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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Oct 01. 2019

하나 그리고 둘 리뷰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하나 그리고 둘은 감독의 전작 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형식적인 면에서 유사한 점이 여럿 존재한다. 우선, 각 등장인물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파편화된 스토리가 진행되는 다중 플롯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인물들은 대만의 현대사를 통과하면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가며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과거 회고적이고 대만의 역사 자체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면 하나 그리고 둘은 대만의 현대와 현재를 다루면서 좀 더 사적인 영화이다. 영화감독이면서 사업가이기도 했던 그는 수차례 사업에 실패하는 좌절을 NJ를 통해 보여주고 재혼한 뒤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셰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양양을 통해서 감독 에드워드 양이 감독으로서 느끼는 사명감과 관객을 향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2. 하나 그리고 둘에서는 유독 인물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쇼트가 많이 있다. 가령 인물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유리창에 반사된 모습을 보여주거나 혹은 유리창 너머의 인물이나 풍경의 모습을 찍는다. 또는 스토리상 중요할 수도 있는 장면을 롱쇼트로 찍어 인물을 한없이 작아 보이게 만들고 거의 모든 장면은 스테디캠으로 촬영한다(핸드헬드 카메라가 생동감을 보여준다면 스테디캠은 정적이고 유려한 장면을 보여준다). 유리창은 보통 간접성을 상징한다. 유리창에 반사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직접 보이는 인물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미처 보지 못한 삶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이렇게 유리창을 통해 인물을 보여주는 쇼트가 처음 등장하는 때는 외할머니가 사고로 병원에 실려 간 뒤 NJ와 아디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외할머니의 사고라는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시련을 맞이하면서 후에 외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스테디캠을 이용한 롱쇼트 촬영은 거대한 삶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는 인물을 더욱 부각한다(롱쇼트는 환경이 인물을 지배하는 쇼트이다). 흥미로운 점은 주요 등장인물 중 양양은 이러한 쇼트로 찍은 장면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 양양을 찍은 장면은 미디움 쇼트로 찍고 있으며 유리창에 반사된 모습이나 유리창 건너편에 있는 양양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양양은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이로서 이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삶을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양양의 시선은 곧 감독이 보고자 하는 시선이다. 양양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 이유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뒷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아마도 에드워드 양 감독 역시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삶의 이면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3. NJ의 회사 동료들은 회사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물질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회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름있는 사업가 오타와 함께 사업을 할 것을 먼저 제안한 것은 회사 동료들이었지만 정작 오타의 제안을 들어보고서는 너무 혁신적이라는 이유로 오타의 제안을 거부하고 오타의 아이디어를 모방한 대만 기업과 함께하고자 한다. 그리고 오타를 돌려보내기 위해 가장 정직해 보인다는 이유로 NJ에게 그를 설득시키라고 한다. 그러다 NJ를 오타와의 계약을 체결시키기 위해 도쿄로 보내지만, NJ와의 상의도 없이 갑자기 오타를 모방한 대만 기업과 계약을 체결한다. 이렇듯 NJ의 회사 동료들은 오로지 현재의 문제 해결만을 위해 기만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그들이 계약한 기업은 분명히 모방 기업이다.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로 성공한 모방 기업 역시 기만적인 모습을 지닌 기업이다. 작품에서는 이렇게 기만적인 모습을 띠는 인물들이 여럿 나온다. 아디 역시 실제로는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음에도 NJ에게는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양양의 담임은 양양이 갖고 온 풍선을 콘돔으로 착각했다가 자신의 실수를 알고 나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성취로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NJ의 회사 동료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로, 아디는 우연히 얻은 국보로, 양양의 담임은 교사라는 권위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진실일까. 양양은 담임에게 “선생님은 듣기만 했지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요.”라며 표면만을 보고 진실을 보지 못하는 담임을 지적한다. 담임은 진실을 알고 나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양이 뒷모습을 찍은 사진들도 깔보고 깎아내렸다. 삶의 이면에 있는 또 다른 진실을 보고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아디가 얻은 국보 역시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얻은 것이다. NJ의 회사 동료들도 모방 기업의 모조품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삶이 화려하다 해도 그것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할 수 있다.


                                                        

4. NJ는 자신의 동료들과 달리 진실한 인물이다. 오타의 이름값만 보고 그와 사업하려는 동료들에 반대하지만, 그의 혁신적인 제안을 실제로 들은 뒤에는 오타와 함께 사업을 하고자 한다. 동료들에 떠밀려 오타를 설득하고자 만났을 때도 거짓말이 금방 들통난다. 일본 출장 중 동료들이 멋대로 대만의 모방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였을 때도 품위를 지키라고 화를 낸다. NJ는 물질주의적인 현실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는 오타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타는 NJ와의 첫 미팅에서 그의 거짓말을 눈치챈다. 하지만 NJ에게 특별히 계약 체결을 강요하지 않고 NJ 회사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말한다. 또한, 오타는 속임수를 쓰지 않고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서 NJ와 만나 카드 마술을 보여줄 때 NJ가 트릭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지만, 그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카드를 전부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두 인물은 음악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오타는 어렸을 때 음악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NJ는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싫어하는데 과거 자신의 첫사랑 셰리가 음악을 안 좋아하여 자신이 그녀를 떠난 뒤 음악만이 자신의 곁에 남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음악이 돈을 벌어주는 것도 아니라면서 음악을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셰리 역시 그랬다. 그녀는 NJ가 음악을 통해 배운 삶의 낭만과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NJ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엔지니어가 되라고 강요한다. NJ는 그러한 그녀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NJ는 그녀가 강요한 엔지니어가 되고 셰리는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오타의 말대로 셰리는 NJ의 음악이다. 그녀는 NJ가 순수하고 아름답던 시기를 상기시켜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기에는 두 인물 모두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5. NJ가 도쿄에서 셰리를 만나 데이트를 나눌 때 팅팅은 패티와 데이트를 나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데이트하는 두 커플의 모습은 교차편집으로 나온다. 팅팅과 패티는 NJ와 셰리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커플은 모두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NJ와 셰리는 다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팅팅과 패티의 관계는 패티의 전 여자친구인 리리가 개입되면서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한쪽의 관계는 이미 소실되었고 다른 한쪽의 관계는 소멸해 가고 있다. 팅팅과 패티의 관계 역시 NJ와 셰리가 그랬던 것처럼 끝날 것은 예견되어있었다. 패티는 NJ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낭만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NJ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처럼 패티는 영화를 좋아한다. 패티는 영화가 현실과 닮아있어서 영화를 통해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또 다른 삶을 간접적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쩌면 에드워드 양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제일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또 다른 삶, 그 삶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여주는 것.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아니다. 패티는 팅팅과의 관계가 파탄 난 후 인생은 꿈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렇기에 더욱 영화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패티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돌아온 팅팅은 할머니가 깨어나 있는 환상을 본다. 할머니의 무릎에 기댄 팅팅은 그제야 편히 잠들고 눈을 감는다. 팅팅이 할머니에게 고백한 대로 세상은 자기 생각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 그런 세상 속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감고 자신의 꿈에 기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일 것이다. 다만 그 꿈이 끝난 이후에는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차가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6. 하나 그리고 둘의 원제는 “Yi, Yi” 즉 하나하나를 뜻한다. 이것은 어떤 공동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 각각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더욱 보편적인 이야기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시련을 경험하면서 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한다. 임종 전 혼수상태의 할머니에게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시련을 고백한다. 양양의 말대로 할머니는 가족 중 가장 긴 세월의 삶을 살았으니 인물들의 시련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할머니는 대답이 없다. 계속되는 고백에도 답이 없자 인물들은 깊은 회의감에 빠진다. 자신들의 버팀목이 없어진 인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삶의 시련을 맞선다. NJ는 해외로 나가고, 민민은 절에 들어가고, 팅팅은 사랑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인물은 원래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지금의 현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더라도 계속해서 시련이 닥치고 현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하나 그리고 둘은 모두의 이야기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양양은 병상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하지 못했던 고백을 한다. 할머니가 병상에 있을 당시에는 할머니가 듣지도 못하는데 내가 이야기를 한들 다 무슨 소용이냐면서 고백을 거부하지만,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게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고백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에는 세상을 떠난 할머니도 있다. 사람들은 이제 할머니를 보지 못하지만, 양양 자신만은 할머니의 모습을 계속 찾고자 고백한다. 이것이 에드워드 양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이자 관객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양양의 고백은 에드워드 양 감독이 관객에게 바치는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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