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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Oct 01. 2019

멜랑콜리아 리뷰

우울이라는 재난에 관하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골의 대저택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영화에서 이 대저택은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며 동시에 저스틴 혹은 클레어의 내면세계이기도 하다. 영화의 시작은 저스틴과 마이클이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대저택으로 리무진을 타고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대저택으로 가는 길은 리무진이 들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좁다. 저스틴이 직접 리무진을 운전해보기도 하지만 상황만 더욱 악화될 뿐이다. 저스틴의 내면에 결혼은 너무나도 커다란 비극이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대저택에서는 이미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고 클레어는 저스틴이 오자마자 식순에 집착한다. 하지만 저스틴은 식순은 무시한 채 멋대로 자기 애마인 아브라함에게 인사를 하고 갑자기 별에 관심을 가진다. 이때 저스틴이 바라본 별은 전갈자리의 알파별 안타레스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전갈은 오리온의 자만심에 분노한 헤라가 오리온을 죽이기 위해 풀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오리온은 전갈이 아닌 자신의 애인 아르테미스의 화살을 맞고 죽는다. 그런데도 전갈은 오리온을 죽인 공으로 별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오리온자리와 전갈자리는 하늘에 함께 떠 있을 수 없기에 전갈은 결코 오리온을 죽일 수 없다.


2.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 3부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다. 코스모스를 상징하는 남성은 보수적이고 세계를 일정한 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만, 카오스를 상징하는 여성은 그러한 남성의 틀을 거부하고 저항한다. 또한, 남성은 지식은 많을지언정 여성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지하다. 그리고 여성은 그러한 남성을 공격하고 둘 사이의 관계는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남성은 여성을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에덴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파국을 맞이하게 되고 님포매니악에서 셀리그먼은 조를 잘못 이해하고 마지막에 그녀를 범하려고 한다. 멜랑콜리아에서 존이 또한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된다. 존은 자신이 마치 세계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지만, 그는 철저히 무지하다. 대저택의 골프 홀이 18번 홀까지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19번 홀까지 있었고 클레어가 숨을 못 쉬겠다고 호소하자 행성이 다가와서 대기 중의 산소가 부족해진 탓이라고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숨을 잘 쉬고 있다. 무엇보다 과학자의 말을 맹신한 그는 행성이 지구를 비껴갈 것이라고 믿지만, 결국 그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남성의 특징을 1부에서는 클레어가 띄고 있다. 클레어는 저스틴의 결혼을 축하하기보다는 식순을 채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저스틴은 그러한 틀을 거부하며 식순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행동한다. 클레어는 그런 저스틴에게 결혼식을 계속 강요하지만 결국 결혼식은 파탄 나게 된다. 그러한 클레어가 2부에 들어서는 지구와 멜랑콜리아의 충돌이 다가오자 저스틴과 같은 증상을 보이게 되고 저스틴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관계가 역전된다. 이러한 구조는 스스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라스 폰 트리에가 자신과 같은 특성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통해 염세주의적 세계관과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우울증 환자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2부에서 지구로 다가오는 행성의 이름 역시 멜랑콜리아(우울증)이다. 이를 통해 앞서 말한 전갈 자리를 본다면 오리온은 존(남성), 전갈은 저스틴 혹은 클레어(여성)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갈이 오리온을 죽이지 못하듯, 여성 역시 남성을 원하는 대로 죽이지 못했다. 오리온을 죽인 것이 그의 애인인 아르테미스였듯이, 존을 죽게 한 것은 행성 충돌이 아닌 행성이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오만한 믿음이었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남성은 산딸기(선악과)를 먹고 난 뒤 수많은 얼굴 없는 여성을 보면서 고통이 시작될 것을 직감하게 되고, 님포매니악에서는 조가 자신과의 섹스를 받아줄 것이라고 착각한 샐리그먼은 조에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우울 3부작에서 남성 캐릭터들의 고통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오만한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뒤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 내에서 그들의 고통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3. 저스틴은 자신에게 광고 카피 아이디어를 얻어내기 위해 계속 쫓아다니던 팀과 섹스를 나눈다. 그전까지 마이클과의 섹스를 거부하던 그녀는 이번에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팀과 섹스를 하게 된다. 전작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섹스는 여성이 자신에게 가하는 자해인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행위로 묘사된다. 이는 멜랑콜리아와 님포매니악에서도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저스틴은 남편 마이클이 아닌 팀과의 섹스를 통해 자신을 ‘마이클의 아내’가 아닌 ‘저스틴’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나타낸다. 이러한 섹스는 2부에서 나체로 멜랑콜리아 행성의 푸른 빛을 받아내는 장면과 연결된다. 2부에서 저스틴의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고통과의 섹스이자 일종의 자위인 셈이다. 그렇기에 저스틴의 섹스에서는 감정이 없다. 이는 우울 3부작 모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님포매니악에서 조는 제롬과 사랑에 빠지게 된 뒤 섹스를 할 수 없는(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역시 남성과 여성의 섹스는 사랑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섹스에는 오직 쾌락만이 남을 뿐이다. 이때 남성과 여성 사이 섹스에서 섹스를 주도하거나 더 원하는 쪽은 대부분 여성이다. 섹스는 남성과 여성이 자신의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출산은 에덴에서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그렇기에 여성은 섹스를 통해 쾌락을 남용하면서 기독교가 규정한 출산에 정면으로 대응한다. 이는 카오스를 상징하는 여성이 코스모스를 상징하는 남성에 대항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멜랑콜리아 행성이 지구와 가까워지면서 클레어가 혼란에 빠지자 저스틴은 클레어에게 “지구는 사악해.”라고 말하며 지구는 사라져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 우주에 우리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가 있을 수도 있지 않냐는 클레어에게 우주에는 우리뿐이라고 저스틴은 대답한다. 어떻게 확신하냐는 클레어의 질문에 저스틴은 결혼식 날, 콩 개수를 맞히는 게임에서 맞힌 사람은 자신뿐이라며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누가 보더라도 빈약한 논리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신에 비유한다. 하지만 어쩌면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신론자의 논리는 빈약하기 짝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저스틴은 자신을 스스로 신적 위치로 끌어올리면서 종교와 이성으로 대변되는 남성에 세계에 다시 한번 대항한다.


4. 하지만 그러한 저스틴도 종교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기도 한다. 그녀의 애마인 아브라함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종교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녀는 아브라함을 타고 대저택 정원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멈춰서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저스틴이 보게 되는 것은 하늘에서 멜랑콜리아 행성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다.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의 결과는 결국, 천천히 파멸에 다가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끝나게 된다. 지구와 행성이 충돌하기 직전 클레어는 아브라함을 저택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또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자동차는 이미 행성의 영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이다. 아무것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일찍이 깨달은 저스틴은 파멸을 받아들인다. 이때 파멸은 단순한 끝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고통으로써 규정하려는 태도이다. 이것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이 자신의 음핵을 도려낸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 3부작은 이렇듯 과격하면서도 창의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것은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이 우울증을 대하는 태도이자 우울증 환자인 자신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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