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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Nov 12. 2019

82년생 김지영 리뷰

이 영화의 윤리성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영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은 글입니다. 따라서 보시는 분들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필자의 정치적 견해도 일부 담겨 있습니다.



1. 현대 영화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단연 페미니즘일 것이다.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페미니즘은 영화 이론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고 수많은 영화의 핵심 테마가 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여러 형태의 페미니즘 걸작들이 탄생하였고 영화계는 더욱 풍부한 다양성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사실 그동안 주목할만한 페미니즘 영화가 한국에서는 많이 나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여성 캐릭터가 주연인 영화는 많아도 페미니즘적 함의를 띄는 영화는 거의 없었다. 시대적 흐름을 따라 한국 사회에도 페미니즘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면서 이러한 페미니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갈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하였다. 원작 소설부터 여러 논란이 있었던 이 작품은 개봉하기 전부터 극단적인 지지 세력과 비판 세력으로 나뉘었고 영화의 완성도보다 영화 개봉 자체가 큰 논란이 되었다. 한 가지 전제를 깔고 들어가자면 나는 이러한 양상이 옳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영화를 지지하든 비판하든 우선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태도이다. 그것에 대한 평가 없이 맹목적인 지지 혹은 비판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우선 관람한 뒤 합리적인 지지와 비판을 통한 토론이 장기적으로 이 영화에도, 그리고 영화계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기 전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안고 들어갔다. 영화의 주제 자체는 이미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주제를 어떠한 형식으로 풀어내는지가 이 영화에서 중요해질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영화를 관람한 후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 자체 때문이 아닌 영화의 태도와 형식 때문이다.


2. 82년생 김지영에 대하여 가장 많이 하는 표현 중 하나는 사례 모음집이라는 표현이다. 이 영화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례들이 나타나 있다. 육아휴직으로 인한 경력 단절, 성차별적 시선들, 공중 화장실 몰래 카메라, 각종 집안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이러한 사례들의 나열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사는 것에는 충분히 효과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례들 만을 모아놓은 결과 여러 부작용이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 우선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구분이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가장 큰 비판 중 하나는 (기성 세대인 대현의 어머니 정도를 제외하고) 여성을 전부 선하게 묘사하고 대현을 제외한 남성을 전부 위선적이고 악인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의 사례들을 나열하는 이 영화의 작법은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들을 악인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 아니, 정확히는 남성들을 모두 악하게 본다기보다는 그러한 남성들만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이분법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거의 모든 페미니즘 영화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남성이 언제나 가해자의 위치에서 여성들을 억압하고 차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이분법이 문제되는 이유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1차원적인 이분법이라는 점이다. 여기서의 이분법은 단순히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을 겉으로 드러내는 용도로만 쓰인다. 이분법을 반드시 사용해야만 했다면 <델마>나 <안티크라이스트>에서와 같이 창의적으로 비틀린 화법을 사용하거나 최소한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구조나 인식이 여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지 등을 생각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의 이분법은 노파심으로 가득 차 있다. 무조건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바쁘고 그러한 노파심은 영화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이러한 노파심은 구조뿐만이 아니라 대사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난다. 특히 후반부에 카페에서 김지영이 자신을 “맘충”이라 비하하는 인물에게 다가가 이 영화의 주제를 연설하듯이 읊조리는 대사는 이러한 노파심의 절정을 보여준다. 노파심은 곧 감독 스스로가 주제를 깊이 있고 창의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의 반증이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관객이 알아줬으면 하는 조바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단순하게 메시지를 전달만 하는 것은 영화의 역할이 아니다. 정말 좋은 영화는 답을 내는 영화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드는 영화이다.



3. (주관적인 견해로 볼 때) 페미니즘 영화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다. 하나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나 <레이디 맥베스>처럼 여성들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남성들의 세계를 벗어나거나 정복하여 자신들의 주체성을 스스로 회복하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행복>이나 <비브르 사 비>처럼 부당한 사회 구조와 인식이 어떻게 여성을 파멸로 이끄는 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이 중 어느 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까? 화법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후자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서는 전자의 방식을 택하며 여성들도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듯한 선언을 하며 마무리 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택하더라도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한 가지. 여성의 주체성이다. 전자의 방식을 택한다면 이러한 주체성은 영화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후자의 방식을 택하더라도 최소한의 주체성은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 주체성을 인물에게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화가 인물을 착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82년생 김지영의 또 다른 큰 문제점은 영화가 인물을 착취하듯이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는 김지영이라는 인물을 내내 고통 속에 가둬놓고 이를 빠져나오고자 하는 움직임을 모두 차단해 버린다. 왜?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사례 모음집이다. 즉 김지영은 수많은 사례의 굴레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영화 속에서 김지영은 계속 다른 인물에 빙의 되는듯한 행동을 보인다. 김지영이 빙의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주변에서 함께 억압 받아온 여성들이다. 다시 말해 김지영이라는 인물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 여성들을 대변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봐야 할까? 이렇게 특정 인물이 어떤 집단을 대변하는 인물로 설정되는 경우는 우리도 많이 봐왔다. 가령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 3부작에서 여성 주인공과 남성 주인공은 특정 개인이라기 보다는 감독 스스로가 생각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표하는 동시에 감독 자신의 ‘아니마’가 투영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지영도 그런 인물일까? 하지만 그러한 관점으로 바라보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해 보인다. 어떤 것이? 인물의 주체성.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 3부작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위악적으로 묘사될지 언정 자신들만의 주체성을 가지고 남성들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투쟁한다(그렇기에 나는 이 3부작을 페미니즘 영화라고 확신한다). 즉 여기서 여성 주인공들은 감독의 생각이 투영된 인물들이지만 그러한 최소한의 설정만을 가지고 세계 속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반면 82년생 김지영은 감독이 세계 자체를 구체적으로 설정해 놓은 뒤 인물에게 아무 주체성도 부여하지 않고 세계 속에 던져 놓는다. 김지영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계를 벗어나고자 할 때마다 감독이 개입하듯이 인물의 행동을 막는다. 김지영의 재취업을 위해 대현이 육아휴직을 신청하고자 할 때도 시어머니가 방해하고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자 할 때도 대현이 막는다. 그리고 김지영은 끝없이 고통받는다. 이렇게 수많은 사례 속에 인물이 갇혀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지영은 이 시대 여성들을 대변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즉 감독이 인물에게 직접 투영한 대표성이 아닌 강제적인 대표성을 띄는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현시대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인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만 한다.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고 인물을 굴레 속에 가둬두는 것은 착취이면서 학대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불편한 진짜 이유는 여성과 남성 간의 이분법적인 대립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보다는 이러한 인물에 대한 학대에서 오는 불편함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4.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직시한다는 모티브가 중요하게 나온다. 여성이 자신의 고통과 그 원인을 직시하고 이를 통해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영화의 저변에 깔려 있다. 후반부의 정신과 상담에서도 의사는 치료를 위해 찾아왔다는 것 자체로 치료가 성공적일 것이라는 말을 통해 이를 암시한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먼저 이 직시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김지영은 종종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채는 사람은 남편 대현이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를 먼저 찾아간 것도 역시 대현이다. 그리고 김지영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대현이다. 다시 말해 김지영이 고통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는 결국 남성이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상황에서 여성들 간의 연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상한 특징이 있다. 영화에서 김지영이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고자 했던 순간들은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언제나 김팀장이나 미숙과 같은 주체적인 여성들이 곁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과 연대하고자 할 때마다 영화가 개입하여 이들을 막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지영이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는 순간에는 남성인 대현이 곁에 있다. 물론 대현은 극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남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대현 역시 남성이다. 대현이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그가 여성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 인물이 좋은 성품을 지닌 인물일 뿐이다. 결국 고통을 직시해야 하는 순간에 여성 대신 자비로운 남성이 있다는 것은 약자들 간의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성들 중 자비롭고 공감 능력이 있는 일부 남성의 도움에 손을 벌리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에서 김지영의 주체성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화가 인물을 배려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때에는 인물 스스로가 혹은 인물과 같은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최소한의 배려마저 저버리고 사회적 강자인 남성의 손을 빌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백 번 양보해서 어쨌든 김지영은 자신의 고통을 직시했다. 그리고 후반부 카페에서도 거의 처음으로 (노파심이 많이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자신을 비하하는 남성과 당당하게 맞서 이겨냈다. 그리고 엔딩. 시간이 흘러 김지영은 자신의 꿈인 소설가의 꿈을 이루었고 대현은 딸을 돌보고 있다. 이것은 해피 엔딩일까? 무언가 생략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사이의 과정. 도대체 김지영은 어떻게 해서 소설가가 된 것일까? 그리고 대현은 어떻게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두 번째 질문. 과연 직시만으로 충분한가? 여성이 자신의 고통과 자신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직시했으니 모든 문제는 해결될 일만 남은 것인가? 앞으로의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것이 불 보듯이 뻔한데 영화는 그 사이 여러 고난이 있었을 과정을 생략해 버린다. 여기서도 영화는 끝내 김지영을 배려하지 않았다. 마치 그동안의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듯한 주체성. 이 엔딩에서 느껴지는 것은 안일함뿐이다. 김지영의 주체성은 스스로가 투쟁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닌 영화가 준 것이다. 왜? 고통을 직시했으니 이제 충분한 것인가? 그렇다면 직시한다고 해서 여성들에 대한 수많은 차별과 억압이 바로 사라질까? 직시하고 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듯한 영화의 안일한 대답. 이 영화가 불편한 또 다른 이유이다. 영화는 문제의 해결을 여성들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 스스로 안일한 답을 내고 끝내 버린다. 그렇기에 심지어 나는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까지 한다.


5. 82년생 김지영이 내세우는 주제의식 자체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여성들에 대한 수많은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형식의 문제이다. 형식에 있어서 82년생 김지영은 철저히 비윤리적인 영화이다. 정말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이렇게 안일한 영화가 아닌 형식적으로 윤리성을 갖춘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영화만을 보고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즘 영화에 반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새롭고 재능 있는 여성 감독과 여성 영화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언젠가 한국에서도 흔쾌히 모두가 박수칠 수 있는 페미니즘 걸작이 탄생하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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