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세 가지 색 시리즈 리뷰

N부작,사부작

by 이민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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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들 아시다시피 세 가지 색 시리즈에서 각각의 색은 프랑스 국기의 색을 상징합니다. 프랑스 국기에서 파란색은 자유를, 하얀색은 평등을, 그리고 빨간색은 박애를 상징하죠. 세 영화의 주제 또한 프랑스 국기에서 각각의 색의 상징과 같은 의미를 공유합니다. 이 세 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블루>에서 줄리가 법정을 잠시 들여다 보다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화이트>의 초반부에서 카롤과 도미니크의 이혼 소송 장면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죠. 또한 세 영화에서 모두 재활용 쓰레기통에 공병을 넣으려고 하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드>의 마지막 장면에는 선박 사고에서 구출되는 일곱 명의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은 모두 세 가지 색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들이죠(이 장면은 <레드>의 핵심적인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장면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간적인 배경으로 모두 프랑스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폴란드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굳이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아마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영화를 만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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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이 세 가지 색 시리즈를 제작한 93년도와 94년도는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하고 서유럽 자본주의가 유입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러한 공산권의 붕괴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유입을 다룬 영화가 많이 있었습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전작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나 벨라 타르 감독의 ‘사탄탱고’ 같은 작품들이 있죠. 이러한 영화들은 새로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유입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대로 풍자하고 비판합니다. 세 가지 색 시리즈의 경우 서유럽의 자유주의 이념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서유럽을 대표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국기 색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유를 주제로 삼은 <블루>는 가족을 잃게 된 여자 주인공이 실존적인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진정 가족을 상실한 아픔에서 벗어나 실존적인 자유를 얻는 것은 스스로 그 실존적인 고통과 부딪히며 얻은 자유라기보다는 그 고통을 회피하고 잊어버리면서 얻는 자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줄리는 남편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이후에야 비로서 올리비에와 함께 남편의 유작을 완성시키고자 합니다. 이것은 남편의 죄를 이용하여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을 씻어내려는 태도입니다. 실존주의자인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볼 때 이는 ‘~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즉 어떠한 지향점을 향한 적극적인 자유가 아닌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소극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죠.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현대인들의 자유가 이러한 소극적 자유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블루>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는 파란색의 색채는 상실의 색이면서 치유의 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럽연합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줄리의 남편인 파트리스가 유럽통합을 기념하는 곡을 쓰다가 사망하게 된 것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이는 키에슬로프스키가 세 가지 색 시리즈에서 자유, 평등, 박애 라는 아름다워보이는 이념의 공허함을 비판하는 것처럼 유럽 연합이라는 이상적으로 보이는 공동체의 출범에 대한 냉소와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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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등을 주제로 삼은 <화이트>에서 평등도 무언가 뒤틀리고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주인공인 카롤은 도미니크에게 이혼 당하고 폴란드로 돌아온 뒤 도미니크와 다시 결합하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고 난 뒤 그는 가짜로 장례식을 치뤄 도미니크를 폴란드로 오게 만들고 그녀를 자신을 살해한 범인으로 몰리게 만들어 교도소에 수감시킵니다. 이는 도미니크를 자신과 같은 위치로 전락시켜 평등을 만드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계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이라 할 수 있죠. 즉 <화이트>는 이러한 결과적 평등을 위해서는 상대방보다 관계적으로는 더 우위의 상태에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하며 평등이라는 이념이 지는 모순과 공허함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박애를 주제로 삼은 <레드>의 경우 언뜻 보면 주제와 정확히 일치되는 내용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박애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을 뜻하죠. 극 중에서 발렌틴은 이웃집을 도청하는 노 판사를 혐오하지만 점차 그를 이해하면서 친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스토리는 언뜻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점차 서로에 대해 이해해 가면서 인간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박애의 의미와 일치하는 내용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드>에서는 유일하게 다른 두 편과 달리 재활용 쓰레기통에 공병을 넣으려는 노인을 보고 그를 직접 도와주게 되는데 이러한 행동도 박애주의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죠. 그런데 극의 마지막 장면에는 노 판사의 추천으로 발렌틴이 타고 있던 페리호가 사고 난 뒤 기적적으로 구출된 일곱 명의 승객이 구조되는 중계 장면을 노 판사가 보게 되는 장면인데 이 일곱 명의 승객은 발렌틴을 포함하여 모두 세 가지 색 시리즈의 주요 인물이죠. 아마도 이 장면을 본 노 판사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이 점을 이용해 박애라고하는 이념의 공허한 내면을 보여줍니다. 앞서 말했듯이 박애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인데 구출되는 일곱 명이 모두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 과연 진정한 박애인가라고 감독은 질문합니다(<레드>는 사실상 이 한 장면을 위해 90분 넘게 칼을 갈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4. 이처럼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본질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감독인 것 같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두 영화 모두 TV 시리즈 영화인 ‘십계’ 연작에서 따로 장편 영화화한 영화입니다)도 사랑과 살인에 본질을 굉장히 깊숙하게 관찰하고 탐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죠. 그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색 시리즈 역시 자유, 평등, 박애 라는 이념에 대해 본질을 깊숙이 바라보고 허울을 벗겨내는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현대 서유럽 자유주의 이념의 실체와 그 이념들을 그저 보편적인 가치라고 믿으면서 정작 그 이념들에 대한 깊은 숙고를 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보시는 분들에 따라서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들이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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