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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Dec 29. 2020

2020년을 흘려보내며

새벽의 일기

문득 책장을 바라보니 올 한 해 생각보다 DVD를 많이 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이곳저곳에서 몇 개씩만 주문하던 DVD를 점차 나름 큰 돈을 들여 한 박스씩 시키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이제 책장 한 구석을 가득 메우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모님 돈을 한껏 갉아먹은 것도 부정할 수 없겠죠. DVD 자체는 신기한 매체는 아니지만 DVD를 통해 만나는 영화적 세계는 분명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쉽게 만날 수 없는 세계. 인터넷 등지에서 (합법적으로)만나기 어려운 목록들. 이전에는 항상 미지의 영역으로만 남았던 세계에 한 걸음 다가가며 나 자신의 영화적 세계관이 확장되는 듯한 인상이 들었습니다(다만 그것이 저의 영화적 식견 향상과 직결된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생각보다 많은 감독들의 작품들을 모았습니다. 로베르 브레송,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끌로드 샤브롤, 장 피에르 멜빌, 허우 샤오시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많지는 않지만 장 뤽 고다르나 자크 타티, 존 카사베츠, 잉마르 베리만, 왕가위, 그 외에 많은 이름들. 저에게는 낯설고 무겁게만 들리던 이름들이 서서히 저의 삶에 녹아들어갔던 한 해였던 것 같이 느껴집니다. 게다가 작년 쯤에 샀던 외장하드에는 어느새 영화가 거의 다 꽉 찬 상태가 되었습니다. 지난 3월에는 생애 처음으로 영화제에 방문했고 5월에는 (비록 온라인이지만)전주국제영화제 작품들도 관람했습니다. 정말이지 이번 한 해는 영화에 저의 대부분을 투자한 것 같습니다. 


사실 소소하게 자랑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단순하게 잘난 체 하고 싶다기 보다는 힘들었던 한 해에도 무언가 해냈다는 작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무언가를 도전하기 너무 어려운 한 해였습니다.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사람들과의 왕래도 끊기면서 모두가 최대한 홀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2020년은 "보냈다"라는 말보다 "흘려보냈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마치 잡고 싶어도 손 안의 모래가 흘러나가듯이 말이죠. 그럼에도 올 한 해를 돌아보며 작게나마 의미부여를 하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일지라도 그것을 완수했다는 보람이 어려웠던 2020년에 남기를 바랬습니다. 아마도 저에게 2020년은 굳이 말하자면 "영화적 세계관(영화적 교양이나 지식이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이 더 확장된 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어렵고 힘들었던 한 해일지라도 자그마한 보람과 의미를 찾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실 굳이 코로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는 삶이 권태와 허무투성이라고 믿습니다. 항상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고 새로운 시도를 할려고 해도 금방 무너지기 일쑤이죠. 그래서인지 저는 거창한 믿음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희망이나 낙관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죠. 대신 저는 일상의 작은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남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본인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는 활동이 삶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거대한 메시지를 거창하게 이야기 하는 영화보다 일상의 소소한 부분이나 작은 균열을 포착하고 일상에 대한 낯선 감각을 느끼도록 하는 영화에 더 매혹되는 편입니다(물론 모든 영화에 적용되지는 않겠죠). 여러분의 2020년이 한없이 권태롭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보람찬, 영화로운 활동을 하셨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설사 그것이 없더라도 다가오는 내년이 여러분을 위한 장(場)이 되기를 바랍니다. 연말 인사는 이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부디 남은 연말 안전하게 보내시고 더욱 평화로운 2021년이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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