 표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남녀가 실제 부부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둘 사이의 관계가 부부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그 자체이다. 한 가지 반박. 남녀가 부부 행세를 하는 것은 영화 외부의 규정 때문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부부가 아닌가? 다시 한번. 그건 비어있는 구멍이다. 카페 여주인의 시선은 하나의 시선일 뿐, 그 자체로 하나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동안 보아온 수많은 이미지들을 토대로 두 사람의 관계를 유추하고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을 남녀가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부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규정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는 남녀가 어떤 사이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카메라도 조각상의 표정과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 영화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결정적인 진실들은 언제나 관객 스스로의 몫이었다. 그는 애초에 관객들에게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답을 정해놓지 않는다. 영화는 현실의 복제품이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서 명확한 답을 원하지만 사실 정확한 답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현실 상황에서 문제의 답은 결국 관찰자의 관점에 근거한 하나의 추측 정도에 불과하다. 현실이 그렇다면 복제품인 영화 역시 그래야만 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편집된 이미지들뿐이다. 이를 토대로 관객 자신이 직접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두 사람이 조각상에 대하여 대화할 때 두 사람이 쓰는 언어는 불어이다. 불어는 여자의 모국어이다. 조각상을 보는 것은 여자의 이상을 직접 보는 것이고 이는 곧 여자의 세계에 남자가 더 깊게 들어서는 것이다. 여자의 세계 안에서 남자는 자신의 모국어 대신 여자의 모국어를 써야 한다. 대화가 끝난 후 식당에 들어선 남녀.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늦고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빠른 애매한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남자가 기차를 타기 위해 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7. 식당에 자리를 잡은 뒤 여자는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귀걸이를 착용하며 한껏 자신을 꾸민다. 이때 뒤쪽의 창문은 굳게 닫혀있다. 그런데 남자가 어째서인지 화가 나있다. 자신이 시킨 와인은 맛이 갔고 종업원은 상대를 해주지 않아서이다. 여자가 어떻게든 화를 풀어주고자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화를 더 낸다. 싸우던 도중 여자는 창문 밖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던 신혼부부를 발견하고 활짝 웃는다. 그녀에게 달콤한 신혼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관계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15년의 시간이 있고 자신들의 아이가 있다. 여자에게 아이는 도망치고 싶은 현실의 존재이다. 그녀의 아들은 그녀가 남자와의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래서 카페에서 나오면서 전화를 받은 이후에는 더 이상 아들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의 이상에 깊이 빠져들기 위해서는 현실의 개입이 더 이상 이뤄지면 안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자가 문제다. 남자에게 결혼생활은 현실적이다. 이미 15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한 그들 사이에 신혼부부와 같은 달콤한 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결혼에 대한 이상과 가치관의 차이와 그 간극은 그들이 쓰는 언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전까지 불어로 대화하던 그들은 이제 각자의 모국어를 쓰면서 대화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린다. 남녀는 자신들이 각각 생각하는 이상적 관계를 상대에게 주입하고자 하지만 이는 무의미한 시도일 뿐이다. 결국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두고 식당을 빠져나오는 남녀. 그들은 근처의 성당으로 간다. 남녀가 성당을 나올 때 한 노부부가 먼저 나온다. 노부부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힘들게 걷고 있다. 그 노부부를 뒤에서 바라보는 남녀. 다시 대화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불어로. 남자는 여자에게 미안했는지 사과의 말을 건네면서 다정하게 이야기한다. 단순히 감정의 변화인가? 우리는 이전에 보았던 노부부를 상기해야 한다. 아니, 그전에 남녀와 함께 조각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행인 부부를 상기해야 한다. 행인 부부가 카메라에 담기는 형식은 앞선 카페 여주인이 등장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차이는 존재한다. 카페 여주인을 담은 쇼트는 미디움 쇼트에 3인칭 쇼트였지만 행인 부부를 담은 쇼트는 상대적으로 롱 쇼트이면서 남자의 시점 쇼트이다. 하지만 카페 여주인이나 행인 부부 모두 영화 밖에서 남녀의 영화 안으로 개입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유사하다. 이때 행인 부부를 처음 담은 쇼트가 남자의 시점 쇼트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남자가 보고 있는 부부의 모습은 무엇인가? 언뜻 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폭언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부부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여자가 말을 걸면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남자의 시점 쇼트는 자연스럽게 3인칭 쇼트로 전환된다. 여자는 행인 부부를 자신의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상적인 부부관계가 묘사된 조각상에 대한 평가를 부탁한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 행인 부부의 남편이 남자에게 조언한다. “내가 봤을 때 아내 분이 원하는 건 곁에서 아내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거요”. 이 조언을 한 것은 곧 남자에게 여자의 이상에 자신을 좀 더 맞추라는 것이다. 행인 부부의 눈에 두 남녀 관계에서 자신을 내려놔야 하는 쪽은 남자이다. 새로운 규정. 그러나 남자는 이 규정을 따르지 않는다. 이번에는 현실이 영화를 규정하는 대신 영화가 현실을 모사한다. 현실이 영화를 규정하기 전 현실을 먼저 바라본 것은 영화이다. 영화가 바라본 현실을 무엇이었는가? 처음에는 행인 부부가 싸우는 듯 했지만 실상은 누군가와 통화로 싸운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남녀는 부부가 추천한 식당에 들어간 뒤 끊임없이 싸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서로에게 화가 나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과 영화 사이에서 싸우는 것이다. 남자가 중간에 시간을 말한 이유는 단순히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현실로 돌아가야 하지만 여자는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더 도망치고 싶어 한다. 한 가지 반박. 그렇다면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니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현실의 인격체로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남녀는 영화 속의 인물로서 서로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안으로 끌어들이는 영화의 인력. 밖으로 밀어내는 현실의 척력. 그 사이에서의 갈등. 이 싸움은 행인 부부의 싸움과 유사한 양상이다. 남녀는 행인 부부의 모습을 카피한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싸운 뒤 영화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듯 했으나 식당 밖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성당에 들어가는 여자와 지켜보는 남자. 이윽고 노부부가 그들 앞을 지나간다. 이제 새로운 사랑을 카피할 차례이다. 노부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걷고 있다. 이제 남녀도 서로에게 의지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방법은 남자가 다시 여자의 이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남자가 사과한 뒤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기댄다. 여자의 이상을 이해했는지 남자는 면도를 이틀에 한번 한다는 것까지 말한다. 여자는 다시 남자와 함께 영화 속에 머물고자 한다. 15년 전에 남자와 함께 신혼밤을 보냈다는 호텔로 찾아가 방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남자에게 창문 밖을 바라보라고 하면서 그 당시 기억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남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카메라도 남자의 시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날이 저물고 있다. 이제 남자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여자는 자신의 영화를 지속시키기 위해 남자를 붙잡아 두고자 하지만 소용없다. 여자가 상기시키고자 하는 이미지는 남자에게는 없는 이미지이다. 영화가 끝날 순간이 왔다. 화장실에 들어간 남자. 창문 너머로 종소리가 울린다. 영화의 끝을 알리는 듯이. 그리고 창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제 두 남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이 진짜 부부이든 아니든, 남자는 이제 제임스 밀러로 돌아가고 기차를 타고 떠나야만 한다. 마치 영화 속 영화의 끝을 알리는 것처럼 직사각형의 창문 아래 쪽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진짜 영화도 끝을 맺는다. 


8. 그렇다면 구멍은 채워졌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남녀의 진짜 관계를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은 끝까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채우지 않는 것이 영화의 책임일 수도 있다. 진실은 영화가 알려주는 것이 아닌 관객이 직접 알아가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필름메이커들이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있다. 실제 일상에서는 다양한 호기심을 갖고 이웃의 창문을 들여다보고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영화관에만 들어오면 그저 모든 것이 스크린 위에서 설명되기만 기다리는 나태한 상태에 빠진다. 영화가 보내는 사인들을 종합해 말과 이미지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중략) 시네마는 제7의 예술인 만큼 가장 완전하고 창의적인 예술이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 영화는 스토리텔링에 경도됐고 그로 말미암아 소설에 패배했다. 왜냐하면 오히려 소설의 독자는 스스로 공간을 상상하고 인물을 캐스팅해서 강력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가장 진보된 예술이여야 마땅한 시네마가 소설에 뒤처져 있다”.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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