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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Sep 21. 2020

도망친 여자 아트나이너 리뷰

산을 넘어 바다로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깨어나 생각하니 꿈에 본 아저씨는 전에 봤던 착한 아저씨인 것 같았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1. 영화에서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보통 감독의 분신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감독 자신의 영화적 인장과 태도를 반영한 배우. 바꿔 말하자면 감독의 세계를 모두 채화한 자. 그러면서 감독의 세계 내에서 하나의 전제조건처럼 존재하는 자. 페르소나에 대한 활용법은 감독마다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감독 자신의 세계 속에서 감독이 가장 의존하는, 그래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믿음이 가는 배우. 영화사에서 많은 거장들은 페르소나와 함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존 포드와 존 웨인. 잉마르 베리만과 막시 폰 시도우. 장 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혹은 장 폴 벨몽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모니카 비티. 페데리코 펠리니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여기에 줄리에타 마시나). 레오 카락스와 드니 라방. 오즈 야스지로와 류 치슈. 왕가위와 양조위(가능하다면 장국영과 장만옥도). 봉준호와 송강호.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 그리고 내가 놓친 수많은 이름들. 물론 여러 이유로 페르소나가 없는 감독 역시 드물지는 않다(대표적으로 알프레드 히치콕, 스탠리 큐브릭, 로베르 브레송, 이창동 등). 이 배우들이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특별한 것은 단순한 아우라의 문제가 아닌 감독 고유의 예술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있다. 존 웨인이 등장하는 존 포드의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는 얼마나 다른가? 드니 라방 없는 레오 카락스의 영화를 생각할 수 있을까? 모니카 비티만큼이나 안토니오니의 세계를 가장 잘 채화한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펠리니 영화에서 (더 넓게 보면 이탈리아 영화사에서)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의 위상은 특별하다 못해 절대적으로 보인다. 우리의 문제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홍상수의 페르소나는 누구인가요? 수많은 배우들이 거쳐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누가 홍상수가 가장 의존한 존재인가요? 가장 간단한 대답. 그에게는 페르소나 같은 배우가 없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일정 기간 동안에는 특별해 보이던 배우들도 어느 순간 이후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꽤 있다. 이를테면 김상경이나 이선균, 김의성 같은 배우들. 혹은 자주 등장해도 영화 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배우들도 있다. 물론 홍상수는 특정 배우에 의존하여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는 결코 아니다. 게다가 어떤 배우에게서 나타나는 홍상수의 인장은 다른 배우들에게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를테면 홍상수 영화 속 김상경과 이선균의 이미지는 유사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홍상수는 배우의 아우라를 드러내기 보다는 모든 배우를 자신의 영화 안에서 유사한 아우라를 갖도록 유도하는 쪽에 가깝다. 그건 당연히도 홍상수가 바라보는 인간 군상에 대한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번 더 질문. 그렇다면 홍상수의 페르소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영화에서 가장 변함없이 특별한 아우라를 내뿜던 배우는 존재하나요?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한 명의 배우를 말할 수밖에 없다. 기주봉 배우. 이 배우는 사실 홍상수 필모그래피에서 그렇게 주목 받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출연작도 많지 않을뿐더러 주연으로 출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기주봉은 홍상수 세계 내에서 가장 특별한, 독보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였다. 홍상수 영화 속 등장하는 대부분의 비겁한 남자들과 달리 기주봉은 믿을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인물들은 자신의 품 안에서 머물 수 있게 해주고(<밤과 낮>) 인물이 존경할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하하하>) 때로는 위로를 해주기도 했다(<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심지어 <그 후>에서 택시 기사로 등장해 목소리만 나오는데도 힘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홍상수에게도 페르소나가 있다면 그건 그의 영화적 세계를 가장 잘 채화한 배우들이 아닌 그 안에서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는 기주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배우가 주연이 되자마자 죽는다. 이제까지 크게 비중 있는 배역으로 등장하지 않던 그가 주연으로 등장한 동시에 사라진다. 홍상수 영화에서 은유적으로만 표현되던 죽음이 화면 안에서 직접 나타나는 순간 겪는 복잡한 감정들. <강변호텔>은 그런 의미에서 충격적인 영화였다. 물론 그의 죽음이 <풀잎들>에서도 어느 정도 징조가 나타났지만 다른 인물도 아닌 기주봉의 죽음이었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제 홍상수는 기주봉을, 가장 믿음직스러웠던 그의 아우라를 포기한 것인가? 불안정한 세계를 지탱하던 그가 사라진 이후 홍상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도망친 여자>가 내게 그에 대한 대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주했다. 


2. <강변호텔>의 마지막 장면. 죽은 영환을 두 아들이 껴안고 울고 있다. 이 장면은 침대에서 마주보며 울고 있는 두 여자의 모습과 디졸브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그의 죽음은 두 여자의 꿈일까? 두 여자는 그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두 인물이 있었기에 영환은 죽을 수 있었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 “저 죽어도 됩니다. 얼마든지. 두 분만 있으면”. 영화 내내 두 아들에게 죽을 것 같다고 말하던 영환이 아름다운 두 여인에게 자신의 시를 읊은 후 소주 잔을 받으며 한 이 말. 이때 영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이 아닌 삶을 놓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으로 가득 찬,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것만 같은 자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 장면은 기주봉이 지금까지 자신이 홍상수 영화에서 해왔던 일을 두 여성에게 넘기는 것만 같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 찼던 세계에서 굳건히 버텨주던, 그래서 다른 인물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생명력 그 자체. 그 역할을 넘겨주고 이제 자신도 죽어도 된다는 듯한 그의 모습은 처연한 동시에 왠지 모를 아름다움까지 느껴진다. 마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해원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는 것처럼, 혹은 그 이상을 해주고 떠난다. 기주봉의 역할을 물려받은 여자들. 이제 비겁하고 위선적인 남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던 여자들은 이 세계에서 버틸 힘을 찾았다. <도망친 여자>라는 제목은 바로 이런 남자들의 세계에서 도망친 여자들을 위한 제목이라고 보인다. 영화 속 여성들은 모두 남편과 이혼하거나 혼자 살고 있으며 감희는 5년 동안 붙어 살던 남편으로부터 처음으로 떨어져 나온다. <도망친 여자>의 세 번의 에피소드는 모두 여성들이 중심부에 위치한다. 그들이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영화에는 생동감과 활력으로 가득하다. 세 번의 에피소드의 구성은 거의 유사하다. 감희의 방문, 여성들의 만담, 남자의 방문, 그리고 컷의 변화. 물론 에피소드 사이의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의 전제는 생략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홍상수의 초기작부터 자주 쓰이던 ‘차이와 반복’의 구조이다. 언제부터인가 홍상수 영화에서는 이러한 ‘차이와 반복’의 구조는 점차 희미해지거나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작인 <강변호텔>과 <풀잎들>에서는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홍상수는 이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예전의 구조를 다시 가져왔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의 구조 안의 새로운 태도. 이전에 자주 쓰이던 구조로 돌아왔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태도를 유지한다. 홍상수 영화의 ‘차이와 반복’은 주로 전반부의 서사가 후반부에 유사하게 반복될 때 나타나는 작은 차이, 그 차이가 발생시키는 전혀 다른 결과에 대한 관찰이었다. 이 말을 홍상수 필모그래피 전체로 확장시켜 본다면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가 ‘차이와 반복’의 구조를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적용한 결과물로 보인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반복, 그 안에서의 차이, 이 구조를 좀 더 넓게 정식화 하자면 홍상수가 이전 작품들에서 사용하던 구조가 반복되는 동시에 둘 사이의 작은 차이가 다른 결과를 도출해내는 결과가 곧 <도망친 여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 물론 가장 큰 차이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남자를 배제하고 여자들의 힘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 여자들은 같은 구조의 홍상수 영화를 어떻게 바꾼 것일까? 



3. 영화에서 여성들은 남성이 자신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 이웃에 사는 남자가 ‘도둑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여자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거부한다. 실랑이가 길어지던 때에 감희와 영순이 나타나 함께 남자의 부탁을 거절하고 남자는 물러간다. 남자의 방문은 에피소드 내에서도 분명 이질적인 순간이다. 수영과 하룻밤 잔 시인이 등장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남자의 이러한 행위는 이전까지 평화로웠던 여자들의 세계에 균열을 가한다. 그러자 여자들은 필사적으로 균열을 막고 봉합한다. 마치 균열을 일으킨 남자를 타이르기라도 하듯이 영순이 나타나는 순간 그녀들의 세계는 이전보다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쇼트. 남자가 간 후 여자들은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 들어가고 카메라는 가만히 있던 고양이를 클로즈 업 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그토록 자주 등장하던 클로즈 업이지만 그가 동물을 이렇게 자세히 찍은 적은 없었다. 물론 홍상수는 “거기 있었기에 찍었다”라고 말하겠지만 바로 그 점이 이상한 점이다. 이전의 홍상수라면 거기 있더라도 그냥 지나쳤겠지만 이번에는 지나치지 않았다. 고양이도 도망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여성들의 세계에는 여성들만이 아닌 동물, 더 넓게는 모든 생명이 포함된다. 닭장 안의 닭들이나 텃밭의 식물들, 깎아준 사과, 그리고 엄마에게 버림 받은 옆 집 여자도. 이 생동감 넘치는 세계.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세계 안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은근히 비겁한 측면이 있다.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고기를 좋아하고 이웃도 중요하지만 고양이도 중요하다. 술 마시고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남자도 매몰차게 내쫓는다. 대신 그녀들은 회피하지 않는다. 고기를 먹으며 불쌍한 소 얘기를 하던 감희에게 영순이 하는 말. “고기 먹어도 돼”. 마치 <강변호텔>에서 영환이 한 “저 죽어도 됩니다”처럼 들리는 말. 비겁하고 위선적으로 보일지 언정 그 모습마저 인정하는 세계. 이건 분명히 자신의 책임의식을 떠넘기기 위해 여성들의 세계에 균열을 가하는 남성들의 비겁함과는 거리가 멀다. 여자는 자신의 비겁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남자의 비겁함을 책임질 생각은 없다. 두 에피소드에서 남자가 방문할 때 남자는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등모습만이 나타나지만 여자는 당당한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 이 세계가 죽음의 기운으로 넘치던 기존 홍상수 세계와 달리 생동감이 넘친다면 그건 자신의 비겁함마저 수용할 줄 아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도망친 여자>가 전작들과 다르게 보이게 하는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때 남자들을 쫓아내는 것은 감희가 아닌 다른 여자들이다. 감희는 그저 지켜보거나 집 안에 머물러 있다. 그럼 감희는 이 세계에서 의존만 할 수 있는 유약한 여자인가요? 이 질문은 중요한 것을 놓쳤다. 수영과 잔 시인이 집 안에 들어가려고 하자 수영은 거부한다. 당연히 들어갈 수 없다. 그 안에는 감희가 있다. 그녀가 있다는 것은 수영이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조건이 갖춰진 상태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감희는 다른 여성들이 이뤄놓은 세계에 의존하는 수동적 인물이 아니라 반대로 여성들이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존재해주는 인물이다. 물론 감희가 수영에게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첫 에피소드에서 영순이 그러한 존재였기 때문이다(어쩌면 영순을 연기한 서영화는 여성들 세계의 기주봉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비록 감희는 직접 남자들과 대면하지는 않지만 역설적으로 수영과 같은 여자들이 남자를 당당하게 대면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시종 느껴지는 생동감과 활력은 바로 감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4. 그래서인지 세 번째 에피소드는 앞의 두 에피소드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준다. 앞서 두 에피소드에서 감희는 의도적으로 영순과 수영을 찾아가지만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우연히 우진과 우진의 남편 정 선생을 만난다. 물론 의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우연의 세계에서도 여성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우연히 만난 감희와 우진은 과거에 서로 상처를 준 듯 하지만 이를 담담하게 인정하고 사과한다. 무엇보다 감희가 아닌 다른 여성이 남성을 마주하던 이전 에피소드와 달리 이번에는 감희가 직접 남자인 정 선생을 만난다. 둘 사이에도 어떤 과거가 있는 듯 하지만 언급하지 않은 채 감희는 정 선생과 헤어진다. 이번에는 여성이 남성을 쫓지 않고 스스로 떠난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감희의 과거가 언급되는 편이다. 옛날 이야기 대신 현재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던 앞의 여성들과는 다른 태도. 혹시 영화에서 사라진 것만 같았던 죽음의 기운이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에피소드에서도 그런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를 직면하고 인정하며 사과할 줄 아는 태도는 현재의 삶을 위한 원동력으로서 작용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가 이전 에피소드와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감희가 여성들에게 삶의 활력을 주는 인물에서 받는 인물이 된다는 점이다. 첫 에피소드에서는 감희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활력을 깨닫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자신이 직접 그 활력을 불어넣어준다면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그 활력을 받는다(물론 에피소드 간의 시간적 흐름을 배제한 영화의 구조 특성상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이 틀릴 수도 있으나 나는 지금은 영화에서 나타나는 대로 따라가고자 한다). 누구에게서? 당연히 우진에게서. 과거에 자신이 주었던 상처에 대해 사과하면서 그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 그것만큼 큰 삶의 활력이 어디 있는가? 이 활력을 받았기에 자신의 과거인 정 선생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고 스스로 떠나면서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감희는 이전에 들어갔던 극장에 다시 들어가 스크린에 펼쳐진 영화를 본다. 영화에는 바다가 나오고 있다. <도망친 여자>에 바다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각 에피소드의 끝과 시작이 산의 모습으로 매치 컷 되면서 이어진다. 공간적으로 홍상수 영화에서 바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주로 인물들의 정서적 변화가 나타나거나 삶의 활력의 얻기도 하며 때로는 초현실적인 공간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파토스의 공간. 이에 비해 산은 홍상수 영화에서 단순한 공간적 배경으로만 쓰이거나 간혹 소멸의 기운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소멸의 세계. 영화를 이루는 여성들의 세계를 둘러싼 산의 세계. 그 안에서 (비록 영화지만)바다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홍상수의 여자들이 지향하는 태도가 아닐까? 소멸의 기운이 가득한 세계 안에서도 삶의 생동감이 넘치는 세계를 이루는 것. 그 생동감의 결정체인 바다를 꿈꾸는 것. 이 영화를 볼 때 감희는 홀로 있다. 다른 여성들 없이. 하지만 괜찮다. 서로에게 활력을 주고 받으며 세계를 이루던 여성들은 이제 함께 있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세계가 되었다. 홀로 버틸 수 있는 힘. 바다를 꿈꾸는 힘. 처음에는 영사기를 가리는 외국 관객의 방해를 받았던 흑백의 바다는 이제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컬러 화면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온전한 그녀, 온전한 그녀 자신. 이제 홍상수의 여자들은 어디로 나아갈까? 완전히 바뀐 영화적 태도와 함께 홍상수는 또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홍상수도 모를 것이다. 답은 미래의 홍상수만이 알 것이다. <강변호텔>을 더 잘 알게 된 것이 <도망친 여자>덕분인 것처럼. 나는 또 다시 <도망친 여자>에 대한 아직 해소되지 않은 몇몇 궁금증을 가지고 그의 다음 대답을 들을 준비를 할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계속) 



*해당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도 보실 수 있으십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821?boardTy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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