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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May 16. 2020

파괴와 고통의 미학

라스 폰 트리에 감독론

*이 글에는 감독의 영화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읽으시기 전 이 점을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내 작품을 사랑한다면, 나는 실패한 것이다.”-라스 폰 트리에


1. <살인마 잭의 집>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잭이 네 번째 희생자인 심플을 살해하기 직전 그녀에게 늘어놓는 말. “왜 늘 남자가 잘못이라는 거야? 남자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뜻이야. 여자는 늘 피해자잖아? 남자는 언제나 범죄자고 말이지”.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여성에 대한 조롱처럼 들리기 때문이 아니다.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이 그동안 일궈놓은 세계, 그 세계를 이 한마디로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사뿐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에 걸쳐서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스스로 비하하는 듯한 표현들이 넘쳐난다. 왜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러한 전략을 들고 나온 것일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살인마 잭의 집>은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예술적 지향성에 대한 선언과도 같은 영화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던 자신의 예술관에 대하여. 그것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바뀌지 않을 자신의 예술관에 대한 정치적 선언이다. 그의 예술관이란 무엇인가? <살인마 잭의 집>의 잭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인간의 생명부터 관객의 통념, 예술의 존재론과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영화를 통해 파괴야말로 자신의 예술의 존재 이유라고 강력하게 말한다.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말할 것이고, 그리고 과거에도 그래왔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파괴하였고, 그 파괴가 어떻게 그의 예술적 세계관을 구축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2. 라스 폰 트리에의 초기작은 표현주의적인 영화들이었다. 데뷔작인 <범죄의 요소>의 화면은 오로지 검은색의 어둠과 주황색의 빛의 이미지들로 구성되어있다. <유로파> 역시 흑백의 화면에 탐미주의적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영화이다. 이 두 영화를 언급한 이유는 두 영화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데다가 초기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적 지향성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두 영화는 모두 주인공에게 최면을 걸면서 시작한다. <범죄의 요소>에서 최면은 기억을 불러들이기 위한 과정인데 반해 <유로파>에서 최면은 인물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거나 강제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면에 걸린 인물에게는 어떠한 자유의지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면으로 불러온 기억에는 왜곡이 있을 수 없고, 최면에 의해서 행동하는 자에게는 자율적인 행동이 있을 수 없다. 라스 폰 트리에는 왜 두 주인공에게 최면을 걸었을까? 두 작품의 공통점은 현대 유럽 문명과 악을 마주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의 염세적 비전이 담겨있다는 점이다(유럽 문명에 대한 염세적 비전은 미하엘 하네케와 닮은 부분이 있고 인간 이성에 대한 불신은 스탠리 큐브릭과 닮은 것처럼 보인다). 

<범죄의 요소>의 피셔와 <유로파>의 레오폴트는 악(惡)을 교화하기 위해 유럽으로 들어온 인물이다. 피셔는 유럽을 떠도는 살인마를 잡기 위해. 레오폴트는 전후 독일의 재건에 힘이 되기 위해. <범죄의 요소>의 피셔는 스승인 오스본의 저서 ‘범죄의 요소’를 신봉하는 인물이다. 그 책의 핵심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범인의 입장이 되어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굳게 믿는 피셔는 범인을 잡기 위해 범인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를 추적한다. 즉 그는 악과 하나가 되기 위해 악에 직접 뛰어드는 인물이다. 반면 <유로파>에서 레오폴트는 끊임없이 악을 회피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연합국과 테러리스트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두 가지의 방법론. 그러나 하나의 길. 피셔가 자발적으로 악의 길로 들어선다면 레오폴트는 최면이, 그리고 영화가 그를 악으로 이끈다. 자신의 의지이든, 타의이든 이제 완전히 악과 하나가 되어갈 때 두 인물은 다른 선택을 한다. 범인의 동선을 따라가던 피셔는 결국 범인처럼 복권 판매 소녀를 살해하고 스스로 범인이 된다. 자신의 스승 오스본과 같이. 그는 스스로 범죄의 요소를 갖추면서 악과 하나가 되었고 더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이해 불가능한 악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가 악이 되어 자기 자신을 파괴해야 한다. 어쩌면 피셔가 오스본을 보고 배운 것처럼 누군가도 피셔의 행적을 따라갈 것이고 악은 그렇게 대물림 될 것이다. 그 대물림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 이다. 정확히는 유럽의 죽음. 이상적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에 물들어가던 레오폴트는 결국 모든 선택을 거부하며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혼자만의 죽음이 아닌 자신이 일하던 기차에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유로파>는 그렇게 기차와 함께 강에 빠진 레오폴트의 죽음으로 끝난다. <범죄의 요소>에서 유럽은 홍수가 난 것처럼 온통 물로 잠겨있다. 그러니까 이건 침몰해가는 유럽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유럽과 함께 파괴되어가는 개인의 이야기이다. 악을 처치하려는 자가 악에 물드는 플롯. 이러한 플롯은 이후 라스 폰 트리에 작품들의 기본 토대가 된다. 


3. <범죄의 요소>와 <유로파>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남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오! 마이 보스!>나 <살인마 잭의 집>을 제외하면 그 이후의 영화들은 모두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범죄의 요소>의 킴이나 <유로파>의 카타리나는 모두 남성 주인공들을 악으로 이끌거나 그 자체로 악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시작으로 한 골든 하트 3부작이나 <도그빌>과 <만덜레이>, 그리고 우울 3부작은 모두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라스 폰 트리에 영화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가장 핵심적인 주제와도 닿아있다. 이러한 여성 중심적인 내러티브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골든 하트 3부작이다. 

라스 폰 트리에가 어린 시절 읽은 동화에서 이름을 고안한 이 3부작은 그의 초기작들 중 <범죄의 요소>와 상당히 유사한 플롯을 지니고 있다. 피셔가 악을 교화하기 위해 결국 악과 하나가 되듯이 골든 하트 3부작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고통을 향해 몸을 던진다. 골든 하트 이 3부작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라스 폰 트리에 작품 세계에서 핵심적 모티브가 되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성서적 모티브가 차용되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3부작의 여성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잃을 위기에 놓인 인물들이다. 그 무언가는 자신의 아들이나 남편과 관련된 것들이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베스는 남편인 얀이 사고로 죽을 위기에 처하고, <백치들>에서 카렌은 아들을 잃고, <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는 아들을 진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이때 여성 주인공들은 성모 마리아처럼 보이고 남성은 예수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수난과 구원을 성모 마리아의 시점으로 치환하여 만든 이야기이다.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를 구원할 수 있는가?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얀은 베스에게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고 그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주면 자신이 낳을 것이라는 이상한 제안을 한다. 지나칠 정도로 순수해 보이는 베스는 이 말만을 믿고 수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하고 결국 창녀로 몰려 마을에서 추방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건 마리아의 예수 잉태를 비틀어 만든 것이다.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처녀가, 누군지도 모를, 심지어 사람의 자식도 아닌 누군가를 임신했을 때 마리아가 느꼈을 고통. 성경(혹은 기독교인들)이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그 고통에 대한 응시. 베스(마리아)는 얀(예수)의 부활(혹은 탄생)을 위해 온 몸을 내던진다.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과 경건을 외치는 남성적(이성적) 세계는 그녀의 고통을 폄하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골든 하트 3부작 이후의 라스 폰 트리에 영화들에서도 세계는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 주인공들을 파멸로 이끈다). 그녀가 죽은 뒤 라스 폰 트리에는 부활한 얀이 아닌 얀을 위해 목숨을 바친 베스를 위해 종을 울린다. 예수의 고통과 수난을 대신 감내하는 마리아. 골든 하트 3부작의 여성 주인공들이 처연한 동시에 숭고한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백치들>의 카렌도 함께 백치 행위를 했던 모든 이들의 고통을 대변하고,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진의 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이는 어쩌면 위험한 방식이다. 타인의 모든 고통을 한 여성이 모두 감내하도록 하는 것은 영화적인 의미화를 위해 인물을 학대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에서 인물을 착취한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 것은 라스 폰 트리에가 특별한 효과나 감성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인물의 고통과 신념을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영화적 태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새로운 영화적 형식으로 이어진다. 1995년 그가 주창한 도그마 선언. 이 선언은 사실상 자신의 이전 영화들을 부정하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초기작들은 탐미주의적 이미지들과 장르 영화의 틀을 어느 정도 차용했다. 하지만 도그마 선언으로 그러한 초기작들의 지향성을 모두 포기하고 초기 영화가 구현했던 사실적 이미지들의 재현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이는 동시에 영화 역사에 대한 부정이며 파괴이다. 영화 역사 100년동안 축적해 온 모든 기술적 성취들을 부정하고 초기 영화의 순수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운동. 어쩌면 처음부터 이 선언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라스 폰 트리에가 부정한다고 한들, 시대는 흐르고 영화와 기술은 발전한다. 그 모든 흐름을 무시하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자본주의적 영화산업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장 뤽 고다르의 시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그마를 기초로 만들어진 <백치들>이 지향하는 미학적 목표는 도그마를 주창한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이 된다. 도그마 선언은 분명 리얼리즘 영화의 특성을 지닌다. 어떠한 쇼트에도 상상력을 허락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물과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카메라. 이건 일찍이 네오리얼리즘에서 시도한 바이다. 질 들뢰즈는 네오리얼리즘에 대해서 “행동이 마치 상황을 완결시키거나 제압하는 대신, 상황 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시네마 2(시간-이미지)]라고 말했다. <백치들>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 카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백치 그룹에 들어가게 되고 그 그룹은 곧 와해되어 사회 안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비관적인 전망과 함께 끝나는 대체적인 네오리얼리즘 영화들과 달리 <백치들>에서 카렌이 마지막으로 가족들 앞에서 백치 행위를 보여줄 때, 분명 희망 섞인 엔딩으로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렌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카렌의 행위가 상황을 결정적으로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러한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자 하는 인물의 숭고함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숭고함은 이미지의 왜곡 없이 인물의 고통을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백치들>의 카렌은 백치 그룹 속에서도 가장 큰 고통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아들을 잃는 고통. 예수를 잃은 마리아. 그 인물이 각자의 고통을 가지고 백치 행위를 했던 인물들의 고통을 대변한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예수의 자리로 간다(<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가 처형되는 순간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형식적인 이유는 도그마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라스 폰 트리에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동시에 그 고통을 미화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우울 3부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영화는 고통의 심연을 응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너무나도 불쾌하게 느껴지는 난교 파티 같은 장면일지라도 말이다. 


4. 골든 하트 3부작 이후 만든 <도그빌>과 <만덜레이>는 다시 한번 그의 이전 영화적 형식을 과감히 파괴한다. 사실 <어둠 속의 댄서>에서부터 그는 자신의 도그마 선언을 어겼다. 그러나 <도그빌>과 <만덜레이>, 이 2부작은 라스 폰 트리에의 모든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영화들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가 <도그빌>을 만들게 된 계기는 “미국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둠 속의 댄서>를 만드냐”는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비판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그는 화면 안에 뚝딱 미국을 만들어냈다. 연극 무대와 분필로 만든 미국. 자신의 도그마 선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영화. 두 영화는 사실상 연극 공연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다. 연극은 영화와 달리 공간적 한계로 인해 무대를 상징화 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인즉 창작자인 감독의 시공간적 상상이 모두 투영 가능한 공간이다. 이건 도그마 혹은 리얼리즘 영화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로케이션 촬영 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이다. 누군가는 어쩌면 여기서 세트 촬영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 <도그빌>과 <만덜레이>는 할리우드식 세트 촬영을 풍자하기 위한 영화로도 보인다. 수많은 CG와 특수효과에 가려진 녹색의 세트장. 하얀 분필과 몇몇의 소품들로만 이루어진 연극 무대. 아마도 라스 폰 트리에에게 있어 두 공간은 같은 공간처럼 보일 것이다. 이 풍자와 비판을 위해서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이 지켜온 미학적 원칙을 기꺼이 버리면서 이전에 자신이 나아갔던 극단적 영화 형식을 정반대로 바꾸어 또 다른 방향의 극단으로 나아간다. 

두 영화가 영화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인간성에 대한 사회학적 실험과 같은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두 영화는 모두 권력이 중요한 모티브이다. <도그빌>에서 그레이스는 도그빌 마을에 약자로 들어온다. 갱인 아버지를 피해 도그빌 마을에 들어온 그레이스가 꿈꾸는 삶은 모두가 평등하게 일하고 대우 받는 민주적인 삶이다. 하지만 무대 배경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의 혼란으로 가득했던 미국이다. 도그빌 마을은 도시와는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덕분에 그레이스는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마을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과 갱이 마을에 지속적으로 찾아오고, 미국의 혼란이 도그빌 마을까지 침입해 오면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변하기 시작한다. 약자로 마을에 들어온 그레이스를 평등한 위치에서 환영하던 마을 사람들은 그레이스에 대한 의심이 커지면서 이방인이라는 프레임과 함께 그녀를 다시 약자의 위치로 끌어내린다. 그리고 탈출을 시도한 그레이스에게 목줄을 채워 마을에 영원히 머물도록 한다. 집단에 영원히 소속되어야 하는 이방인. 사실상 흑인 노예의 삶이다. 강제로 끌려왔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왔든,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미국 백인 사회에서 이방인인 동시에 영원히 그곳에 속해 있어야 하는 노예이다. 결국 인간성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그레이스의 이상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리고 아버지가 도착한 날, 자유와 평등, 인간성을 외치던 그레이스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도그빌 마을을 불태우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그리고 그레이스를 착취하지 않은 개 한 마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도착한 그 마을에서, 결국 최후에는 개만이 남는다. 

<도그빌>에서 그레이스는 약자의 위치에서 출발한 것과 달리 <만덜레이>에서 그레이스는 주인의 위치로 만덜레이 마을에 들어온다. <도그빌>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출발점(두 영화에서 다른 두 배우가 2인 1역을 소화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마을이라면 그레이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라스 폰 트리에는 다시 한번 실험을 시작한다.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마을의 원래 주인을 몰아내고 아버지의 힘을 빌려 마을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그레이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자신의 이상인 민주적인 사회를 이룩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만덜레이의 흑인 노예들은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노예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이전 주인 덕분에 만덜레이가 안정적인 사회가 될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그들은 떠나려는 그레이스를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 아버지의 예언대로 횃불과 창을 들고 그녀를 쫓는다. 이 메시지는 자칫 위험한 정치적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자발적 노예론이 말이 안 되는 것은 라스 폰 트리에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위험한 소재와 메시지는 라스 폰 트리에가 바라보는 인간성과 사회의 성질에 대한 시선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도그빌>에서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고자 하고, <만덜레이>에서 약자는 강자에게 지배당하길 원한다. 완전한 평등과 민주주의는 그레이스의 이상으로만 남는다. 정녕 민주주의는 (니체의 용어로 말하자면) 노예 도덕에 불과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어떤 민주주의 사회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 모두가 말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강자와 약자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계급이 있다는 것이다(두 영화의 내레이션은 그 자체로 주술적이면서 숙명론적인 운명을 그레이스에게 부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이 어쩌면 라스 폰 트리에가 무대 배경을 미국으로 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고 자부하는,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자부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저 민주주의라는 껍데기 안에 인간 사회의 본질, 지배당하는 자와 지배하는 자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그 본연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았고 그 모습을 외면하지 않았다. 



5. <도그빌>과 <만덜레이>에서 인간 사회의 심연을 바라본 라스 폰 트리에는 그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렸다. 2009년 <안티크라이스트>를 공개하며 우울 3부작이 막을 올린다. 앞선 두 영화에서 보여준 극단의 형식에서 벗어나 초창기 자신의 탐미적이며 표현주의적인 영화로 회귀한 듯한 이 영화들. 이 3부작(그 중에서도 <안티크라이스트>와 <멜랑콜리아>)은 말하자면 골든 하트 3부작의 모티브와 소재를 <범죄의 요소>와 같은 초기작들의 탐미적 이미지와 내러티브에 합쳐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라스 폰 트리에가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고 살아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영화들 속 주인공들이 자기 파괴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우울증과 그 심연을 본격적으로 응시한다.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수위가 높고 보기 불편했으나 <안티크라이스트>와 <님포매니악>에 이르면서 그 수위는 극단을 달린다. 이 때문에 누군가는 이 영화들을 허장성세에 가득 찬 작품들이라고 비하하지만 그의 허세에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이 3부작은 그의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이미지와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우울 3부작은 그의 영화들 중에서도 남성성과 여성성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이전 골든 하트 3부작에서도 비슷한 모티브가 있었으나 우울 3부작은 이를 새롭게 해석한다. 골든 하트 3부작의 여성 주인공들이 모든 고통을 짊어지는 숭고한 마리아라면 우울 3부작의 여성 주인공들은 남성의 세계에 맞서 싸우는 마녀와 같은 존재들이다. 3부작의 남성 주인공들은 여성을 자신만의 틀에 가두어 이해하고자 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억압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여성 주인공들은 이러한 남성의 규정에 맞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고 남성의 세계와 부딪힌다. 골든 하트 3부작에서 여성들이 숭고하지만 결국 남성적 세계에 의해 파멸에 이르는 나약한 모습을 띄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이때 여성과 남성 인물은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자아가 투영된 인물들이다. 여성이 예술가이면서 우울증 환자인 라스 폰 트리에의 자아라면 남성은 기존 세계의 질서이면서 보수적인 세계인인 라스 폰 트리에의 초자아이다. 말하자면 이 3부작은 세계와 맞서는 우울증 환자인 예술가의 이야기이며, 초자아와 맞서는 자아의 이야기이다. 

한 번 더 반복하자면, 우울 3부작의 남성은 여성과 여성의 세계를 규정하는 자들이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남성은 심리치료사로서 여성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의 고통을 피라미드 안에서 도식화한다. <멜랑콜리아>에서 존 역시 과학자들의 말을 빌려 저스틴과 클레어를 안심시킨다. <님포매니악>의 샐리그먼은 이러한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인물이다. 이때 남성들은 자신들이 여성의 고통을 알 수 있고 그 고통으로부터 여성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보수적인 틀로 여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남성은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며 깎아내린다. 여성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이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에덴은 창세기의 에덴과 달리 고통과 소멸로 가득 차 있다. 여우는 자신의 몸을 뜯어먹고, 사슴과 새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도토리는 비처럼 떨어진다. 이처럼 고통으로 가득 찬 에덴의 통곡을 남성은 무시한다. <멜랑콜리아>의 저스틴과 클레어도, <님포매니악>의 조도 각자의 고통 속에서 사는 인물들이다. 남성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제멋대로 규정해 나갈수록, 여성은 그 규정을 거부하고 고통과 하나가 된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모든 규정을 거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여기서 고통은 여성의 정체성이자 실존적 증거가 된다. 그렇게 고통과 하나가 된 여성은 남성을 공격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의 고통은 단순히 아들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에덴에서 여성은 아들에게 신발을 거꾸로 신겼는데 이것은 아들을 죽이고 싶은 욕망이 다른 방향으로 발산된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은 아들이 창문 밖으로 떨어져 죽을 때 그 모습을 보고도 아들을 잡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아들은 예수로 비유되는데, 이 맥락에서 볼 때 여성(마리아)은 남성적(기독교적) 세계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아기의 죽음을 기다린 것이다. 고통의 심연을 마주본 여성은 곧 남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마리아이기를 강요받았던 여성은 마녀로서의 본성을 깨달은 뒤 마녀가 되어 남성의 모든 규정을 파괴한다. <멜랑콜리아>에서 이러한 파괴는 세계의 파괴로 이어진다. 영화의 대저택은 존의 집이다. 저스틴은 마이클과 결혼을 위해 대저택으로 찾아오지만 그 결혼을 거부한다. 결혼은 여성에 대한 또 다른 억압이다(결혼식 내내 그녀를 뒤따라 다니는 직장 상사 잭과 팀이 이를 상징한다). 억압에서 벗어나 우울증과 하나가 된 저스틴은 남성의 세계인 지구와 대저택을 파괴하고자 한다. 이름에서부터 우울증을 뜻하는 ‘멜랑콜리아’ 행성은 저스틴의 파괴적 욕망의 결과물이다. 존은 과학자들의 말을 믿으며 행성이 빗나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여성의 세계는 남성의 규정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결혼식 날 하늘에서 발견한 별 ‘안타레스’는 전갈자리의 알파별이다. 전갈자리의 전갈은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가 거만한 오리온을 죽이기 위해 풀어놓은 것이다. 이 전갈처럼 저스틴도 오만함으로 가득 찬 남성의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라스 폰 트리에가 투영한 자신의 자아이다. 하지만 전갈은 오리온을 죽이지 못한다. 오리온은 자신의 애인 아르테미스가 쏜 화살에 의해 죽게 된다. 존 역시 저스틴이 아닌 자신이 신봉하는 과학자들이 만든 약을 먹고 자살한다. 그리고 남성의 세계에 동화되어 있던 클레어는 저스틴과 함께 죽으며 그녀의 세계와 하나가 된다. 클레어는 결혼식 내내 식순에 집착하던 남성적인 인물이었지만 멜랑콜리아 행성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을 느끼며 저스틴처럼 행동한다. 존은 몰랐지만 클레어는 자신에게 다가올 파괴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클레어는 저스틴,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함께 멜랑콜리아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그 파괴 안에 존은 없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 세계 안에 존을 위한 자리는 없다. 

우울 3부작이 굉장한 영화들인 이유 중에는 독창적인 상징 체계에도 있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기독교적 상징을 다루는 방식이나 희망적인 상징인 생명을 고통과 절망에 대한 상징으로 비튼 것은 과격하고도 창의적인 방식들이다(이는 분명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증과 염세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님포매니악>의 조는 샐리그먼이 말하는 모든 것(바흐의 음악, 낚시 등)을 섹스에 대한 상징으로 치환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세 영화가 섹스를 다루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영화들에서 섹스는 인물의 성적 욕망이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우울 3부작에서 섹스는 죽음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여성이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소유하는 것과 달리 섹스를 통한 쾌락은 여성을 남성적 세계관에 종속시키는 증거이다. 섹스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존재해야 가능한 행위이다. 흥미로운 점은 세 영화에서 먼저 섹스를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여자라는 점이다. <안티크라이스트>는 남녀의 섹스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기가 죽은 뒤 섹스를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여성이다. 섹스의 쾌락은 여성이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도피처이다. 그러나 남성의 말대로 “섹스는 일시적인 해소책일 뿐”이다. 섹스를 통해 고통으로부터 도피하던 여성은 점차 섹스에서 멀어지며 남성이 필요 없는 자위를 통해 쾌락을 느끼다가 마침내 쾌락을 거부하고 고통을 소유하면서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남성의 성기를 짓이기고 자신의 음핵을 잘라버린다. <멜랑콜리아>에서는 두 번의 섹스 장면이 나온다. 첫 번째는 전반부에서 팀과 섹스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전에 자신의 남편 마이클과의 섹스를 거부하던 저스틴은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팀과 골프장에서 섹스를 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섹스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행위라면 여기서의 섹스는 그 자체로 고통이다(라스 폰 트리에는 이 장면에서 어떠한 쾌감도 느끼지 못하도록 롱쇼트로 촬영했다). 자신의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섹스는 곧 남성적 세계에 대한 거부이자 대항이다. 이 장면 이후 저스틴은 자신의 직장 상사인 잭에게 솔직한 악담을 퍼부어 이혼의 계기를 준다. 두 번째 섹스는 후반부에서 지구로 다가오는 멜랑콜리아 행성의 빛을 나체로 쬐는 장면이다. 이것은 사실상 자위 행위이면서 고통과의 섹스이다. 자신의 근원적 고통인 우울과 섹스를 하면서 저스틴은 자신의 고통을 소유한다. <님포매니악>은 이러한 모티브가 영화의 핵심적 소재이다. 조는 어린 시절부터 섹스의 맛을 알게 된 색정증 환자이다. 그녀는 섹스의 쾌락에 도취된 인물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쾌락은 분명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쾌락은 아니다. <멜랑콜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의 쾌락은 곧 고통이다. 정확히 그녀의 고통은 님포매니악이라는 사실 그 자체와 그녀에 대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그녀는 자신의 고통 속으로 더욱 깊게 들어간다. 이때 조의 섹스는 감정이 배제된 섹스이다. 그녀와 섹스를 하는 남성들은 모두 알파벳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곧 그녀의 섹스가 특정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쾌락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추잡한 욕망을 사랑한다고 선언하면서 고통과 하나가 된다. 이 영화에서 샐리그먼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조도 (알파벳으로 지칭되지 않는)샐리그먼을 인생 최초의 친구라고 까지 부른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샐리그먼 역시 자신과 섹스를 나눈 수 천 명의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조가 그를 살해하는 것은 남성적 세계와의 화해 가능성과 상호 간의 이해 가능성을 차단하는 행위이다. 결국 샐리그먼의 집을 뛰쳐나간 조는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남성적 세계는 이 영화들의 마녀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안티크라이스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마녀들은 계속해서 세상과 싸울 것이고, 라스 폰 트리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심연과 싸울 것이다. 


6. 마리아가 됐든 마녀가 됐든, 여성 주인공들에게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던 라스 폰 트리에는 가장 최근작인 <살인마 잭의 집>에서 이러한 내러티브를 뒤집어 버린다. 잭이 버지에게 자신의 과거 살인 행각을 고백하는 액자 형식의 구조는 <님포매니악>의 구조와 유사하다. 또한 과거에 저지른 자신의 행위를 상기하는 것은 <범죄의 요소>와도 닮아 있다. <범죄의 요소>의 피셔는 악을 추적하기 위해 악에 빠져드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점점 더 능숙하고 잔인한 살인마가 되어가는 잭과 유사한 인물처럼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잭이 언제 살인마가 되는지를 봐야 한다. 그의 첫 번째 희생자는 이상하리만큼 무지한 여성이다. 자신의 도구 잭을 고치기 위해 차를 얻어 탄 그녀는 차 안에서 계속 잭을 자극하는 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잭을 연쇄살인범처럼 보인다고 말하더니 마치 잭을 위하듯이 살해 방법이나 알리바이에 대해서까지 말한다. 그러나 잭은 성가신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죽이지는 않는다. 잭을 고친 후 차를 수리하던 중 다시 잭이 망가지자 그녀는 다시 잭을 애원하여 철공소로 향한다. 그때 그녀가 하는 말. “했던 말 취소할게요. 연쇄살인범처럼 보인다는 거요. 살인자라기에는 너무 좀스럽잖아요”. 이 말을 들은 직후 잭은 그녀의 말처럼 망가진 잭을 들고 그녀의 머리를 가격해 살해한다. 이 이상한 결과. 자신을 살인마라고 할 때는 가만히 있던 잭이 살인마라는 규정을 철회하는 순간 살인마가 된다. 이 장면에서 정말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잭의 행동 자체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바뀐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라스 폰 트리에 영화들에서 (초기작들 정도를 제외하면) 남성은 규정하는 자이고, 여성은 규정을 당하는 동시에 그 규정을 거부하며 대항하는 인물이다. 그것인 직전 작품들인 우울 3부작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특징이다(사실 우울 3부작이 그러한 특징을 가장 잘 드러냈지만 골든 하트 3부작의 여성 주인공들이나 <도그빌>과 <만덜레이>의 그레이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살인마 잭의 집>에서는 이것이 정반대로 바뀐다. 여성은 잭은 살인마라고 끊임없이 규정하지만 잭은 그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잭이 살인마가 되는 순간은 여성이 잭이 살인마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이 남성을 최초로 공격하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여성이 남성을 공격하는 순간은 남성이 공포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그녀 자신이라고 쓰면서 그녀의 본성을 알게 된 순간이다. 그러자 여성은 그 규정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마녀가 된다. 반면 잭은 자신에 대한 규정이 맞는 순간에는 그 규정을 받아들인다. 그러다 규정이 어긋나는 순간 원래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 살인마가 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질문과 마주쳐야 한다. 왜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영화적 세계의 핵심이었던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뒤바꾼 것인가? 

그건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대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살인마가 된 잭은 본격적으로 살인을 위해 사람들과 장소를 물색한다. 이번에도 그의 희생자는 여성이다. 그리고 이후에 나오는 모든 희생자들은 여성이다. 여성의 집으로 찾아간 잭은 자신을 경찰이라고 말하다가 보험사 직원이라고 말을 바꾸고 누가 봐도 수상한 궤변들을 쏟아낸다. 그런데 여성은 연금을 올려준다는 말에 의심스러워 보이는 그를 집으로 들인다. 집 안에 들어간 잭은 갑자기 화를 내더니 그녀를 살해한다. 표면적으로 그가 화를 낸 이유는 문 앞에서 문전박대 당했기 때문이지만 사실은 다른 곳에 있다. 잭은 그녀가 문을 열어준 것에 화가 난 것이다. 정확히는 그 많은 궤변을 듣고도 돈 얘기가 나오자 문을 열어준 그녀의 무지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실제 보험자 직원이라고 생각한 그녀의 규정에 분노한 것이다. 세 번째 희생자도, 네 번째 희생자도 지나치리만큼 무지하고 연약한 여성들이다. 왜 이리도 희생되는 여성들은 무지한가? 라스 폰 트리에의 전작들에서 여성은 진실되고 숭고하며 (어떤 의미에서는)강인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여성 주인공들의 서사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 골든 하트 3부작에서도, <도그빌>과 <만덜레이>에서도, 우울 3부작에서도 여성은 남성과 남성적 세계와 싸우지만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마리아는 세계로부터 쫓겨나고, 그레이스의 실험은 실패하고, 마녀는 불태워지거나 스스로를 파괴한다. 이는 관객과 세계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의 염세적 비전이 관철된 결과처럼 보인다. 예술가 라스 폰 트리에는 끊임없이 우리의 이성과 통념에 맞서 영화를 통해 대항하지만 세계와 관객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잭의 여성 살해는 이전 작품들의 세계관에 대한 파괴이다. 과격해 보이지만 아무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세계와의 작별. 이를 위해 심지어 그 세계를 만들었던 라스 폰 트리에 자신조차 풍자한다. 네 번째 희생자인 심플을 살해하기 전 그녀는 잭에게 자신의 이름을 재클린이라고 한다. 그러자 잭의 대답. “단순한 네 부모한테 그런 상상력도 있었어?” 그녀의 부모는 누구인가? 여성에게 자신의 자아를 투영했던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이다. 그러니 잭의 파괴는 곧 라스 폰 트리에 자신에 대한 파괴이기도 하다. 잭이 살인마가 되는 순간은 여성이 규정한 틀에서 벗어날 때이다. 살인마가 아니라는 규정에서부터 보험사 직원, 사냥꾼, 연약한 애인까지. 마지막 살인을 제외한 네 번의 살인은 모두 잭이 여성에게 자신을 다른 신분으로 속여 접근했기에 가능했다. 여성은 그 가짜 신분으로 잭을 규정한다. 이건 이제껏 자신이 만든 작품들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을 거부하면서 잭은, 라스 폰 트리에는 살인마가 된다. 그렇기에 이는 자신에 대한 파괴이면서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파괴를 통한 창조. 이것이야말로 라스 폰 트리에의 진정한 예술관이다. 

잭 역시 파괴를 통해 창조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이 살해한 시체들을 모아 냉동창고에 보관한다. 엔지니어이면서 건축가인 그는 집을 건축하고 싶어하지만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집은 지어지지 않는다. 그가 집을 짓게 되는 순간은 그의 살인이 멈추는 순간이다. 그의 다섯 번째 살인은 이전 살인들과 달리 남성들에 대한 살인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살인마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본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전의 라스 폰 트리에의 인물들에게 그랬듯이 파괴적인 그의 인물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살인이 자신에 대한 파괴이자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파괴라면 남성에 대한 살해는 남성적 세계, 즉 이성과 통념에 대한 파괴이다(SP가 잭을 경찰에 신고한 죄는 살인이 아닌 강도질이다). 세계는 자기 파괴는 허락해도 세계에 대한 파괴는 허락하지 않는다. 버지가 나타나는 순간도 그가 잡아온 남성들을 살해하기 직전이다.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게 된 잭은 떠나기 전 냉동창고에 있는 시신들을 모아 집을 완성한다. 비록 남성들의 시신은 없지만 자신이 살해한 여성들과 아이들로 이루어진 집에 들어간 잭은 버지와 함께 지옥으로 향한다. 지옥은 잭과 같은 인물들을 처벌하기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문뜩 생각나는 의문점. 과연 잭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진정한 처벌이 될 수 있는가? 잭은 무신론자를 넘어서 신에 대항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영혼이 아닌 육체의 아름다움을 믿고 육체를 통해 예술을 하는 인물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자를 기독교의 방식으로 처벌하는 것. 육체를 신봉하는 자의 영혼을 벌하는 것. 세계는, 그리고 버지는 처음부터 잭에게 패배했다. 잭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던 버지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뒤 그를 ‘안티크라이스트’라고 말하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 버지를 따라가던 잭은 지옥의 최하층으로 가는 용암을 보고 난 후 건너편에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단을 발견한다. 그 계단으로 가기 위해 벽을 타며 나아가는 잭.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지옥의 최하층으로 떨어진다. 이때 갑자기 화면은 네거티브 필름으로 바뀐다. 잭이 빛 속의 어둠을 볼 수 있다고 말한 필름. 잭에게 지옥은 고통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 받는 영혼과 죽은 육체로 가득 한 그곳은 잭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일 것이다. 그리고 지옥에서 내내 들려오는 날카로운 고통의 소리. 우리는 그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인 있다.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 잭은 슈투카가 가장 아름다운 비행기라고 말한다. 그것은 슈투카가 급강하하는 순간 조종사가 정신을 잃기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파괴의 끝은 자기파괴이다. 잭은 슈튜카의 날카로운 굉음과도 소리로 가득한 지옥으로 떨어지며 스스로 슈튜카가 된다. 그렇게 자신을 파괴하는 잭. 어쩌면 잭 역시 다른 라스 폰 트리에의 주인공들처럼 관객과 세계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잭을 어떻게 생각하든, 잭은 언제나 새로운 집을 지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준 잭에게 네거티브 필름과 “Hit The Road Jack”이라는 노래를 선물하며 우리를 다시 한번 조롱한다. 


7. 라스 폰 트리에만큼 니체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예술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니체의 유명한 명제.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랜 시간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본다”.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과 세계의 심연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예술가이다.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어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누군가에게는 자아도취적으로만 보이는 수많은 작품들을 우리 앞에 선보였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알고 있음에도 심연을 계속해서 바라볼 것이고 지옥에서 새로운 집을 지을 것이다. 니체가 망치를 들고 철학을 했듯이 라스 폰 트리에도 망치를 들고 영화를 만든다. <안티크라이스트>는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친다”는 조롱과도 같은 헌정 자막으로 끝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오히려 내게 영화는 하나의 별처럼 보입니다. 주변과 단절되는 그 충격과 그 어딘가에 입구가 있으리라는 희망 사이에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건 영화를 예술이라고 믿는 감독이라면, 그래서 그 시작은 하나의 강박관념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그것에 관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불안이 없다면 그려낼 이야기가 없으며, 희망이 없다면 형식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어쩌면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러한 타르코프스키의 믿음을 가장 잘 실천하는 감독일 것이다. 다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기적을 위해 존재한다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파괴와 고통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를 통해 신에게 다가가고자 했다면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를 통해서 신을 넘어서는, 초인이 되기를 꿈꾸는 인물이다. 나는 그가 앞으로 지옥에서 가져올 다음 영화가, 그 영화가 가져올 파괴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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