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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Nov 17. 2020

걸후드 아트나이너 리뷰

이 혹독한 성장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아울러 기억의 왜곡으로 인한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 인물들의 이름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도 자그마한 몇 가지 오류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결론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걸후드>는 분명 셀린 시아마의 네 편의 장편 영화를 통틀어 가장 냉소적인 영화라고 해야할 것이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들은 다소 비관적일지언정 냉소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비관과 냉소. 이 둘의 차이는 뭔가요? 물론 나는 단순하게 사전적 정의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셀린 시아마에게 있어 비관은 세계와 상황에 대한 태도이다. 주인공들을 둘러싼 제도적, 사회적 억압. 이 억압에 대한 긍정. 말하자면 셀린 시아마의 영화에는 주인공들을 위한 유토피아는 없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6일 동안만 이어진다(<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로레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성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다(<톰보이>). 마리는 그토록 원하던 플로리안과의 결실을 끝내 맺지 못한다(<워터 릴리스>). 그들만을 위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셀린 시아마는 자신의 인물들이 이 세계 안에 종속된 인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자신이 원하는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아무리 작가 개인의 예술이라 해도 현실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신 셀린 시아마는 도피하지 않고 투쟁하는 선택을 한다.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억압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다. 작별하게 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예술을 통해 서로를 기억한다. 로레는 더 이상 미카엘이 아닌 본래 이름으로 리사를 마주한다. 마리와 안나, 플로리안은 새로운 자신으로 탈피했다는 사실을 영화의 끝에서 보여준다. 이때 인물들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연대에서 비롯된다. 나를 홀로 있게 하지 않는 누군가의 존재,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하러 와 줄 인물에 대한 믿음. 그것이 셀린 시아마의 인물들이 현실에서 투쟁하고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 측면에서 셀린 시아마의 영화는 냉소적이지는 않다. 이 냉소는 인물에 대한 태도이다. 셀린 시아마는 자신의 인물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 연대에 대한 믿음. 자신의 인물들이 이 세계에서 잘 버텨낼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셀린 시아마 영화가 주는 진정한 힘이었다. 그런데 <걸후드>는 무언가 너무 다르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는 것은 누군가와 연대하는 마리엠이 아닌 완전히 홀로 고립되어 있는 듯한 마리엠의 모습이다. 물론 마리엠이 굴복한 것은 아니다. 마리엠의 마지막 옆모습은 삶을 해쳐 나가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거절했다.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내내 활기 넘치던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끝난다. 마리엠은, 그리고 셀린 시아마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2. 영화는 이상하게 시작한다. 마리엠을 비롯한 여성들이 텅 빈 경기장에서 럭비를 하고 있다. 경기가 끝난 후 여성들은 승패와 상관없이 서로를 격려하고 헤어진다. 이게 왜 이상한가요? 셀린 시아마의 다른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림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도 그림이 등장한다. <워터 릴리스>는 수영장에서 시작해 수영장으로 끝난다. <톰보이>에서 로레는 자신의 정체가 들어난 이후에도 그 공간과 친구들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걸후드>에서 마리엠의 럭비 팀은 처음 등장한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프롤로그가 끝난 후 이들은 모두 한데 모여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몇 명씩 무리를 벗어나고 무리는 점점 작아지고 마리엠 홀로 남아 집으로 들어간다. 이러는 동안 이 소녀들을 감싸는 것은 수많은 남성들의 시선이다. 말하자면 제도와 관습의 시선. 셀린 시아마의 인물들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 인정하게 되는 현실의 시선. 아무리 활기 차 보이더라도 이 소녀들은 현실의 억압 아래에 있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간 마리엠이 맞이하는 것은 안식의 공간이 아닌 오빠인 이스마엘의 폭력과 육아의 노동이다. 마리엠이 그토록 친해 보이던 럭비 팀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이러한 억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럭비 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리엠이 떠난 것이다. 자신의 평범한 삶을 위해.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마리엠의 바램과는 달리 마리엠의 선생님은 그녀의 낮은 성적을 이유로 들어 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추천한다. 하지만 그건 마리엠이 바라는 삶이 아니다. 그녀가 바라는 자리는 억압의 대상이 아닌 주체의 자리, 바꿔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 그래야만 지금 자신이 처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마리엠에게 선생님이 하는 말. “그러기엔 너무 늦은 것 같구나”. 이 불길한 한 마디. 무엇이 늦었다는 건가요? 이 말을 단순하게 마리엠에 대한 비하 정도로 읽어서는 안 된다. 너무 늦었다는 말은 뒤집어 얘기하면 조금만 더 빨랐다면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리엠을 늦게 오도록 한 것인가? 마리엠이 일반계 고등학교에 갈 수 없는 이유는 물론 성적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성적을 낼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육아의 굴레이다. 그녀가 정말 성적을 내기를 원했다면, 그래서 평범한 삶을 진정으로 꿈꿨다면 최대한 빨리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기에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을 모두 포기하는 무책임함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마리엠은 가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떠한 보상이 아니라 “너무 늦은 것 같다”라는 말과 엄마의 굴레뿐이다. 또 다른 굴레. 지위의 유전. 마리엠은 너무 늦게 굴레를 빠져나오려고 한다. 물론 이것이 마리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선생님은, 그리고 사회는 왜 마리엠이 그 굴레를 빠져나오지 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마리엠도 그 이유를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종의 경계. 절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간극. <걸후드>는 초반부터 이를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명확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마리엠의 운명을 결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3. 선택이 좌절된 후 마리엠에게 제3의 선택지가 다가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엠에게 레이디와 아두아투, 그리고 필리 세 명의 소녀가 길을 가던 마리엠을 부른다. 이 무리는 마리엠에게 파리에 동행할 것을 제안하지만 마리엠은 거절한다. 그러나 이윽고 태도를 바꿔 제안을 수락한다. 무엇이 마리엠을 매혹시킨 것일까? 세 소녀를 뒤로 하고 가던 중 마리엠은 한 남자 무리가 소녀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목격한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위계도 없어 보인다. 소녀들은 남자들에게 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 마리엠은 여기에 매혹된 것이다. 이 선택은 이전의 선택지와는 다르다. 그전까지 마리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억압 당하거나 억압의 주체로 올라서는 선택 속에서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압 당하는 위치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다른 길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하지만 이 소녀들은 자신이 늦어도 기꺼이 받아준다. 새로운 선택. 제도 바깥의 선택. 이로서 마리엠은 자신을 가두던 제도의 굴레를 벗어나게 된다. 이후 마리엠이 마주하는 세계는 무엇인가? 폭력과 정념의 세계.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세계. 현실 속에서 억압 받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는 세계. 이 세계는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고 대항하기 위해 존재한다. 호텔에서 자신들만을 파티를 열 때 마리엠은 화장실에서 ‘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이때 마리엠에게는 끊임없이 이스마엘의 전화가 걸려온다). 레이디 역시 자신의 원래 이름인 소피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것이 이후에 밝혀진다. 그러니 이 세계로 들어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위한 세계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유토피아의 구현.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반례로서의 세계. 마리엠은 이 세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활기 넘치는 인물이 되어간다. 영화적으로도 초반 마리엠을 둘러싸던 어두운 집의 미장센은 이후 원색의 밝은 미장센으로 변화한다(물론 시간적으로도 밤에서 낮으로의 변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셀린 시아마 영화에서 언제나 무너지는 유토피아적 세계. 이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인물들 스스로가 아닌 현실의 개입이다. <걸후드>를 보는 내내 느껴진 것은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활기가 아닌 “저 활기가 언제 무너질까?”라는 비관과 두려움이다. 셀린 시아마는 현실을 회피하는 자들에게 천국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저 소녀들의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소녀들의 세계에 첫 균열이 가해지는 것은 레이디가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이다. 다른 무리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옷이 벗겨지는 영상이 퍼지자 이전에 소녀들과 친하게 지내는 듯했던 남자 무리도 그녀들을 조롱하고 다른 여자 무리들도 여기에 동참한다. 위계가 없을 것만 같았던 세계에도 위계는 존재했다. 어떤 위계? 힘을 통한 계급. 이 힘은 단순한 물리적 힘이 아니다. 영화에서 싸움은 오로지 여성들의 싸움만이 등장한다. 남자들은 싸울 필요가 없다. 힘은 남자들의 소유이다. 여성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남자들과 더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폭력의 세계에서조차 남성적 억압은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겪었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마리엠의 믿음은 틀렸다. 여기에서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남성적 가치 아래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지킬 수 없다. 레이디가 패배 이후 종적을 감추자 마리엠은 자신이 직접 나서 마리엠의 복수를 명분으로 상대와 재대결한다. 처음 싸워보는 것임에도 결국 상대를 쓰러트리고 상대 속옷까지 칼로 잘라 차지하는 마리엠. 레이디가 찾아오고 너를 위해 싸웠다고 마리엠이 말해도 레이디는 알고 있다. 마리엠은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운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위험한 생각. 이 생각이 전제되는 순간 마리엠은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소녀들과의 연대. 셀린 시아마가 그토록 강조하는 연대. 그러나 애초부터 마리엠은 소녀들과의 연대감을 통해 이 세계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삶, 지금보다 더 평범한 삶이다. 마리엠은 이 싸움을 통해 억압의 객체에서 주인의 자리로 올라가고자 한다. 싸움 상대의 속옷을 자르면서 여성성을 탈취하고 동시에 자신의 남성적 면모를 과시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럴 때 마리엠에게는 같은 질문이 돌아올 것이다. 당신을 여기까지 오게 해준 세 소녀들을 버릴 것인가?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이전 질문은 가족에 대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질문은 그녀가 속한 세계에 대한 질문이다. 마리엠의 선택. 그녀는 가족을 버리지 않았지만 소녀들의 세계를 벗어날 준비는 언제든지 되어있다. 집으로 돌아온 마리엠을 오빠 이스마엘이 부른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그녀를 다정하게 대한다. 그러고는 이전에 축구 게임을 하고 있던 마리엠을 쫓아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함께 게임 할 것을 먼저 제안한다. 마리엠에게도 자격이 생겼다. 남성의 자리. 가부장의 자리. 억압 받지 않고 억압 할 수 있는 자리.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위치로 갔다. 물론 그녀의 행복은 오래가지는 못 할 것이다. 


4.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수많은 소녀들이 광장에 모여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활기가 느껴지지만 앞 뒤로 따라오는 이상한 장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신나게 춤을 추던 마리엠은 갑자기 자신의 동생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강도 행위를 똑같이 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바로 달려가 제지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저런 애들이랑 어울리지 마”. 그러자 동생이 대답한다. “언니도 오빠랑 다를 게 없네”. 마리엠은 이스마엘이 자신에게 가하던 억압을 동생에게 똑같이 반복한다. 이윽고 마리엠은 동생과 함께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이건 단순히 동생에 대한 권면 같은 게 아니다. 동생이 반복하는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때 함께 부정당하는 것은 그녀가 지금 속해있는 세계이다. 하지만 마리엠은 이제 그 세계를 부정해야 한다. 진정으로 원하는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억압하는 위치로 가야만 한다. 그러니 자신의 동생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원할 리가 없다. 동생이 억압 받는 세계로 들어간다면 자신이 겪어왔던 지긋지긋한 억압의 굴레가 반복될 뿐이다. 마리엠은 자신만이 아닌 자신의 가족 모두가 같은 위치로 가기를 원한다. 일종의 책임감. 좀 더 정확히는 가부장적 책임감. 이때부터 마리엠과 다른 소녀들의 세계 간의 유효 기간은 끝난 것이다. 하지만 마리엠은 원하는 자리에 가지 못한다. 마리엠이 그녀의 남자친구 지브릴과 섹스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마엘은 마리엠에게 또 다시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광장에서의 춤 장면이 나오기 이전에 마리엠이 지브릴과 섹스하려는 순간 시퀀스가 끝나는 것을 보았다. 둘 사이의 섹스에서 마리엠에게 남성성은 없다. 마리엠은 좀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러니까 남성적 위치로 가게 되는 순간 자신의 여성성을 섹스를 통해 발산한다. 이 장면이 끝난 후 춤 장면이 나오는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춤은 영화에서 소녀들이 가장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발산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마리엠의 위치에서 여성성은 금지된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섹스는 단순히 리비도의 발산이 아니다. 섹스 이후 짊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책임, 아이에 대한 책임이 그들을 뒤따라 온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형성하게 된 후 마리엠이 가야할 위치는 어머니의 자리이다. 마리엠에게 있어 가장 안 좋은 자리. 여기서는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표출하지도 못한다. 이미 우리는 아이를 낳은 후 무리를 떠나게 된 또 다른 소녀를 보았다. 게다가 자신이 간절하게 벗어나고자 하는 노동과 육아의 굴레를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 이때 이 어머니의 자리는 또 다시 마리엠에게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당신을 지금까지 키워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정과의 삶을 시작한 것인가? 이스마엘이 마리엠에게 분노한 것은 바로 이 어머니의 자리를 거부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남성적 책임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가족에게만 헌신하는 책임. 마리엠은 또 다른 억압과 마주한다. 좀 더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 존재하는 억압. 자신의 모든 여성적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억압.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도, 자신의 여성성을 발현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마리엠이 꿈꾸는 그런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5. 이스마엘을 피해 집을 나온 마리엠. 그런 마리엠에게 한 남성이 찾아온다. 그는 마리엠에게 일거리를 줄 테니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다. 마리엠은 다시 한번 선택해야 한다. 이 남성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집이나 친구들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따라간다면 또 다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마리엠은 후자를 선택한다. 더 이상 자신을 받아준 소녀들의 세계에도 자신이 책임져왔던 집에도 자신이 꿈꿔왔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선택을 하고 떠난다. 하지만 새롭게 도착한 이곳에도 자신이 꿈꾸던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리엠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다니며 자신의 여성성을 없애고자 노력한다. 마리엠이 원하는 위치, 여성이면서 동시에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위치. 그런 위치는 없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어느 한 곳에서만 있지 않다. 억압은 편재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성은 억압 받는 위치에 있어야 하고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면 여성성을 제거하고 남성성을 가져야 한다. 결국 마리엠은 자신의 마지막 세계마저 거부하고 도망친다. 그건 어떻게 결정했는가? 파티에 참석해 춤을 추던 중 자신을 이 세계로 이끌고 온 남성이 함께 춤을 춘다. 앞서 보았듯이 춤은 영화에서 여성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순간이다. 모처럼 마리엠이 여성성을 발현하는 순간 그녀에게 오는 것은 성적 대상화의 손길이다. 마리엠은 분명하게 이 손길을 거부한다. 이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억압에 맞선다. 그전까지 마리엠은 억압에 굴복하거나 억압의 주인이 되는 방식만을 선택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억압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싸움을 해나간다. 마리엠이 첫 번째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선택을 하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마리엠의 선택은 결국 같은 선택이었다. 그저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굴레에서 맴돌고 있던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연대할 누군가의 존재이다. 가장 먼저 지브릴이 다가온다. 마리엠에게 청혼을 하는 지브릴. 하지만 마리엠은 거절한다. 그건 이전까지 자신이 겪어왔던 굴레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이후 마리엠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초인종을 누르고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생은 그녀가 돌아온 것을 눈치챘는지 조용히 문을 열어준다. 하지만 마리엠은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집도 하나의 억압의 공간일 뿐이다. 이제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혹시 다시 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것일까? 평범한 삶은 그녀에게 너무 과분한 것일까? 카메라는 나약하게 울고 있는 마리엠의 옆모습을 벗어나 흐릿한 후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곧 마리엠이 눈물을 거두고 프레임 안으로 직접 들어온다. 그녀의 옆모습에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걸후드>에는 이런 식의 장면 전환이 다섯 번 등장한다. 페이드 아웃으로 끝나는 이 전환의 순간은 모두 마리엠이 결단하는 순간이다. 잠시 그 장면들을 나열해보자. 첫 번째는 설거지 하는 마리엠의 뒷모습에서 끝난다. 이건 육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결단이다. 두 번째는 엄마의 직장에 찾아가 더 이상 출근하지 않을 것을 알리고 난 후의 마리엠의 뒷모습에서 끝난다. 이번에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세 번째는 지브릴과 섹스하려는 순간 장면이 전환된다. 여기서 마리엠은 자신의 여성적 욕망을 발현하고자 한다. 네 번째는 마리엠이 세 소녀와 가족으로부터 작별한 후에 나타난다. 물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선택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다섯 번째 끝은 어떤 결단인가? 살아가겠다는 의지,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삶을 이 억압적인 세계 안에서 구현하겠다는 강렬한 의지. 마리엠의 선택은 (적어도 영화 내에서는)아무도 하지 않은 선택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그녀의 삶은 외로운 투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어나갈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 그녀와 함께 연대할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더 나은 삶과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발걸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마리엠이 다시 카메라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며. 카메라에 억압적인 현실이 아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의 활기가 넘치는 세계가 찍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계속)



*해당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도 보실 수 있으십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869?boardTy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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