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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Dec 31. 2023

연말인사

그리고 약소하게 전하는 사과

연말이 되면 연말인사를 어떻게 전할지가 저에게는 나름의 과제 중 하나입니다. 저에게 있어 연말인사는 한 해를 정리하는 동시에 다가오는 다음 한 해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다짐이기도 합니다. 저의 한 해를 채운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그래서 다음 한 해 동안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연말인사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유달리 연말인사를 드리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려웠습니다. 제가 한 해 동안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제가 느껴온 두려움을 다시 마주하는 것 같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고통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지금 저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올 한 해 저에게 있어 가장 큰 사건은 단연 군 전역과 미국 유학일 것입니다. 1년 9개월의 군생활을 마친 후 다시 민간인의 신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나에 대해서 고민했고 그 결과 미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올 한 해 역시 저의 삶을 가장 많이 채운 것은 역시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군대에 있으면서 잠시 내려놓았던 영화를 다시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저의 일상을 최선을 다해 영화로 채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올해도 수많은 감독들의 세계를 경험하였습니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 마스무라 야스조, 하워드 혹스, 니콜라스 레이, 찰리 채플린,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차이밍량, 오시마 나기사, 그리고 수많은 이름들과 작품들. 이 이름들을 거쳐야만 저의 2023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올해는 영화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자 했습니다. 영화만이 저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영화만이 세계 앞에서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저의 존재를 간신히라도 붙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저의 한 해를 무의미에서 구원해 준 첫 번째 존재는 영화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만큼 영화에게 미안한 한 해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나에게 많은 것을 준 만큼, 저 역시 영화 앞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영화의 시간 안에서 부유하는 것을 넘어 영화 앞에서 저의 존재의미를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저는 여전히 영화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영화에 대해서 비평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훌륭한 비평가들에 비해 저의 글은 한없이 초라하고 부질없다는 사실을, 언젠가부터는 비평적인 성장이 멈춘 것만 같은 절망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영화는 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지만 제가 영화에 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면 거대한 허무와 무력함에 압도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기에 올해는 영화에게 고맙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한 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닌 모든 저의 삶이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올해 제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을 설명하자면 한쪽에는 무기력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불안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해 동안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제가 주체적으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분들 덕에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면서 제 스스로 많은 무력감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람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든 그 은혜를 갚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조차 없는 것이 저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제 자신을 증오했습니다. 세상 앞에서, 타인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고 무기력한 저를 바라볼 때마다 제 자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한 해를 버텼지만 앞으로 저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너무 두렵고 그래서 불안은 더욱더 커져갔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올 한 해 동안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저의 능력으로는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저의 2023년은 어느 해보다도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건 어떤 분들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저의 가족들을 포함해서 저의 지인들, sns에서만 인사를 드릴 수 있는 분들,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들까지,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기꺼이 저에게 주셨던 많은 행복을 돌려드리기에는 제가 너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조차 저에게는 과분한 인사인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올해는 미안하다는 말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행복에도 자격이 있다면 저는 마땅히 불행한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런 제가 주어진 것에 비해 너무나도 행복한 한 해를 보낸 것이 저보다 행복해야 할 많은 사람들의 몫을 제가 빼앗아 온 것만 같아 괴로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전히 저는 제가 죽도록 밉습니다. 아무 의미도, 가치도 가지지 못한 저를 보면 증오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래서 올해는 유독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의 삶에서 다가올 고통이 두려웠고 한없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저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서를 쓰려고도 해 보고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그 안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말 그럴 용기는 없었습니다. 사는 것이 무서운 만큼 죽는 것 역시 무서웠습니다. 어떤 때는 신에게 간절히 죽음을 허락해 달라고 빌기도 했습니다. 다가오는 내일이 두려워서 잠들기 전 홀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내일을 넘어 내년, 내년을 넘어 다가올 삶 전체를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 매일 들었습니다. 종종 제가 죽는 꿈을 꾸고는 했습니다. 꿈속에서 죽어있는 저를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이 지나치고 밟는 풍경을 보면 내가  죽은 뒤에도 세상의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이 슬프다기보다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애도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좀 더 살아보고자 합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죽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 삶에 남아있는 아주 가냘픈 의지,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 하나에 믿음을 두고 살아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그 이후로도 저는 이 불안과 무력함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두려움을 마주하고서라도 좀 더 살아보고자 합니다. 여전히 한없이 초라하고 무가치한 저이지만 언젠가 여러분이 저에게 주신 은혜와 행복을 조금이라고 돌려드릴 수 있는, 그리고 세상 앞에서 저의 존재의미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제가 앞으로 얼마나 살아갈지는 신만이 아실 겁니다. 때로는 신이 한시라도 빨리 저를 다시 거두어 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제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삶에서 희망 같은 것을 그다지 믿지 않습니다. 저에게 있어 살아야 할 이유는 제 삶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아닌 내 삶을 만들어 준 많은 것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일 것입니다. 그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염치없지만 계속 살아가겠습니다. 버티고 버티면서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이 투박하고도 보잘것없는 글에 담아내고자 합니다. 우울한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이만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죄송했습니다. 염치없지만 내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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