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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ug 13. 2023

올타임 베스트 10

먼저 두 가지 전제를 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 리스트는 언제든지 바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리스트가 그러하듯이 이 리스트 역시 그 순간의 최선으로서 선정할 것일 뿐 영원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후 이 목록에 변화가 생기더라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다른 하나는 무조건 한 감독 당 한 작품만 선정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같은 감독에게서 여러 작품을 고를 수 있다면 아마 몇 명의 이름이 이 리스트를 독차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는 단순히 한 영화가 주었던 감흥 외에도 각각의 영화가 보여준 영화의 다양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한 감독에게서 한 작품만 고르기로 하였다. 이 리스트를 보고 공감하든 반발하든 당신에게 이 영화들이 아주 자그마한 잔상으로나마 남아있기를 기원한다. 순서는 연도순으로 나열했다.



<선셋 대로>-빌리 와일더


한 영화가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영화는 하나의 쇼트, 하나의 신으로 기억되고 또 다른 영화는 한 줄의 대사로 기억되기도 한다. <선셋 대로>는 내게 있어 한 명의 위대한 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으로 기억되는 영화이다. 위대한 연기. <선셋 대로>는 분명 빌리 와일더의 최고작이고 그의 모든 정수가 담겨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가장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글로리아 스완슨 그 자체이다. 여기서 그녀의 연기는 단순히 영화 속 인물을 넘어서 한 명의 배우로서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의 총체로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저항.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연기는 단순한 광기가 아닌 시간의 흐름 앞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마지막 저항처럼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선셋 대로>는 걸작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8과 1/2>-페데리코 펠리니


영화 예술이 지니는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개인의 심리적 진실을 어떻게 스크린에 담아낼 것인가이다. 펠리니의 <8과 1/2>은 그에 대한 가장 완벽한 대답 중 하나일 것이다. 창작에 관한 영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창작의 고통에 관한 영화. 펠리니는 그 고통 자체를 스크린 위에 펼쳐낸다. 영화에서 펠리니의 분신으로 보이는 귀도는 영화를 만들지 못해 고통받는 상황이다. 그러자 그는 외부에서 영감을 찾는 대신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황홀한 오프닝. 하늘을 날다가 추락한 뒤 꿈에서 깨는 귀도의 모습은 도망치고자 했던 자신의 실존과 마주하는 과정의 형상이다. 그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이미지들. 꿈과 환상과 기억의 연속.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 귀도는 모든 이미지들을 지휘하고 그 속에서 하나가 된다. 모든 고통에 대한 환대. 아마 추측컨대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느낀 황홀한 감정은 다시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미치광이 피에로>-장 뤽 고다르


나에게는 2명의 고다르가 있다. 68혁명 이전의 고다르와 이후의 고다르. 나는 전자의 고다르를 비교도 할 수 없이 선호한다. 처음 영화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누구나 그렇듯이 그의 이름을 접하고 그의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네 멋대로 해라>부터 <국외자들>, <비브르 사 비>, <알파빌>, <경멸>, 그리고 <미치광이 피에로>로 대변되는 그의 초기작들을 보았을 때 이 작품들이 발표된 60년대는 곧 고다르의 시대라는 믿음을 가지기 충분했다. 하지만 68혁명 이후 변화된 고다르의 작품들에서는 그런 황홀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때의 고다르는 내게 있어 영화를 과격한 방식으로 해체하기는 하지만 그다음의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물론 아직 고다르의 영화를 다 보지 못한 상황에서 너무 섣부른 설명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그 이전의 고다르, 특히 <미치광이 피에로>로 대표되는 그의 시기를 떠올린다. <미치광이 피에로>(와 그 시절의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 속 인물이 영화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 고다르의 영화는 자신이 영화라는 것을 몸소 드러낸다. 그럴 때 인물들은 영화의 오래된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스크린을 유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마리안느와 페르디낭이 손금의 생명선을 노래하며 춤추는 장면. 여기에는 어떠한 규칙과 관습도 없는 순수한 인물들의 운동만이 있다. 천진난만한 운동. 그 순수한 운동이야말로 내가 기억하는 고다르의 절정이다.



<솔라리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아마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이름. 그가 남긴 7편의 작품들은 모두 걸작이다. 동시에 이 이름은 나의 언어로 설명하기 가장 힘든 이름이기도 하다. 언어로 승화되지 않는 힘. 모든 걸작들에는 비평의 언어를 넘어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이 힘의 절정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솔라리스>는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나는 그의 영화가 지니는 힘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여러 비평을 읽고 직접 쓰고자 했지만 어떤 언어도 그 비밀을 풀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나는 내 스스로 나의 비평적 능력이 충분히 성숙되었다고 생각되는 날까지 그의 영화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내려놓을 것이다. 다만 내가 체험한 그 황홀한 감정을 당신 역시 경험하기를 원할 뿐이다.



<외침과 속삭임>-잉마르 베리만


베리만의 영화는 곧 죄의식에 관한 영화이다. 미처 마주하지 못한, 시간 속에 묻어두었던 죄의식을 마주하는 영화. 그 과정 속에서 변화하는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세계. 그 안에서 인물은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신은 침묵으로 응답한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죄의식을 마주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숭고하다. 신에게서 구원을 찾는 대신 억압되어 있던 진실을 품는 것. 베리만 영화에서 느껴지는 숭고함은 거기서 온다. <산딸기>에서 과거를 마주하는 노교수. <가을 소나타>와 <침묵>에서 서로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는 모녀와 자매. <외침과 속삭임>에서 역시 아그네스와 자매들은 저마다의 진실을 간직하면서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병에 걸린 아그네스를 진심으로 보살피는 인물은 하녀인 안나가 유일하다. 그러다가 아그네스가 결국 죽는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죽음에서 돌아온다. 그때 서로에게 숨기고 있던 자매들의 진실 역시 밖으로 드러난다. 그 진실 앞에서 아그네스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돌아온 것만 같이 보인다. 베리만은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어떠한 구원도 선사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진실을 품어주면서도 그 안에 남아있던 사랑의 흔적을 긍정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구원.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긍정하는 것. 그 순간 비로소 마주하는 영혼의 울림. <외침과 속삭임>은 베리만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그의 카메라가 영혼을 포착한 기적의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돈>-로베르 브레송


만약 누군가 나에게 가장 위대한 엔딩 장면 단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돈>의 엔딩을 고를 것이다. 브레송의 영화 중 한 편을 고르는 것은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최고작을 생각할 때면 각자의 영화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때로는 이 자리에 <당나귀 발타자르>나 <무쉐뜨>, 혹은 <소매치기>나 <사형수 탈출하다> 같은 작품을 넣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럼에도 <돈>을 고른 것은 순전히 이 영화의 엔딩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신을 도와준 여인을 죽이고 돈을 훔친 이본은 갑자기 경찰에게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이후 연행되는 이본을 군중들이 모여서 바라본다. 이 소름 돋는 장면. 이 엔딩에서 군중과 우리는 마치 세계와 우리 자신의 초상을 보는 것만 같다. 어떤 모습? 악으로 가득 찬 세계와 인간. 그 모습을 우리가 바라볼 때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희망의 부정. <소매치기>나 <잔 다르크의 재판>에서 보았던 결말에서의 희망과 성스러움의 부재. 브레송이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영화를 찍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이 세계에는 일련의 성스러움도, 구원의 가능성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순수악으로서의 엔딩. 나는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호남호녀>-허우 샤오시엔


대부분 허우 샤오시엔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작을 고를 때면 <비정성시>나 <남국재견>이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나 역시 그 두 편의 작품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들 중 <호남호녀>가 지금보다 더 고평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는 쪽이다. 대만 현대사 3부작의 마지막 작품. <비정성시>와 <희몽인생>이 리얼리즘의 방법으로 만들어졌다면 <호남호녀>는 보다 모더니즘적인 토대 위에 서있다. 두 차이는 단순히 형식의 차이를 넘어서 역사를 마주하는 허우 샤오시엔의 태도의 차이다. <비정성시>와 <희몽인생>에서 허우 샤오시엔은 인물들이 통과해 온 대만 현대사를 스크린 위에 재현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호남호녀>에서는 그러한 재현이 등장하지 않고 그 재현을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이 찍힐 뿐이다. 이때 이 과정을 찍는 것은 역사에 다가가기 위한 운동이라기보다는 끝내 역사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리앙 칭은 치앙 비유의 삶을 연기하고 체화하고자 하지만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로지 현실 안에서 고통받고 있는 그녀 자신의 삶이 전부이다. 역사의 재현 불가능성. 그럴 때 마주하는 현재의 고통. 영화 내내 스크린의 공기를 푸르게 만드는 차가운 정조는 그러한 불가능성을 마주할 때 허우 샤오시엔이 느끼는 절망의 결과물인 것만 같다. 다른 허우 샤오시엔의 작품에서는 만나보지 못한 정조. 나에게 있어서 이 정조는 내가 경험한 가장 신비롭고 강렬한 영화적 체험 중 하나이다.



<하나 그리고 둘>-에드워드 양


두 명의 위대한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두 감독은 모두 대만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영화를 찍었다. 허우 샤오시엔은 거기서 그 대만의 역사를 살아가는 개인에 집중했다면 에드워드 양은 그 개인들이 살아가는 도시 자체를 담아내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 속에서는 인물들이 유난히 무기력하고 나약해 보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타이페이라는 도시. 개인의 의지를 넘어서는 역사적 흐름의 공간. 그 안에서 인물들은 그 흐름에 휩쓸려 가듯이 삶을 손아귀에서 놓친다. 그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은 이러한 그의 미학의 정점에 있는 영화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타이페이라는 도시를 살아간다. 그렇지만 인생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인물들은 그러한 사실에 절망한다. 이때 그러한 인물들의 뒷모습을 찍는 양양은 마치 그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알려주기 위한 작은 몸짓으로 보인다. 보이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의 이면. 끝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삶의 흐름. 결혼식에서 시작한 영화는 장례식에서 끝난다. 그 장례식은 단순히 한 인물에 대한 장례식을 넘어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삶의 진실을 마주한 자들을 위한 애도처럼 보인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방 안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머리를 베는 팅팅. 아무 말 없이 손녀를 감싸 안아주는 할머니처럼 이 영화가 고통에 찬 당신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시리어스 맨>-코엔 형제


만약 내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 중 한 편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시리어스 맨>을 고를 것이다. 코엔 형제 세계관을 정점. 부조리한 세계와 무기력하게 발버둥 치는 인간의 초상. 나쁜 상황을 빠져나오기 위한 나쁜 선택의 연속. 내가 생각하는 인간 본성과 세계의 진실을 가장 잘 담아내는 감독이 있다면 그것은 코엔 형제이고 그들의 영화 중 <시리어스 맨>이 가장 그 세계관을 잘 담아낸 작품이라고 믿는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엔딩 장면. 아버지 래리는 병원에서 불길한 전화를 받고 아들 대니는 친구에게 돈을 갚으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두 실패의 교차. 이 실패의 교차를 통해 코엔 형제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을 보여준다. 부조리의 순환. 나쁜 상황과 선택의 연속. 우연과 불확실성의 이름으로 지속되는 부조리. 그러한 세계 안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 이 염세주의의 늪에 빠져들어가는 과정에 당신이 동참하기를 바란다.



<시>-이창동


솔직한 고백. 만약 순수하게 작품성만 놓고 리스트를 작성한다면 <시>는 빠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시>는 이창동의 최고작이고 내게 있어 최고의 한국 영화이다. 그럼에도 다른 걸작들 대신 <시>를 고른 이유는 오로지 이 영화의 엔딩 때문이다. 에필로그와도 같은 엔딩. 미자는 시를 한 편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내레이션으로 미자의 목소리가 시를 읊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자가 그녀의 손자에 의해서 희생당한 여학생으로 바뀐다. 카메라는 시를 읊는 동안 미자가 다녀갔던 공간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분명 미자의 시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자살을 택한 여학생이 다리 위에서 카메라를 바라본다. 살며시 미소를 짓는 그녀는 분명 미자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관객인 우리를 보고 있다. 이 순간은 마치 단절되어 있던 두 세계가 예술을 통해 만나는 기적의 순간처럼 보인다. 이창동이 생각하는 예술의 힘은 거기에 있다. 내가 갈 수 없는 세계로의 도약. 나는 이 엔딩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아직 그 눈물의 진짜 이유와 의미는 찾지 못했다. 다만 그 눈물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다. 아마도 이 영화를 리스트에 넣은 것은 그 장면을 있게 한, 나를 눈물 흘리게 한 한국이라는 공간과 한국어라는 언어의 힘 때문일 것이다. 나의 첫 번째 한국 영화. 그 이유만으로도 나는 얼마든지 <시>를 이 리스트에 적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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