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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ul 06. 2020

부력 아트나이너 리뷰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하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이런 장면이 있다. 어선에서 청소를 하던 차크라(삼 행)는 바닥에 남아있는 게 한 마리를 발견한다. 게를 집어 들고는 가지고 논 뒤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카메라는 깊은 바다 속으로 돌아가는 게를 오랫동안 담아낸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다음 장면 때문이다. 그물을 정리하던 중 회로 먹을 만한 물고기를 발견한 차크라는 물고기를 때려 죽인 뒤 선장인 롬 란(타나웃 카스로)에게 가져다 준다. 이 행위는 이후에도 몇 번 반복된다. 연약해 보이는 게는 바다로 돌아가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큰 물고기는 배 위에서 먹힌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이것이 차크라와 다른 선원들의 처한 상황의 메타포로 나타난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앞의 두 장면과 정반대의 장면도 존재한다. 배를 항구에 세워놓은 동안 바다에서 휴식을 취하던 차크라는 가라앉지 않고 바다 위에 떠다닌다. 잠시 뒤 배가 출발하고 난 후 선원 한 명이 도망간 것을 눈치챈 롬 란과 일행은 그 선원을 바다에서 끌어올려 몸에 쇠사슬과 무거운 돌을 묶어 바다에 던진다. 그리고 가라앉는 모습. 가라앉을 때 선원이 발버둥치면서 생기는 거품은 새우잡이 배의 포말과 디졸브 되면서 힘을 잃는다. 영화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차크라와 다른 선원들을 대비시킨다. 차크라는 다른 선원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차크라는 다른 선원들, 특히 자신과 함께 새우잡이 배로 잡혀온 케아(모니 로스)와 다르게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불만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장 당당하게 선장에게 말한다. “돈은 언제 주나요?” 그러자 선장의 대답. “태국 가면 한 번에 줄 거야”. 이건 돈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돈을 받고 싶다면 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배에서 버티라는 것이다. 즉 이 지옥 같은 배의 완전한 선원이 되지 않는 한 어떤 노동의 대가도 받을 수 없다. 그리고는 곧바로 차크라에게 성매매 여성의 사진 한 장을 책에서 찢어 건네준다. 차크라가 떠난 뒤 선장이 하는 말. “밤새 자위하겠네”. 우리는 차크라가 다른 선원 한 명이 자위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차크라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위하지 않는다. 자위를 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 섹스하는 것이다. 롬 란은 그 상상 속 자리에 성매매 여성을 자리하게 하면서 차크라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리를 욕망하도록 만든다. 그러니 롬 란이 “앞으로 어린 것들만 데려 와야겠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일을 묵묵히 해서가 아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상상하도록 하면서 이 지옥 같은 순환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어린 차크라와 다른 성인 선원들의 차이점이다. 차크라나 성인 선원들이나 새우잡이 배에 도착한 목적과 이유는 같다. 돈을 벌기 위해 왔다. 하지만 이런 곳인 줄인 미처 몰랐다. 그저 속아서 온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성인의 선원들은 하루빨리 그 배를 탈출하고 싶은 마음만이 전부이다. 그들은 그 지옥에 자신들의 삶을 바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책임져야 하는 다른 세계, 가족의 세계가 있다. 돈을 벌지 못하고 고된 노동만이 있는 이 곳은 아무 의미 없는 세계이다. 하지만 차크라는 책임질 가족이 없다. 오히려 먼저 가족을 빠져나온 인물이다. 그 소년에게 가족은 안식처가 아니라 또 다른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세계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것이 로드 라스젠 감독이 바라보는 현대 노예 노동의 가장 큰 문제점일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모든 곳이 새우잡이 배와 같은 곳이다. 선택지가 사라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새우잡이 배 위에서 생을 보내는 것뿐이다. 그 사이 또 다른 아이들이 납치되어 오고 그렇게 배는 매일 출항한다.


2. 사실 영화 속에서 이 순환을 먼저 깨뜨리려는 인물은 차크라가 아니라 케아이다. 힘들게 일하고 있는 와중에 롬 란이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자 참지 못하고 바다에 볼 일을 보고 있는 롬 란을 밀어버린다. 그러자 다른 일행들이 케아를 제압하고 분노한 롬 란은 그를 배에 매달아 말 그대로 찢어 죽인다. 선장은 케아를 죽일 때 배 운전을 차크라에게 맡긴다. 케아는 왜 실패하는가? 케아가 성공하지 못한 일을 후에 차크라는 성공한다. 이 질문은 왜 차크라는 성공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두 인물의 같은 행동은 여러 가지로 대비된다. 케아는 낮에, 차크라는 밤에 행동하고 케아가 우발적으로 행동했다면, 차크라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케아는 선장을 먼저 죽이려고 했지만 차크라는 다른 롬 란의 일행들을 먼저 죽인다. 그리고 하나 더. 차크라는 롬 란과 일행들을 죽이기 전에 이미 살인을 저지른다. 배에 새로운 선원들이 들어온 후 다른 소년 한 명이 차크라와 불편한 관계를 맺는다. 차크라 몫의 밥까지 먹거나 차크라가 항상 선장에게 가져다 주던 생선을 본인이 대신 가져다 준다. 차크라와 마찬가지로 소년 역시 배 위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게 된다. 선장에게 생선을 가져다 주는 모습을 바라보는 차크라. 그런 차크라를 바라보는 롬 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 차크라는 롬 란이 바라는 순환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배의 일원이 되어가는 소년.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경쟁하는 또 다른 소년을 제거해야 한다(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간의 싸움이 아닌 피지배 계급 간의 싸움이 등장하는 것은 <기생충>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날 밤 차크라는 모두가 잠든 사이 바다에 볼 일을 보던 소년을 밀어 죽인다. 다음 날 소년을 죽인 자를 찾던 선장은 범인이 차크라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말한다. “넌 나한테서 못 벗어나 이제. 죽을 때까지”. 선장이 원하던 순환에 차크라가 들어왔다. 이제 롬 란은 차크라를 죽을 때까지 배에 가둬둘 생각이다. 하지만 차크라는 거부한다. 소년은 그물을 거두던 중 나온 큰 뼈다귀를 이용해 롬 란의 일행들을 하나씩 살해한다. 이때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들은 모두 차크라가 이전에 가본 곳이다. 기관실도, 조종실도 다른 선원들은 가보지 못한, 차크라만이 경험한 공간들이다. 그러니 케아의 살인과 차크라의 살인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케아는 롬 란이라는 인간에 대한 분노만으로 대항한 인물이지만 차크라는 시스템을 알고 시스템에 대항하는 인물이다. 차크라가 없애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부조리한 시스템 그 자체이다. 그러니 시스템을 몸소 경험한 차크라만이 이 순환을 바로잡을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반문. 이 지옥의 시스템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는, 감독은 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감독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영화를 찍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당신들이 그 실상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영화를 찍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3. 영화의 결말은 다소 의심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허무하게 보이기도 하다. 선장과 일행을 모두 죽인 차크라는 직접 배를 조종하던 중 다른 배가 다가오자 선원들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다른 배로 옮겨 탄 후 육지에 도착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럼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계속 그 배에서 일해야 할까? 부조리한 시스템을 파괴했으니 정상적인 시스템이 배에 자리할 것인가? 이런 의심은 차크라의 상황에서도 이어진다. 집으로 돌아간 차크라는 자신을 대신해서 밭을 매고 있는 아버지를 보지만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멀어지는 차크라를 발견한 아버지도 소년을 잡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제 차크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결말은 영화가 인물을 대상화 한 후에 허무하게 떠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동시에 가족이라는 또 다른 부조리한 질서의 책임자인 아버지를 너무 쉽게 용서하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한번 더 반문. 차크라가 가족과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아버지를 가장 쉽게 용서하는 길이 되었을 것이다. 새우잡이 배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빠져나온 것처럼 차크라는 그 많은 자식들 중 자신이 모든 생계를 담당해야 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차크라가 빠진 가족은 아버지가 책임진다. 최선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결 방식이고 가장 상식적인 구조이다. 차크라가 돈을 벌기 위해 나간 것도 가족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의 위한 선택이었다. 가족을 떠난 소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영화는 보여줄 수 없다고 믿는다. 소년이 가는 길, 그 길은 아직 현실에서 도달하지 않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여전히 동남아시아에서는 노예 노동이 벌어지고 있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영화적 오만에 불과하다. <부력>은 그런 오만을 보이지 않는다. 차크라가 떠난 배와 선원들은 어떻게 될지, 가족을 떠난 차크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영화는 거기까지만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아마도 차크라와 같은 소년들이 길을 잃었을 때쯤 영화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해당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도 보실 수 있으십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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