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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an 27. 2021

공유에 관하여

혹은 취향의 설득에 대하여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누군가는 이미 알겠지만 나는 지난 2020년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독립예술영화관 중 하나인 아트나인의 서포터즈인 아트나이너로 활동한 바가 있다. 물론 너무나도 뜻 깊은 시간이었고 이 활동에는 일말의 후회도 없다. 다만 처음 그 자리에 갔을 당시에는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어떤 복잡한 감정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트나인으로부터 합격 소식을 받은 후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기 위해 사무실로 찾아갔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 내가 아트나이너에 합격했을 당시에는 상황이 조금 특별했다. 내가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바로 이전 기수의 아트나이너분들은 원래대로라면 1월부터 6월까지만 활동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때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이 당시 아트나이너분들은 이전 기수들이 할 수 있었던 다른 대외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그 대외활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그로 인해 이때 활동하던 11기 아트나이너의 대부분이 활동을 연장했고 새롭게 뽑은 12기 아트나이너는 나를 포함해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사실상 12기는 11기의 연장에 가까웠다. 당연히 서로의 얼굴을 잘 알고 있을 테고 각자의 취향도 이미 공유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그 안에 들어간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사무실에 모이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후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내가 마지막 순서였다. 한 명씩 차례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이름과 영화적 취향을 소개했다. 그때 분위기는 살짝 들떠있는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소개가 이어질수록 나는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이름은 자비에 돌란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아직 이 감독의 영화를 단 한 편도 보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니 이 감독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거론된 감독 대부분이 내가 큰 관심을 가지지 못한, 비교적 최근의 감독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영화적 시간은 현재에 머물러있지 않을 때였다. 나는 그때 본격적으로 DVD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했다. 로베르 브레송을 거의 모두 보았고 잉마르 베리만에 빠져들었다. 고다르와 안토니오니는 나를 60년대로 초대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리산드로 알론소는 21세기 영화의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고 물을 때 나는 거의 대부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말한다. 하지만 이 이름들은 그때 그 장소에 어울리는 이름들이 아니었다. 무언가 진심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순간에도 방 안의 분위기는 서로의 이름들에 공감하며 달아올랐다. 


내 차례가 다가왔다. 역시나 같은 질문이 들어왔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진심을 얘기 하는게 좋을까? 아니면 조금 유연하게 다른 감독의 이름을 말해야 할까? (예컨대 21세기 감독 중 가장 좋아하는 감독을 묻는다면 아마 코엔 형제나 라스 폰 트리에 같은 이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안 좋은 선택을 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입니다”. 순간 들떠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어떤 사람은 탄식하기도 했다. 마치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들어온 분위기. 아차 싶은 순간. 뭔가 수습을 해야할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브레송이나 베리만도 좋아하고, 요즘 감독 중에는 코엔 형제가 제일 좋습니다”. 그리고는 끝났다. 전혀 수습이 안 된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물론 여기서 책임을 따지자면 그 분위기를 맞추지 못한 내 책임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했으면서도 나는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트나이너에 지원한 동기 중에는 취향을 공유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화들. 이 영화들과 감독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배우고 싶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그런 자리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가족이나 친구들 중에는 고전 영화는 물론이고 영화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정보력이 약한 나로서는 이 영화들에 대한 담론을 찾아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트나이너는 하나의 대안이 될 것만 같은 기대가 있었다. 아쉽게도 내가 오해하고 말았다. 물론 그분들의 잘못은 전혀 없다(오히려 나에게도 그분들의 취향을 이해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었다). 설사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들 턱없이 부족한 사회성을 지닌 내가 그 사람과 친해지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여전히 나의 욕심은 유효하다. 


왜 그렇게 당신의 취향을 공유하고 싶나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글을 쓰는 것도 내게는 같은 의미이다. 비록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것 같아도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안도감을 줄 때가 있다.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소재를 쓰면 되지 않나요? 그럼 나도 다시 반문할 것이다. 왜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하나요? 모두가 같은 것을 좋아하고 같은 이야기만 한다면 취향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취향을 가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외로운 일이다.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은 동시에 그 영역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폐쇄적인 환대. 이 환대의 과정은 곧 설득의 과정이기도 하다. 내 취향에 동의하기를 바라는, 내가 던진 질문에 대답하기를 바라는 욕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를 배척하고 싶은 동시에 수용하고 싶은 바램. 어쩌면 취향은 공유하는 것이 아닌 설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걸 나쁜 의미로 보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같은 취향을 지닐 수는 없다.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교집합을 이루는 동시에 결국 맞닿을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공유는 그 순간에만 가능하다. 차이의 공생. 그 공생에서 무엇이 발생하나요? 일종의 (정성일의 표현을 빌리자면)우정. 영화에 대한 우정. 같은 곳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우정. 영화사는 이런 우정을 통해 발전해왔다. 우정이 없다면 담론도 없고 담론이 없다면 새로운 조류도 없을 것이다. 우정이 있었기에 소비에트에서 형식주의가, 이탈리아에서는 네오 리얼리즘이, 프랑스에서는 누벨바그가, 미국에서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대만에서는 신랑차오가, 독일에서는 뉴 저먼 시네마가 있을 수 있었다. 당연히 내 글이 이후 어떤 담론의 중심이 되리라는 꿈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내 취향에 동의하고 내가 던진 질문에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나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 그 과정에서 이미 한번 그랬듯이 누군가와 서로 부딪히는 순간이 계속 있을 것이다. 그때가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외롭게 글을 써야할 것 같다(계속). 


2021년 1월 27일

날씨. 조금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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